cybernation_back.gif 통례공파 관련보 발간일람표 및 서문보기

발간년도

대동보

문정공파보

삼등공파세보

발간년도

대동보

문정공파보

삼등공파세보

1617(丁巳)

시간 정사보(1)

 

 

1977(丁巳)

 

문정공 정사파보

 

1617(丁巳)

시간 정사보(2)

 

 

1986(丙寅)

 

 

병인세보 서문

1704(甲申)

재교갑신보

 

 

1986(丙寅)

 

 

병인세보 발문 1

1748(戊辰)

3교무진보

 

 

1986(丙寅)

 

 

병인세보 발문 2

1796(己酉)

4교기유보

 

 

1986(丙寅)

 

 

병인세보 발문 3

1814(甲戌)

 

 

갑술세보

1986(丙)

 

 

병인세보 발문 4

1920(庚申)

5교경신보

 

 

1993(癸酉)

6교정묘보서문

 

 

1920(庚申)

 

경신파보 1

 

1993(癸酉)

6교간행사

 

 

1920(庚申)

 

경신파보 2

 

1999(己卯)

6교중수보

 

 

1925(甲子)

갑자대보

 

 

2005(乙酉)

7교전자족보

 

 

 

 

 

 

 

初校 族譜 跋(1)原文 서문목록보기

歲乙巳孝仲爲成歡督郵適韓君百謙來牧本州首訪始祖太尉公遺基謀所以設壇立碑以爲後孫依慕之地孝仲亦參助而成之後十年孝仲又錦還于玆邑復修壇上床具以備前人之未遑者一日與宗人前參奉韓赫語及於此曰吾韓大姓世有名顯莫非太尉公積累之餘慶而爲子孫者曾不是念昧於世系有同忘本良由宗法旣壤家無譜牒而然也今日之務莫切於是豈徒瞻掃封壇仰想芳躅而己哉思與宗人旁搜博訪撰次昭穆使吾身知其一源之出凡我宗人合亦謀諸赫曰噫余亦有志於此嘗搜輯有年而只恨其無可與共事者地主之言及此此誠吾門之大幸也事非偶然時不可失卽抵洛遍求宗門之家牒韓相國孝純出其所藏初稿與之竝以手錄一本以資其參考孝仲又搜聚湖西子姓之家譜若于較其同異反覆詳證只錄子姓而不及外孫者要在編帙不繁考閱簡易豈厚於內而簿於外也刪其支煩裏爲一部於是捐捧鋟梓以圖不杇在滿宗人隨力出財以助其役者亦多焉第以倉卒裏集必有關略未盡之處姑俟後人之考證增刪云

 

有明萬歷丁巳孟春 

 

後孫 通訓大夫行西原縣監 孝仲 謹跋

 

초교 족보 발문(1)譯文

 

  을사년에 내가 성환 독우로 있을때 마침 한백겸이 청주목사로 와서 먼저 시조 태위공의 유기를 찾아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후손들의 의모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 나도 참여하여 조력한바 있었다. 10년후에 다시 내가 청주읍의 성주로 금의환향하게 되어 다시 단을 개수하고 상구를 장만하여 전인이 미처 못한 것을 구비하여 놓았다. 하루는 참봉 한혁과 더불어 담화하던 중 "우리 한씨가  대성으로서 세세로 명성을 떨친 것은 태위공의 덕을 쌓은 음덕인데 자손된 우리들이 지금까지 이런 생각조차도 없이 집안의 계통에 어둡고 조상의 근본까지 잊어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종중에 규율이 없고 가문에 족보가 없는 까닭인지라 오늘날 할 일이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없는데 다만 제단이나 꾸미고 선조 유업이나 추모하는 정도로 지나고 말 것인가 .여러 종인들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자료를 찾아 모으고 계대의 상하 종지를 분명히 밝혀서 우리가 한 핏줄에 태어난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알도록 하자고 생각하는데 여러 일가 어른들은 이 일을 같이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안 하였더니 혁이 감탄하여 이르되 "나역시 여기에 뜻한 바가 있어 자료를 수집한 지가 여러해 되었으나 같이 손잡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한이었는데 이제 성주의 말씀이 이렇게 간곡 하시니 진실로 우리 문중의 큰 행운인지라 막중한 이 일이 우연히 되는 것도 아니고 시기도 또한 이 좋은 기회를 놓칠수 없다"하고 즉시 서울에 가서 각 종문에 순방하면서 가첩을 수집하였다. 정승 한효순은 소장하였던 초고를 내주고 또 수록한 참고자료 한권까지도 제공하여 주었으며 나는  또 호서의 일가집 가보를 수집하여서 그 다른점 같은 점을 대조하여 바르고 틀린점을 여러차례 수정하였으며 자손들만 기록하고 외손까지 넣지 못한 것은 편찬이 평이하고 보기가 간명하도록 하고자 함이요 본손만을 중히 여기고 외손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간명하게 일부를 편찬하여 영구히 전하려고 인쇄하게 되었는데 충청도 종인중에 가세에 따라 비용을 마련해서 조력한 분이 많았다.창졸간에 수집한 것이라 필연코 소루하고 미비한 것이 많을 것이다. 후인들이 잘 고증하여 증보하고 삭제하기 바란다.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정사(단기3950년서기1617년 광해군9년)정월

 

후손 통훈대부 행 서원현감 효중 삼가씀

 

初校 族譜 跋(2)  서문목록보기

 

惟我淸州韓氏有聲於吾東方殆將八百年矣家乘之相傳譜牒之行世者盖亦有之而降及來雲散逸無徵雖或有一二存者不過各爲支宗譜其近派而己未有收宗族而統始祖者亦未有繡諸梓而傳於後者以故世系不明骨肉無統旣不知來處又焉知尊祖敬宗底道理哉赫嘗慨然於斯欲一謀於宗族者素矣乃者姓孫孝仲甫剖符貫縣牧民之暇念及於此乃進赫而言曰吾欲刊行世譜以壽其傳子合爲我成之赫曰此乃赫向來志願而今承隆委敢避當仁於是抵洛謁諸今右台相公孝純告以此意相公大悅出其所藏草譜二卷而與之又馳書于洛下諸宗人所使之書送各派其間雖或有不爲樂應者旣律相公所賜草譜而歸與孝仲所嘗裏集一帙較其同異俾歸於正合爲一卷凡所撰次皆就質於使君又與子姓士人韓韓潭韓純立韓岌等共其參考焉先男後女而不及外孫重宗緖也王后世系不論內外而載之別板尊君父也摘出碑銘地志等文字書諸上頭明事述也若其同姓之散居諸道者與夫後生之未及知名者雖或脫漏而旣書祖考名號則爲後昆者可因是而知其來派矣鳴呼是譜也宗支甚明昭穆不紊世之先後族之親疎井井昭昭一披在目親親睦族奚止一門他日朝廷必有所益云時

                    

有明萬歷丁巳孟春上澣 

 

後孫 前叅奉 赫 再拜 敬跋

 

초교 족보 발문(2)

 우리 청주한씨가 동방에서 명성을 떨쳐온 것이 거의 800년이 된다.가승(家乘)이나 보첩(譜牒)이 전하여 오는 것이 있었는데 후대에 와서는 흩어지고 없어저서 찾아 참고할 수가 없고 혹시 한둘이 있다 하더라도 각자 자기파의 종지(宗支)를 위한 파보일 뿐이요 시조 이하 전 종족(宗族)을 통합한 것이 없고 또 이것을 인쇄하여 전한 것이없다. 그러므로 세계(世系)에도 어둡고 친족간에도 계통을 몰라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어찌 조상을 숭모하고 일족을 경애하는 도리를 알겠는가.
 내가 일찌기 이것이 걱정되어서 종친들과 의론하려던 차인데 마침 효중씨가 목민관으로서 공무에도 바쁜 여가에 여기까지 생각을 하시고 나에게 하는 말이 "내가 족보를 만들어 후대에 전하여 주고자 하는데 그대가 함께하지 않겠는가"하기에 나는"이것이 바로 나의 소원인데 이런 좋은 소임을 감히 회피할 수 있겠는가"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로 가서 좌의정 효순을 뵙고 이런 의도를 고 하였더니 공께서 매우 좋은 생각이라 찬성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초보 2권을 내 주시고 서울의 여러 종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각파에 통문을 발송하도록 지시하여 주시었다. 그 중에는 혹 이행하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상공의 초보를 가지고 와서 효중씨가 수집한 일질 보첩과 대조 교정하여 합편으로 한권을 꾸몄다.책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성주(현감 孝仲)님의 지도에 따르고 종인 중의 한율,한담,한순립,한급등이 협력하여 주었다. 기록에 있어 남자를 먼저 여자를 뒤에 하였으며 외손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본종(本宗)에 중점을 둔 것이요. 왕후 세계는 내외를 막론하고 별판(別板)에 기재한 것은 군부를 존경하는 뜻이요. 비명(碑銘) 지지(地誌)등 문자를 앞에 쓴 것은 사적(事蹟)을 밝힌 것이요 각 도에 흩어저 사는 일가나 후생으로서 알지 못하여 누락된 사람도 그 조고(祖考)의 명함과 호가 기재되어 있은즉 이것만으로도 그 래파(來派)를 알수 있을 것이다. 오호라, 이족보가 가문의 계통이 분명하고 소목(昭穆)이 효연(曉然)하며 세계(世系)의 선후 종족의 친소기 밝고 환하여 한눈에 볼 수 있으니 친친목족(親親睦族)이 우리 문중에 한한 문제일 뿐아니라 나아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유익하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정사(단기3950년서기1617년 광해군9년)정월 상한

                                                           

후손 전 참봉 혁 재배 경발

 

再校 族譜 序(原文) 서문목록보기


吾韓氏蔚爲三韓大族舊有族姓之書而世遠無徵至我  朝有韓淸平堰奉  敎撰  王后世系韓永興士介亦錄近派爲譜韓議政孝純有二卷譜韓別堤瓘亦有西平小譜而今皆不傳惜哉許僉正涵家有草譜一卷不知出於誰手而所記頗詳韓處士賁胤有草譜二卷雖未脫藁書例頗精韓議政所刊有韓氏世系事述但記直派而己至若韓中樞孝仲之譜急於入梓未及詳校故多有訛誤覽者病之卽淸州所刊丁巳本是也德亮嘗博考史傳譜牒參以諸家文集以正其訛添錄外孫以爲一卷而後生晩出則未及收錄又裏集史傳及墓道文字名以遺事搜出先代述作編爲一卷名以遺稿百年未修之書始得就緖今韓龍安塾取其書略加刪削又添錄後生合爲六卷刊而行之斯幸爾 

 

崇禎 重甲申秋

 

後孫 前直長 德亮 謹書

      

재교 족보 서

 

우리 한씨가 번창하여 삼한의 대족이 되었고 옛날부터 족보가 있었는데 세대가 오래되어 고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선때 와서 청평군 한언이 왕명을 받들어 왕후세계를 찬수한 바 있고 한영흥 사개가 근친을 수합하여 파보를 편찬한 바 있고 한의정 효순이 2권 가보(家譜)를 가진 것이 있었으며 한별제 관이 서평 소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전하여 오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허첨정 함의 집에 초보 한권이 있는데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수 없으나 기록된 것이 자못 자상 하고 한처사 분윤이 초보 두권을 가지고 있는데 비록 탈고는 되지 못하였으나 서록한 범례가 자못 정밀 하였다. 한의정 소장본은 한씨 세계와 사적이 있으나 단지 직파만을 기록하였고 한중추 효중이 편찬한 족보는 급히 인쇄하느라 자상하게 교정을 하지 못한 관계로 착오된 점이 많아서 보는 사람마다 지적하니 이것이 청주에서 출판한 정사보이다. 내가 일찍이 사서와 전기를 두루 열람하고 여러집 문집도 참고하여 잘못 기록된 것을 정정하고 외손까지 추가 기록하여 한권의 책을 꾸몄으되 당시 이후의 출생자는 미처 수록치 못하였다. 또 사서와 전기,묘도,문자를 수집하여 유사라 이름하고 선대의 저술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어서 "유고"라 이름하였으니 100년을 두고 못이룬 책이 이제 비로서 성사되었다. 이제 한용안숙이 그 책을 고치고 또 후생자를 첨기하여 6권으로 간행하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로다.

 

숭정(명의종 연호) 두 번째 갑신(단기4037년 서기1704년 숙종30년 청 강희43년) 가을

 

후손 전 직장 덕량 삼가씀

 

三校 族譜 序(原文)서문목록보기

 

我韓氏有譜始刊於  萬曆丁巳重刊於  崇禎再甲申族姓源派譜牒顚末具見於二譜之敍矣又後四十 餘年子姓益蕃生於甲申後己有抱孫者而名無所載則宜更有編輯之事而恨未有任之者矣宗人琦氏命玄氏喆增氏慨然倡議同力編修閱數歲而成凡十九編規模仍舊而節目加詳筆削之際攷證精確不但爲一時之完書亦可使百世而繼之則可見其用心之周詳而用力之勤敏也書將入梓元震書其事元震竊惟譜牒之作本爲尊祖牧族以厚風俗也而其要又在乎追本先德而謹守遺訓也盖聞先民之言曰德厚者流光德薄者流卑是以宋之名臣有爲其君進擇妃之說者必以帝王之後聖賢之後功勛之後爲先盖取夫德厚流光之義也惟我韓氏其源出於箕聖而始祖太尉公以麗朝佐命元勳名在壁上子孫之昌熾甲於東方以沙麓之祥最盛他族莫敢望焉則此豈無所由然者而所謂德厚流光者信不誣矣抑又念箕子契之世也而契爲虞司徒掌五敎啓萬世道學之原而本之於一敬字箕子以洪範之道來治東方用夏燮夷而五事之用又以一敬字包之自箕子以來歷羅麗千五百年間人不知學學不知敬惟我先祖文敬公柳巷先生始爲主敬之學而其說見於陽村權公近所選文集序矣然則敬字之訓有來歷而前所謂德厚流光者又豈無所本而然哉嗚呼吾韓氏先德之大有如是也而世代愈遠後承寢徵殆將與德薄流卑者同其歸焉則具爲先代羞何如也繼自今爲吾韓氏者莫不追念先德之大而謹守敬字之訓父以詔子兄以戒弟世世無替則尊祖收族無大於是而其爲世道之益奚但止於後風俗而己哉是說也元震雖甚不肖竊願與諸宗人講之故輒敢不辭而謹爲之書  

 

有明 崇禎後 再戊辰 仲秋日 

 

後孫  元震  敬識

 

3교 족보 서서문목록보기

 

  우리 한씨의 족보는 만력정사년(단기3950년 서기1617년)에 처음 간행하였고 숭정 재갑신(단기4037년 서기1704년)에 두번째로 간행하였으니 족성의 유래와 파계(派系)에 대한 족보의 시종경과가 이 두차례의 족보 서문에 밝혀져 있다. 다시 그후 40여년에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갑신년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 또 손자까지 보았으되 아직 족보에 기명되지 못하였다.

  의당 족보를 속간하여야 할 터이나 일할 사람이 없어 걱정이러니 종인 기씨 명현씨 철증씨가 개연코 발기하여 편집에 합심 전력한지 수년만에 완성하니 모두 19편이라 규모는 구보의 본을 따랐으나 세목에는 더욱 소상하고 주록에는 첨삭의 사유가 분명하여 비단 일시 보기에만 완벽한 것이 아니라 백세후 까지도 전할수 있게 되었으니 심력이 얼마나 주도하였던가를 가히 알 만하다.

  이제 인쇄할 단계에 와서 나에게 그 전말을 쓰라고 한다. 나는 생각컨데 족보를 편수하는 것은 본래가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을 단합하기 위한 일이며 그 요점이 선대의 유덕을 추모하고 유훈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다. 옛 말에 덕이 후한자는 후세에까지 은총이 미치고 덕이 박한자는 자손이 융성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송나라 때 명신이 그 임금의 비의 간택을 진언할 때는 반드시 제왕의 후예라든가 성현 또는 공신의 후예라는 것을 우선 말하였다 하니 그게 바로 세덕이 있는집 후예를 선택한다는 뜻인 것이다. 우리 한씨는 그 연원이 기자 대성에서 부터 계출되었고 시조 태위공께서는 고려개국의 원훈 벽상공신이시다. 자손이 번창하여 동방의 갑족이고 사록지상이 타성들이 감히 따를 수 없으리 만큼 융성하니 이 어찌 연유없이 그럴 수가 있겟는가. 덕이 후한자는 그 유택이 자손에게 미친다는 말은  과연 헛 말이 아니로다. 또 기자는 계의 후예이시다. 계는 우의 사도가 되어 오교를 주관하고 만세도학의 원류를 열었으되 敬자 한자에 그 근본을 두었었고 기자께서 홍범의 도를 가지고 동방의 미개한 민족을 교화하되 오교의 효용을 역시 경자 한자로써 총괄하였다. 기자 이래 신라 고려 1500여년 간에 사람들이 배움을 알지 못하였고 배워도 경자의 참 뜻을 알지 못하였더니 내 선조이신 문경공 유항선생이 최초로 敬자를 주로한 학문을 닦으셨으니 그 말씀이 양촌 권근이 서술한 문집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즉 경자로 가르침이 오래된 내력도 있고 앞에서 말한 "덕후유광"이란 것도 어찌 근거없는 소유라고 할 수 있으랴. 오호라. 우리 한씨가 선조의 유덕이 이토록 크지만 세대가 멀어질수록 자손들의 뒷받침이 미미해서 선대의 음덕이 없는 비열한 족속들과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면 그 선대를 위하여 수치스러운 꼴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지금부터 우리 한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선조의 유덕이 지대함을 추모하고 경자로 가르침을 정성껏 지켜서 어버이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를 훈계하여 대대로 변함이 없이 계승하여 간다면 조상을 존경하고 친족이 단합하는데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을 것이요. 나아가서는 사회도덕을 위한 도움이 비단 풍속을 순화하는것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불초하나 여러 종인들에게 간절히 부탁드리고자 하는 말씀이므로 감히 사양치 않고 서문으로 쓴다.

 

숭정(명의종)후 재무진(단기4081년 서기1748년 영조24년 청건륭13년) 중추일

 

후손 원진 敬識

 

四校 己酉譜 序(原文)서문목록보기

 

古之人有姓有氏繼以所自出而同其宗人謂姓或以祖字或以國號而別其族之謂氏而以氏爲姓者若子爲孔姬爲韓之類是己惟我韓氏亦然焉先出於殷太師箕子太師子姓黃帝之後成湯之孫東君朝鮮四十年壽九十三諡曰文聖歷四十一世有哀王諱準遷其國而改號曰韓又歷七世有元王諱勳生子三人曰友平爲鮮于氏曰友誠爲奇氏曰友諒居上黨而因國號以韓爲氏上黨淸州也吾東淸州之韓實源於此又歷羅麗九百年有高麗太尉威襄公爲開國元勳德業顯于世盖太師以上自黃帝至成湯自成蕩至太師世此皆有國乘之所載自太師至哀王自哀王至元王子世此亦有逸史之可據惟王子以下至威襄公其間世次應有譜牒之攸傳而散逸無徵自威襄公乃有繼序之可攷編以爲譜故律姓自王子爲始而以系牒之肇於威襄威襄公爲韓氏之鼻祖焉譜牒之始刊在於  皇明萬曆四十五年丁巳而重刊於丁巳後八十七年甲申三刊於甲申後四十五年戊辰族姓之散在遐鄕修其系派而來者不無訛誤紊亂而未及釐正覽者病之戊辰後今又四十餘年矣名不載而抱孫者多不可無踵修之役宗中惟我再從光燮甫從姪晩裕以任其事遂爲裒集各派反復考證襲謬者改之可疑者關之卷帙浩汗閱屢歲而始成凡二十三編序次綜密辨別詳明吾宗之譜於是乎完且整矣嗚呼我始祖威襄公以仁聖之裔克紹先烈積德種善以裕後昆子孫漸繁簪纓奕世麗之中末名碩輩出入我朝益昌而熾崧嶽之降沙麓之祥繼繼繩繩甲於他族而宗支蕃衍幾遍國中若子孫追念先德率乃由行勿替引之則吾門之世世昌大其可量乎功告綮屬光鐛書其事不敢以文拙辭玆以謹敍

 

正祖二十年丙辰 孟秋下澣

 

後孫 正憲大夫 前 行工曹判書兼 知義禁府 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光綮 謹書

 

 

四校 己酉譜 序(譯文)서문목록보기

 

  옛날 사람이 성이 있고 씨가 있었으니 자기가 유래한 시조때 부터 전하여 온 동종 간에는 성이라하고 혹 선조의 字나 나라 이름을 따서 족속을 구별하는 것을 氏라고 한다. 씨가 즉 성이 된것은 子氏가 孔가 성이 되고 姬씨가 韓가 성이 된類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 한씨도 또한 그런 것이여서 원래가 은태사 기자로부터 내려왔지만 기자의 성은 자씨였다. 황제의 후예인 성탕의 후손으로서 조선 군왕이 되어 재위 40년이요. 수가 93세이고 시호를 문성왕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41세 애왕 휘 준이 나라를 옮기고 국호를 한이라고 개칭하였다. 또 그로부터 7세 원왕 휘 훈이 아들 3인을 두었으니 우평이란 분은 선우씨가 되고 우성이란 분은 기씨가 되고 우량이란 분은 상당에 거주하셨기 때문에 국호를 따라서 한씨라고 하였다. 상당은 청주인지라 우리나라의 청주한씨는 여기서 발원되었고 다시 신라,고구려 900여년을 지나서 고려 태위 위양공께서 개국의 원훈으로 덕업이 세상에 현혁하시었다. 대체로 황제로부터 성탕까지와 성탕으로부터 태사에 이르기까지는 그 세차가 다 국사에 기재되어 있고 태사로부터 애왕까지와 애왕으로부터 원왕의 아들까지도 또한 사책에 고징할 만한 근거가 있다. 다만 왕자로부터 이하 위양공까지는 기간 세차가 당연이 보첩의 전래하는 것이 있을 듯하나 모두 흩어저 없어졌으므로 고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위양공부터는 계대의 서차를 고증할 수가 있어서 족보를 편집하였기 때문에 득성한 것은 왕자로부터 이지만 계첩은 위양공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위양공이 한씨의 비조가 되신다.

  보첩은 만력 정사(1617)년에 창간하였고 그 후 87년만인 갑신(1704)년에 재간하였으며 그 후 45년만인 무진(1748)년에 3간하였는데 사방에 산재한 각처 동족들이 보단을 꾸미여 왔으나 그릇되고 문란한 것이 많았었는데 이를 수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는 이들의 빈축을 샀다. 그 후 또 40여년이 되니 손자 본 늙은이도 족보에 이름이 오르지 못한 사람이 허다하여 계속해서 수보치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종중에서 내 재종형 광섭과 종질 만유에게 그 일을 위임하고 마침내 각파의 보단을 수집하여 고증을 소상히 밝혀서 그릇된 것은 교정하고 근원이 미상한 것은 삭제하였다. 권수가 많아서 여러해만에 편찬이 완성되니 모두 23편이 된다. 서차가 분명하고 변별이 소상하여 우리 족보가 이제야 완전히 정비된 것이다.

  오호라. 우리 시조 위양공께서는 인성의 후예로서 선대의 공덕을 잘 계승하시여 덕을 쌓고 선을 행하여 그 여경(餘慶)을 후손에게 끼처주시니 자손이 점점 번창하여 공경대부가 대를 이어 왔고 고려 중,말년대에는 명사와 석학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에 와서는 더욱 번창하여 장상이 나고 왕비가 탄생하시는 경사가 계승하니 타성들이 감히 따르지 못한다. 전국에 퍼져사는 자손들이 선대의 음덕을 추모하고 이를 본받아 끊임없이 행한다면 우리 문중이 대대로 번창할 것은 가히 알만한 일이다. 보사의 편찬을 맺고 나에게 그 서문을 청함으로 사양할수 없어서 이 사실을 권두에 서술한다.

                  

정조20년 병진(단기4129년 서기1796년) 맹추 하한

                 

후손 정헌대부 전 행 공조판서겸 지의금부 춘추관사 5위도총부 도총관 광계 삼가씀

 

五校 淸州韓氏 大同族譜 序(原文)서문목록보기

 

凡人道之廣大悠久道惡乎大仁爲大仁惡乎本以孝悌爲本而親親而仁民仁民而至於及物矣故聖人爲之著譜法始倣於周官小宗伯先王重本追遠之敎寓焉是以先儒惓惓於收宗族厚風俗使人不忘本者此也由吾上元元本本由吾下生生化化由吾左右散而蕃條衍流者譬如木必有從根直上亦必有旁枝又如水必有正脉發源亦必有分派自然之勢也上之下之孝悌之道遠矣左之右之睦婣之道博矣孝悌之道愈遠則睦婣之道愈博思所以博不可不收其族思所以收不可不修其譜譜者普以合之之謂也譜不修而曰孝悌之心油然而生云者吾未之信也嗚呼吾韓本出於  箕聖至太尉公始籍淸州種德毓祉歷年千餘旂常簡冊世厥聲猷道學文章代不之絶而遂以爲東方胄族其麗又不可勝紀豈不盛哉大同合譜凡四刊而正宗己酉後至今一百三十有年未有能續脩者各派諸宗恨未有任之者矣族人榮浩圭喆甫慨然倡議與炳周重浩養愚台東起源準錫同力編修此乃重本追遠之一道也豈不休哉自今以後擧吾韓氏各自追念先德明譜系立宗法惇孝悌睦婣而世世無替則廣大悠久之道有何加於此乎竊願諸宗氏相與講明而勉旃哉

 

歲庚申 仲春 上澣  

 

後孫 秘書丞 興敎 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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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人道라는 것은 넓고 또 커서 아무리 유구한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법이라. 어버이를 존경하고 친족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나아가서는 천하만물을 사랑으로써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孝悌(효제)를 근본으로한 人道(인도)는 넓고 크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족보저작(族譜著作)하는 제도를 마련하는데 주관소종백(周官小宗伯)의 근본을 존중히 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교훈을 본받아 꾸며 놓은 것이요. 또 이런 까닭에 옛날 학자들이 종족을 수합하고 풍속을 순화시켜서 사람으로서 그 근본을 저 버리지 못하도록 지도하는데정성을 다 하였던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는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 아래로는 손자에 또손자 옆으로는 형제 또 재종형제 이와같이 번져나가는 것이 나무에는 근간이 있고 지엽이 있으며 물에도 원류가 있고 지류가 있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상하로 계대(系代)가 멀어질수록 효제(孝悌)의 길이 멀어지고 옆으로 옆으로 파분되어 갈수록 화목하는 길이 엷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소원(疎遠)하여가는 가족을 수합하는 방법은 족보를 편수하는데 있다. 보라는 것은 두루 찾아서 합한다는 뜻이니 족보를 편수하지 않고서 효제 운운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오호라. 우리한씨는 본래 기자 문성왕의 후예로 시조 태위공께서 청주에 복거(卜居)하시며 덕을 쌓고 복을 기르사 천년이 지나도록 벼슬과 도학이 대대로 끓어지지 않아서 마침내 동방의 갑족이 되었으며 자손 또한 번창하였다. 이 어찌 장한 일이 아닌가. 대동합보는 4회를 간행하였으되 기유(1789)보가 간행(1796)된후 지금까지 130여년에 속간을 못하였기 때문에 각 문중에서 일할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던 차에 榮浩,圭喆 두분이 개연히 부르짖고 나서서 炳周,重浩,養愚,台東,起源,準錫등의 분들과 합력하여 이 보서를 편수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근본을 존중하고 선조를 추모하는 도리인지라 어찌 기쁜일이 아니리요. 이제부터 우리가 선조의 음덕을 되새기고 보계 종법을 세워서 효제하고 화목하여 대대로 전하여 가면 광대하고 유구한 인도가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종친 여러분들이 서로 서로 익히고 밝혀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경신년(단기4253년  서기1920년)중춘 상한

 

후손 비서승 흥교  삼가쓰다

 

 

五校 甲子 淸州韓氏 族譜 序(原文)서문목록보기

 

譜者家史也修之以時而不敢闕稽之以衆而不敢私無冒無誣也尤嚴於世次昭穆之除故乎遠而族大則不可不愼也吾韓爲我東之望綿延蕃衍可謂遠且大者譜始於  穆陵丁巳至  健陵己酉凡四修矣距今百數十年雖有派譜之間作而汔未之大同焉不幾於愈遠而莫徵愈大而難詳乎以時考之固宜續修之爲亟也去庚申乃有一二人妄自發刊訛謬舛錯不一而是至若威襄公十一代孫諱蕆號恕齊公以無后載錄者四譜皆然而忽以無據恣意塡充十有餘世有若血禪相仍者然嗚呼是誰欺乎此而不愼烏在其尊祖收宗之義哉諸宗爲是之懼僉議協同寔正是役是爲五校甲子大同譜發凡起例悉遵舊程而略有損益者因時宜爾庶幾無冒且誣而愼之又愼也閱一歲而工告竣謹識其槪于簡端以詔穉昧其所謂管攝人心之訓孝悌油然之旨舊序己備矣玆不敢贅云

 

維歲乙丑肇夏上澣  

 

後孫  昌洙  謹序

 

 

五校 甲子 淸州韓氏 族譜 序서문목록보기

 

족보는 가문의 역사이다. 적당한 시기에 편수해서 중단됨이 없어야 하고 중론을 모아서 계고해서 공정하여야 하며 모독함이 없어야 하고 허위가 없어야 한다. 더욱이 세차와 소목(昭穆)의 구분은 엄정히 하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세대가 멀어지고 족파가 많아질수록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우리 한씨는 우리나라의 명망있는 대성으로서 전래한 세대도 유구하거니와 족파도 또한 방대하다. 족보편수(族譜編修)가 광해 정사년(1617)에 창간되었고 정조 기유년(1789)에 이르기까지 4차에 걸쳐 편수하게 되었다. 그후 지금까지 일백수십년동안 간혹 파보를 편수한 문중이 있으나 대동족보를 이루지 못하였다. 세대는 점점 멀어져서 고징(考徵)할수가 없게 되고 종족은 점점 불어서 자상히 따지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따져 보더라도 당연히 족보를 속수(續修)하여야 할 형편이 되었다.

지나간 경신년(1920)에 한,두사람이 방자하게도 족보를 발간한 것이 왜곡되고 조잡함이 수없이 많은지라 위양공 11대손 諱 천() 號 서제공(恕齊公)은 前4차족보에 모두 무후(無后)로 기록되었는데 이제 갑자기 10여世를 아무 근거도 없이 채워서 혈손이 있는 것과 같이 꾸며 놓았으니 통탄할 일이로다. 이것이 누구의 장난으로 이런 불경한 짓을 하였는가. 이러고도 어찌 조상을 존경하고 친족의 단합을 꾀할 수 있으랴. 종중에서 이것을 송구(悚懼)스럽게 생각하고 협의해서 이것을 시정하려고 이보역(譜役)을 단행하니 이것이 바로 5교갑자대동보를 발행하게된 전말이다.

  족보의 범례는 모두 구제에 따르고 약간의 삭제와 첨기한 것은 형편에 따라 하였으되 대체로 보아서 모록(冒錄)이나 허위가 없고 조심 또 조심하였다고 볼수있다. 시작한지 1년이 지나서 이 보역이 준공되었기에 그 전말을 간단히 서술해서 모두가 다 알도록 하자는 것이요.인심을 영도하는 훈화라던가 효제를 교도하는 취지는 이미 구보 서문에 구비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乙丑年(단기4258년 서기1925년)初夏

 

後孫 昌洙 謹書

 

序文(6교 정묘대동보 서문)  서문목록보기

 

국가에서는 국사(國史)를 편찬(編纂)하여 치란(治亂)과 흥체(興替)를 밝혀서 후세에 전함으로써 위정자(爲政者)의 귀감(龜鑑)이 되게 하는 것이요.

각족성(各族姓)에서는 족보를 편찬하여 소목(昭穆)과 세계(世系)를 밝혀서 이를 후손들에게 전함으로서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사상을 고취(鼓吹)시키고자하는 것이니 이는 그 목적하는 바가 대체로 동일(同一)하여 인간사회의 필요 불가결(不可缺)의 요소라 하겠다.

국가에서 선정을 하면 국기가 공고(鞏固)해지고 사직(社稷)이 융성(隆盛)해지는 것이요 족성(族姓)에서 적선수인(積善樹仁)하면 문운(門運)이 창성하여 후승(後承)이 (繁衍)함은 만고(萬古)의 상리(常理)인 것이다.

우리 청주한씨는 기성(箕聖)이후로 유구(悠久)삼천여년동안 석보대덕(碩輔大德)과 명현군자(名賢君子)가 혁세상승(奕世相承)하여 동방대성(東方大姓)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원원유장(源遠流長)하고 근고지무(根固枝茂)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시조태위부군(始祖太尉府君) 이후 천유여년(千有餘年)에 후손이 번창하여 많은 종파로 나누어지니 각문중의 파보편찬은 불가승수(不可勝數)이나 대동보로서는 광해9년 정사초간보(丁巳初刊=1617)가 간행되었으며 이어서 갑신재교(甲申再校) 무진3교(戊辰3校) 기유4교(己酉4校) 및 경신‧갑자 5교(庚申‧甲子 5校)를 거쳐 금반(今般) 정묘제6교대동보(丁卯第6校大同譜)로 이어진 것이니 이는 실로 우금(于今) 370여 년간에 이루어진 한문(韓門)의 대역사인 것이다. 연이나 경신보(庚申譜=1920년 간행) 일부 소목(昭穆)의 오록(誤錄)으로 반질즉시(頒帙卽時) 종의(宗議)가 준발(峻發)하여 그 정정(訂正)으로 4년만에 갑자보(甲子譜)를 편찬하여 이를 교환해주고 회수한 경신보를 영구폐지한 사실을 추상(推想)해 볼 때 당시의 사안(事案)이 얼마나 중차대(重且大)했던가를 우리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후 70여 년 동안 사회풍조와 생활 상태는 급진적으로 변천되어 우리 한문(韓門)의 자제들도 과거(過去) 집성촌(集姓村)을 떠나 경향각지로 분산 이주하여 부자와 형제가 각분(各分) 동서(東西)하게 되니 소중한 대동보를 모신 종원(宗員)의 수는 희소(稀少)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신생후승(新生後承)의 번연(繁衍)으로 자질손증(子侄孫曾)의 누보(漏譜)됨이 불소(不少)함으로 거족적(擧族的)인 소명에 의해서 1986년 말에 제6교대동족보 편찬이 발의되었던 것이다. 전임 건수(建洙) 위원장이 사임을 하게 되니 그 후임에 불초(不肖) 양명(陽命)을 요청하기에 본인은 비재천식(菲才淺識)이라 감당할 수 없다고 누누(屢屢)이 고사(固辭)하였다. 그러나 다수 종원들의 권청(勸請)으로 부득이 수락(受諾)을 하게 되니 실로 시위소찬(尸位素餐)에 불과하였는데 전국 종친들의 봉선유후(奉先裕後)의 정성으로 3만6천여 쪽에 달하는 방대(尨大)한 수단(收單)을 5년여 만에 정서(精書)를 마치고 교정작업을 거쳐서 인쇄 제본을 끝내니 상세편(上世篇)에다 각파손록(各派孫錄) 23권을 합하면 대동보(大同譜)가 되는 것이요. 또 상세편에다 자파손록(自派孫錄)만을 합하면 파보(派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전 종중의 노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이 소중한 대동족보를 인쇄하여 전국종친들이 가봉호장(家奉戶藏)케 되었으니 이는 우리 청주한문(淸州韓門)의 역사적인 대성사(大盛事)라 아니할 수 없다.

관수경독(盥水擎讀)하면 조종(祖宗)의 세차(世次)와 후승(後承)의 파분(派分)이 질서정연하여 열연(悅然)히 우리 종족(宗族)들이 한집(一堂)에 회합(會合)한 화수회(花樹會)와 같아서 소동파(蘇東波)의 관오보즉효제지심유연생(觀吾譜則孝悌之心油然生)이라는 구절이 새삼 실감이 난다. 예기(禮記)에 인도재어친친(人道在於親親)이라 하였으며 시전(詩傳)에 율수궐덕무첨이조(聿修厥德無忝爾祖)라 하였으니 우리 모두 덕을 닦고 행실을 가다듬어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선조들의 거룩한 명절(名節)을 더럽히지 말고 종족간(宗族間)에 화목하기를 기원(冀願)하면서 위와 같이 서사(序詞)하노라.

 

단기 4326년(1993) 12월   일

 

제6교 대동족보 편찬위원회 위원장 양명(陽命) 근식(謹識)

 

刊行辭(제6교 정묘대동보 간행사)서문목록보기


대저 천지간(天地間)에 만물(萬物)은 모두 근원이 있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생성유래(生成由來)를 쫓아 살피고 그를 바탕으로 보다 발전하는 앞날을 개척하고자 힘쓰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정신적 욕구라 할 것이다. 이로서 기록으로 이어지는 것이 크게는 나라의 국사(國史)요 작게는 한 가문(家門)의 족보로서 국사 없는 나라가 없고 족보 없는 집안이 있을 수 없다. 한 나라에 역사가 있음으로 해서 선인(先人)들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이 보존됨과 아울러 한 민족의 얼이 영구불멸(永久不滅) 할 것이요 한 집안의 족보가 있어서 조선(祖先)을 경모숭봉(敬慕崇奉)하는 인륜도덕(人倫道德)의 바탕아래 한 문중(門中)의 혈통이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승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급격히 고조되고 세계가 1일 여행권으로 발달하여 자칫 민족적인 역사의식(歷史意識)내지 씨족적 혈통관념이 점차 해이해져서 망본(亡本)의 우(愚)를 우려하는바 이에 선세지훈(先世之訓)을 받들어 경조사상(敬祖思想)을 일깨우고 효제지심(孝悌之心)을 배양하며 돈종목친(敦宗睦親)의 양식(良識)을 고취(鼓吹)하여 나아가서는 국가사회의 미풍양속을 진기(振起)함에 도움 되기를 기망(企望)하면서 보사(譜事)에 임(臨)하는 것이다.

우리 청주한씨의 대동족보는 조선조 광해9년 정사(丁巳=단기3950, 서기 1617)에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갑신(甲申=1704)에 재교(再校), 무진(戊辰=1748)에 3교하였으며, 기유(己酉=1789)에 4교하고 경신(庚申=1920)에 5교하였으나 폐간(廢刊)의 불행을 겪게 되어 갑자(甲子=1924)에 보정(補正) 5교하였다. 따라서 한성(韓姓)의 유래와 파계(派系)에 대한 족보의 시종경과(始終經過)가 선세서문(先世序文)에 명명소재(明明昭載)되었다.

선례(先例)에 따라 구록(舊錄)을 등초(謄抄) 승계(承繼)하고 8역(域)에 산거(散居)하는 각파의 보단(譜單)을 수집(收輯)하여 당해문중(當該門中)의 고열(考閱)과 교정(校正)을 거쳐 정초지계(正草之計)하였으나 소루(疏漏)함을 면키에는 불급(不及)이다. 시조하(始祖下) 11세(世) 서제공(恕齊公) 휘천(諱蕆)은 초간보(初刊譜)이래 4교 기유보(己酉譜)까지 무후(无后)로서 경신입록(庚申入錄)의 계승소목(繼承昭穆)이 모록(冒錄)이라 하여 급기야(及其也) 4년 후 갑자보정(甲子補正) 5교보(五校譜)를 간행하기에 이르렀고 경신보(庚申譜) 영위폐지운운(永爲廢止云云)의 선록(先錄)을 회억(回憶)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조실록(李朝實錄=조선왕조실록) 태종3년 5월조에 한천(韓蕆)은 거부이무사운운(巨富而無嗣云云)의 실록으로서 고증(考證)하면 전후실사(前後實史)를 반증(反證)하는 적확지증(的確之證)이 없는 한 선세(先世) 유록(遺錄)을 승전(承傳)함이 마땅하다는 종의(宗議)로 맺어진 바를 소명(昭明)하는 바이다.

다만 실상(實相)을 첨기(添記)코자 하는 소이(所以)는 시원(始源)은 알 수 없으되 제주문중(濟州門中)에서 서제공(恕齊公)의 추모단(追慕壇)을 세워 향화전례(香火奠禮)를 하고 있음이니 내력(來歷)을 밝혀(2년여에 걸친 종의로도 결론을 얻지 못했음) 금차(今次) 6교보 동참(同參)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함이다. 이는 분명한 사실에 이어지는 사실고증불급(事實考證不及)에서 비롯하였음이며 우리가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하자는 뜻은 선인들의 가르침과 전해주심을 그릇되게 하지 않으려함이요 나아가 후인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옳게 전승시키려 함이니 금차오한(今次吾韓) 제6교대동족보(第6校大同族譜)를 간행하면서 경신‧갑자보의 정신을 교훈 삼으려함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5교갑자보 이후 70여년 만에 6교대동보가 편찬되는 시점에서 한(恨)을 삼키며 감당(堪當)해야 되는 어려움이 더했음은 지난 70여 성상(星霜)을 겪는 사이 우리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강탈(强奪)되고 성명(姓名)마저 창씨개명(創氏改名=本姓名을 고수한 이도 많음)이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유린(蹂躪)을 당하였으며 8.15광복(光復)으로 국권(國權)은 찾았으나 혼란한 과도기를 면키도 전에 6.25남침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으로 양분된 국토에서 부모 형제 부부가 남북으로 이산(離散)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수난을 꿈엔들 예기(豫期)하였으리요. 온 국토가 초토화(焦土化)되어 구명도생(救命徒生)이 초미지급(焦眉之急)이요 국토재건이 당면한 명제(命題)이며 경제회생만이 연명(延命)의 길일진대 나의 선계(先系)가 누구이고 또 그분이 무엇을 하였으며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가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음은 누구나 겪은 상황이다. 이와 같이 외침(外侵)과 내우(內憂)의 격랑 속에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족보)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온 세대가 오늘의 기성층(旣成層)이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모른다는 것이 죄 일수는 없으되 그러나 모른다는 유산을 후세에 남겨줌이 마땅하다는 당위(當爲)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병인(丙寅=1986)년말에 대동족보 편찬을 발의(發議)하여 익년(翌年) 정묘(丁卯) 계하(季夏)에 종의(宗議)로서 확정하고 이래 7년여의 오랜 시일을 거치는 동안 무수한 선세 사료(先世 史料)를 근기(根基)로 탐구(探究)하고 상호보정(相互補正)하면서 유루(遺漏)없이 등록(謄錄)하려는 성의(誠意)를 기울여 왔다. 그러나 난세(亂世)를 겪는 사이 중간 실계(失系)하여 후승계목(後承系目)을 정립(定立)치 못하는 예가 불소(不少)하였음도 심히 아쉬웠던 사안(事案)이다. 지극히 다행한 일은 관북(關北=함경남북도)에 집성세거(集姓世居)한 예빈윤공(禮賓尹公=諱連)파와 한양위관(漢陽爲貫)한 문절공(文節公=諱宗愈)파 그리고 금계위관(錦溪爲貫)한 금계군(錦溪君) 휘교(諱皦) 후손이 청한대보(淸韓大譜)에 상재합보(上梓合譜)한 경사이다. 이로서 다소의 아쉬움은 있으나 명실공(名實共)히 시조하(始祖下) 제종(諸宗)이 합일수보(合一修譜)하여 과시(果是) 목족지계(睦族之計)를 성취하였다고 감히 자위(自慰)하여 보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정부자(程夫子)의 겨레를 결속(結束)케 하고 풍속을 두텁게 한다는 교훈에 등지지 않을 것이니 끊임없이 고루 화목(和睦)하고 서로 돕고 깨우쳐 우의를 돈독히 하면 이것이 대동족보(大同族譜)의 큰 뜻이 아니겠는가.

수보과정(修譜過程)에서 불피풍우(不避風雨)하고 제반(諸般) 애로(隘路)를 극복하며 수단(收單)에 진력하신 각 문중 유사첨현(有司僉賢)에게 돈수심사(頓首深謝)하고 아울러 선세의 숭고하신 수인정신(樹仁精神)을 바탕으로 경조돈종(敬祖敦宗)하여 한성(韓姓) 70만이 무궁(無窮)하게 번륭(繁隆)하기를 기원하면서 과문(寡問)하고 천학(淺學)한 비재(菲才)가 보역(譜役)을 주간(主幹)하고 감이(敢而) 사문지기(辭文之記)하니 공구(恐懼)한 심회(心懷) 불금(不禁)이나 전후(前後) 전말(顚末)의 기술(記述)이라 혜찰(惠察)하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총 3만6천여면(面) 24책에 이르는 성사(聖事)를 필역(畢役)하기까지 진심갈력(盡心竭力) 현로(賢勞)하신 임원제위(任員諸位)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시종협로지역(始終協勞之役)하신 철희(喆熙) 부유사(副有司), 갑수(甲洙) 상욱(相昱) 상범(相範) 유사(有司)에게 각별히 후위(厚慰)를 드린다.

끝으로 보편집상(譜編輯上) 회모경선(懷慕敬先)에 혹유(或有) 소루(疏漏)일까 한출첨배(汗出沾背) 송구만천(悚懼萬千)이나 후일 속수현종(續修賢宗)의 질정(叱正)이 있기를 간촉(懇囑)하면서 간행사에 가름하는 바이다.

 

단기 4326년 계유(癸酉) 지월(至月=12월) 회일(晦日=그믐)

 

도유사(都有司) 문양공후(文襄公后) 익수(益洙) 근식(謹識)

 

 

序文(6교중수보 서문)서문목록보기

 

가승(家乘)을 밝히고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하는것은 세계민족사상(世界民族史上) 유례(類例)없는 한국특유(韓國特有)의 전통(傳統)인 것이다. 가문(家門)들은 장구(長久)한 기간(期間) 계승(繼承)되고 혁혁(爀爀)한 선조(先祖)들의 공업(功業) 위적(偉蹟) 유사(遺事) 등을 엮어 일문가족(一門家族)의 긍지(矜持)로 삼고 나아가 그 값진 내력(來歷)을 후대(後代)에 전(傳)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품성(品性)은 천부(天賦)의 것으로서 안으로는 심성(心性)의 이(理)와 기(氣)의 작용에 관한 심리학적(心理學的) 논거(論據)의 대상(對象)이 되지만 밖으로는 인간생활(人間生活)의 질서(秩序)와 법도(法度)를 지탱해주는 (論理)의 근간(根幹)이 되는 것이다.

윤리(倫理)라는 것은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의 행동철학(行動哲學)으로서 그 윤리(倫理)의 제일의적(第一義的) 근거(根據)는 부자관계(父子關系)에 있는 것이며 부자관계(父子關系)를 종적(縱的)으로 부연(敷衍)하면 위로는 부(父), 조(祖), 증조(曾祖), 고조(高祖)에서 시조(始祖)에 이르고 아래로는 자(子), 손(孫), 증손(曾孫), 현손(玄孫)으로 만대(萬代)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보(族譜)라는 것은 시조(始祖)로부터 현유(現有)하는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일족(一族)의 각항(各項) 사유(事由)와 계통(系統)을 세대별(世代別)로 수록(收錄)한 일가(一家)의 혈족사(血族史)요 일족(一族)의 전모(全貌)를 밝히는 명세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족보라는 문헌을 통해서 고귀하고도 위대한 조상의 혈맥(血脈)을 계승(繼承)한 자기위치를 확실하게 재인식하게 될 뿐만 아니라 명조(名祖)의 위업(偉業)을 현양(顯揚)할 스스로의 사명을 자각(自覺)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우리 청주한문(淸州韓門)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문거족(名門鉅族)으로서 선조들의 혁혁(爀爀)한 행적(行蹟)과 덕행(德行)은 나라와 민족의 기둥이었으며 타성(他姓)의 표본이 되어 부러움을 사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당대(當代)는 물론 우리의 자손에게까지 이러한 조상의 행적(行蹟)과 덕행(德行)을 본받아 가풍(家風)을 떨어뜨리지 말고 각자의 생업에 힘써가며 경조사상(敬祖思想)을 더욱더 돈독(敦篤)히 하기 위하는데 이 중수보(重修譜) 간행(刊行)의 첮번째 의의(意義)가 있다고 하겠다.

둘째로는 우리 혈족(血族)들의 갈래(派)의 자취를 더 한층 확인하고 이로서 혈족간의 친화(親和)를 굳게 얻고자 하는데 간행의 뜻을 두고자 한다.

셋째로는 중수보(重修譜)를 살펴보시면 아실 일이지만 우리 가문의 과거로부터 현재와 장래에 이르는 영속성(永續性)과 일관성(一貫性)을 얻고자 편찬(編纂)된 점에 뜻을 두고자한다.

옛것을 그대로 다시 나타내고 현재를 밝히고 또 장래에도 이 중수보(重修譜)를 승계(承繼)시킴으로서 가문의 역사를 밝혀 나가고자하는데 뜻을 두었던 것이다.

부디 이 중수보(重修譜)를 좌우(左右)에 가까이 두시고 살펴보기를 바라며 경조(敬祖) 애친(愛親)의 뜻을 더욱 살피신다면 이  중수보(重修譜) 간행(刊行)에 참여했던 저희들은 크나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서기 1999년 2월  일

 

청주한씨중앙종친회 회장 겸 중수보편찬위원회 위원장 韓琄洙(한현수)

 

文靖公 庚申派譜 序1 서문목록보기

 

凡人之 明先季而 收宗族하야 合爲一書하야 名之曰 譜라.班氏之 明先系는 上自令尹하고 蘇公之 收宗族은 不及袒免하니 族法之 謹嚴이 果何如哉아 噫라. 族之有譜가 譬如木之 有本하고 水之有源하야 令夫木之有 千枝萬葉이 乃至 高千丈而 蔭百畝者니 其實은 一本也요. 水之 千派萬流가 乃至 蓄五湖而 放四海者니 其初는 一源也라. 或有 他根之 依附而 交柯連理가 與薦蘿之 寄生者요. 他源之合流가 如涇與渭 淄與澠者를 有眼者-莫不辨焉이라. 此非但有 違周官尊繫世之 義라. 亦不可 議到於

管攝天下에 使民으로 與於 孝悌睦婣之 風者-章章明矣라. 惟我 淸州之韓은 自麗代로 爲左海著姓而 譜牒이 始刊於 穆陵後丁巳하고 再修於 明陵甲申하고 三修於 元陵戊辰하니 今 七十餘年之間에 雖有 一再繼修者而 文獻이 無徵하고 稽考無因하야 殽訛之弊가 雜出漫漶之中하야 如依附與寄生之托于根과 合流之混于源이未足以徵信於後世而有失於尊祖重宗之本意者-亦不淺尠할새 畊愚等이 庸是爲懼하야 詢謀于 同族하야 先修 文靖公派譜할새 直史公後孫 賢睦이 聞以喜之하고 抱單而萊하야 要與同譜크늘 誼在惇宗이라. 合而編之하니 閱二寒暑而 功告訖이라 從玆後로 明先系 收宗族之義揭如日星而 殽訛漫漶者-不得廁於其間矣라. 若夫更修大同譜之日에 依此義하야 簡嚴以正 綱條하고 惇厚以合情禮하야 上接戊辰以前三譜하야 不迷於疑信之傳하고 不奪於幽顯之權昭하야 垂前人成憲者하니 畊愚等 實有望於 後來云爾라.

 

庚申小春

 

後孫 前行陵參奉  畊愚敬書

 

 文靖公 庚申派譜 序2  서문목록보기

有族祈有譜하고 有譜祈不可不修나 然이나 修之亦戞戞難矣라.寧嚴인정 無濫이요 寧簡이언정 無繁이니 其修譜之大方乎인저 吾韓은大族也요.譜之修不一再矣라.族大故로 恒恐其或繁하고 不一修故恒恐其或濫이라.於是乎派譜作焉하니 蓋不得己云이라.不肖 猥從諸族後하야 勉是役則 旣致嚴矣요,又兢兢乎久遠之道하야 乃稍改舊規하야 舍其層格橫看之圖而悉縱書之하니 爲其簡也라. 或有難之者면輒爲之解曰橫者는 互見錯出而 縱則段落瞭然하니 此巧閱之簡也요 橫者는 卷裳重大而縱則去三之二하니 此藏奔之 簡也요 若其費省冗節하야 爲備物竣工之 簡則猶之未爾라. 譜也者는 簡嚴而己라. 他奚有焉고 且譜有序自 宋蘇洵氏라.始近見星州之 一士人이 有遊上하야 得蘇氏手書譜草而歸者하니 其縱書之例가 略與吾譜로 同이요. 我 朝蘇齊盧氏譜 亦然하니 又 豈吾私智之 所敢幷刃行也哉아. 旣以解難者로 弁其誼於卷首하야 來者 遵修焉하노라.

後孫 前行 軍部協辦 鎭昌 敬識

 

文靖公派譜 再校 序文서문목록보기


譜也者는 何爲而作也요 在乎尊祖收族하야 以厚風俗也요 又在乎推本先德而謹守遺訓也라 惟我淸州之韓은 發源于箕聖而 麗朝佐命元勳 壁上功臣太尉公爲 上祖하야 奕世蟬聯하야 爲東國著姓而 中世에 文靖公 盛德勳業이 昭載史乘이라 譜牒之作이 始刊於 穆陵丁巳하고 再修於 明陵甲申하고 三修於 元陵戊辰하고 四修於 正宗己酉하고 後 又 別刊 文靖公派譜於 庚申하고 五修於 甲子하니 訖今五十餘年矣라 爾後에 己有生卒嫁娶之 許多迭遷而 尙無所載則宜更有續修之事나 然而 滄桑이 屢變하고 民俗이 日渝하야 彛倫이 不敍라 天下에 不復知尊祖收族之道하야 可不惕然哉아 噫라 太尉公 子姓이 遍於域中而 其麗不億이라 雖太平之世라도 難致盡合은 勢所固然이온대 況今 國土分斷하야 南北이 阻隔이라 間有各家派譜之作而 亦不免 踈漏之弊하니 以此推之컨대 大同之合을 尤何可望哉아 庸是爲懼하야 去年春에 文靖公之 後裔者-會于廣州之永慕齊하야 皆以爲斯世之急務가 莫如修譜라하고 相與議定而 先修派譜焉하니 其規는 一遵乎 庚申派譜也라 同心協力하야 閱寒暑而告成하니凡十七編十一冊이라 編修之 規模가 詳確精密하야 不但爲 一時之完書라 可將爲 百世之信史也로다 書將登梓에 諸宗이 俾英愚로 書一言于卷端이어늘 顧余蔑識이니 何敢當之而 亦何敢辭哉아 恭惟我 文靖公은 中世之 顯祖也요 其孫之麗도 於淸韓에 居半而巨卿名公이 迭次交作이라 嘗聞水之源深者는 其流遠하고 木之根厚者는 其枝茂하고 人之有積德累仁者는 其子孫이 繁殖이라하니 吾派之蕃衍者-顧非文靖祖積累之遺澤歟아 夫推以上之則千百世而爲一本也요 推以下之則一本而爲萬殊也라 惟其一本之理로 究以推之則 仁愛之心이 油然而生하고 親睦之道가 自不得不爾耳라 凡爲吾氏而 修吾譜者-推究根源則 千派萬枝가 同歸又一本이라 使遠近親踈로 各得其心而 協于一則是將以 一人之心으로 及於一族하야 無不致其尊祖收族之 厚風하고 又可致其推本先德而 謹守遺訓也이라 詩에 曰無忝爾所生이라하고 又曰 式殼以之라하니 凡吾宗者-尙與勖之哉인저 

 

檀紀四千三百十年(1977) 丁巳 淸明節

 

後孫 英愚 謹識

 

淸州韓氏 族譜 序(原文)(삼등공파세보초교) 서문목록보기

 

我韓出自殷太師始封朝鮮後爲馬韓故因姓韓貫于淸者志其居也王子諱友諒爲得姓之祖威襄公諱蘭爲繼承之祖而其下世次或疑文獻莫徵至檢校公諱希愈系牒始詳韓之譜自此可紀有淸平君堰所撰  王后世系有永興先祖所錄近派譜有別提瓘西平小譜有處士賁胤草譜未刊者而皆逸而不傳至如同樞公孝仲氏所刊丁巳譜略則略矣正莫正焉有故直長德良氏所輯甲申譜裒集史傳參据墓文訂訛補闕例謹嚴實我家之惇史也嗚呼今距甲申一百有七十餘載之間有戊辰譜卽南塘公所總裁而或不無考證未該處又有己酉丁亥等譜紛然繼出而其譜法不嚴間多疵類故諸宗不之譜焉故參判兢人氏懼譜牒之愈久愈紊衋宗盟之日遠日疎聚族而謀曰吾韓巨閥也源流旣長派別益繁大宗合譜事役浩大今不可遽議而若自吾十一世先祖三登府君以下別爲派譜則世代未遠子姓不多卷帙無幾事甚易易且其繼序之所由始支裔之所由分歷歷可僂指數也雖或有匪族認族冒欲贅附者斷不得容其奸於其間矣又如諸族中若有私自曲疪掩諱挾雜者則罪不免於誣祖圮族之科矣嗟我宗黨寧有是哉衆皆曰敬諾於是嚴譜例詳譜單功役方始而墓草己宿追惟疇囊曷勝愴咽其胤正夔克負荷銜恤編摩以繼先志屬余弁卷余固不文然義不敢辭略其槪謹書

 

崇禎紀元四甲戌 

 

後孫 儀鏞 謹書

 

淸州韓氏 族譜 序(譯文)(삼등공파세보초교)

 

우리 韓씨는 중국 殷나라 箕子를 조선에 封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뒷날 馬韓이 됨으로 성을 韓으로 하고 청주로 관향을 한 것은 그 거주지를 뜻한 것이라. 왕자 諱 友諒(우량)이 성을 얻은 조상이고 威襄公(위양공) 諱 蘭(란)이 계승한 조상이라. 그 이하로 세대가 혹 의심이 나고 문헌이 증거할 수 없으며 檢校公(검교공) 諱 希愈에 이르러 보첩이 비로소 상세하게 되었으니 한씨의 족보가 이로부터 기록한 것이라. 淸平君(청평군) 堰(언)이 지은 王后世系(왕후세계)와 永興(영흥)선조가 기록한 近派譜(근파보)와 別提(별제) 瓘(관)이 지은 서평(西平)소보와 處士 賁胤(분윤)이 지은 草譜가 있으되 다 간행하지 못하고 없어져 전하지 않으며 同樞公 孝仲氏가 간행한 정사(1617년)보는 소략하기는 하나 정확하기는 더할 수 없으며 直長 德良氏가 편집한 갑신(1704년)보는 국사와 전기를 모으고 묘갈문을 참고로 해서 와전된 것을 바로잡고 빠진 것을 보충하고 譜規를 엄중하게 해서 만들었으니 실제로 우리 가문에 중요한 사적이라. 슬프다 이제 갑신년이 일백칠십여년이니 그간에 무진보(1748년)는 곧 남당공이 만든 것인데 고증이 정확치 못한데가 있고 또 기유(1789년),정해보를 계속해서 만들었으되 보법이 엄중하지 못해서 간혹 하자가 많으므로 모든 일가들이 족보로 인정하지 않은지라 돌아가신 參判 兢人(긍인)씨가 보첩이 오래되면 더욱 문란해질까 두려워하고 宗規가 날이 갈수록 소홀해질까 슬퍼해서 일가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우리 한씨는 큰 문중으로서 원류가 길어 파가 갈라진 것이 더욱 복잡해서 한씨 전체가 합보를 하려하니 일이 너무 방대하여 이제 갑자기 논의 할 수가 없는지라 나의 十一代祖 三登公以下로 별도로 파보를 한즉 대수가 멀지 않고 자손이 ㅁ치 않아 책권이 얼마되지 않으며 일이 심히 수월하고 또 그 계통에 시작된것과 자손들의 갈라진 바를 역력히 손꼽아 셀 수 있는지라 비록 혹 일가가 아닌 것을 일가로 인정하고 붙이고저 하는자는 단연코 그 간사한 짓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또 만약 일가중에 왜곡되게 숨기고 협잡을 한즉 죄가 조상을 속이고 일가를 무너뜨리는 행동에 면치 못할 것이라. 슬프다 우리 종친들이 어찌 이런 행동을 하리오"하니 여러분이 다 말하기를 옳아 하는지라 이에 보규를 엄중하게 정하고 수단을 상세히 하도록 해서 일을 시작했으니 해가 이미 지났는지라 지난날을 생각하니 어찌 슬픔을 이길까. 그 아들 正夔(정기)가 능히 책임을 지고 편집을 했으니 어버이의 뜻을 계속한 것이라.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거늘 내가 진실로 글을 잘못하나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 그 줄거리를 쓰노라.

 

崇禎(명 의종의 연호)紀元 四甲戌(1814년 순조14년)

 

後孫(후손) 儀鏞(의용) 謹書(삼가쓰다)

 

三登公派 丙寅世譜 序文(삼등공파병인세보)서문목록보기


族譜(족보)를 刊行(간행)함은 無他(무타)라 國家(국가)에는 歷史(역사)가 있어 國家興亡(국가흥망)과 政治風土(정치풍토)며 文化發展(문화발전)을 明確(명확)히 記錄(기록)하여 後世臣民(후세신민)에게 周知(주지)시키고 各(각) 家門(가문)에서는 族譜(족보)를 編刊(편간)하여 自家門中의 根源(근원)과 先祖(선조)들의 國家에 對(대)한 公績(공적)및 奉公思想(봉공사상)이며 遺蹟(유적)및 遺訓(유훈)을 明記(명기)함으로서 子孫(자손)이 龜鑑(귀감)으로 삼고 派別(파별)과 宗族間(종족간) 遠近繼寸(원근계촌)을 明白히 나타냄으로 路上之人(로상지인)과 달리 團結和合(단결화합)함을 目的(목적)으로한다. 惟我淸韓(유아청한)은 始源(시원)于 箕聖(기성)하여 麗朝統合(려조통합)三韓壁上功臣(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삼중대광)門下太尉(문하태위)諡威襄(시위양)諱蘭(휘란)을 爲始祖(위시조)하니 東國著姓(동국저성)으로 入朝鮮(입조선)하여 開國功臣(개국공신) 領議政(영의정) 西院府院君(서원부원군) 諡文簡(시문간) 諱尙敬(휘상경)과 西平君(서평군) 諡文靖(시문정) 諱繼禧(휘계희)의 盛德勳業(성덕훈업)은 明載史乘(명재사승)이라.  淸韓之譜(청한지보)는 始刊於(시간어) 穆陵丁巳(목릉정사-1617년)하고 再刊于(재간우)明陵甲申(명릉갑 신-1704년)하고 三修於(3수어) 元陵戊辰(원릉무진-1748년)하고 四校於(4교어) 正宗己酉(정종기유-1789년)하고 基後庚申(기후경신-1920년)에는 別刊于(별간우) 文靖公派譜(문정공파보)하고 五修於(5수어) 甲子(갑자-1924년)하고 丁巳(정사-1977년)에 文靖公派譜를 再刊(재간)한지 不過十年(불과10년)이라. 文靖公 第三子이신 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를 刊行(간행)함에 있어 基(기) 境緯(경위)를 一言코자 하노라.  三登公 派譜는 初刊于(초간우) 純祖十五年 甲戌(1814)이니 至今(지금)으로부터 百有十餘年(백유십여년)矣라. 然則(연즉) 基間(기간)에 三登公派譜 再刊이 宜當之事(당연지사)였으나 文靖公派譜를 再刊케 됨으로 有意 未遂(유의미수)이던 中 三登公의 曾孫(증손)되시는 參議公(참의공) 諱祿字(휘록자) 後裔(후예)들이 連絡未備(연락미비)로 庚申(경신),丁巳兩譜(정사양보)에 不參(불참) 漏譜(루보)됨으로 今番(금번) 三登公派譜  刊行을 結議(결의)함에 있어 巨額(거액)을 刊行費(간행비)로 獻納(헌납)하여 줌으로 無難(무난)하게 完成(완성)케되니 多幸之事(다행지사)라. 其他 門中에서도 誠議(성의)를모아 修譜(수보)함에 都正公派(도정공파) 代表(대표) 澤圭(택규)와 通禮公派(통례공파) 代表 叔豹(숙표) 兩賢(양현)을 爲始(위시)하여 常務(상무) 禮東(예동) 族侄(족질)이며 編輯人等(편집인등)의 積極的(적극적)인 協力(협력)으로 不過(불과) 半年餘(반년여)에 完成(완성)케 됨을 僉宗諸賢(첨종제현)에게 感謝(감사)드리며 未備(미비)된 点이 不無(불무)할지나 後日(후일) 補完(보완)키를 바라며 序(서)에 代하노라.

 

檀紀四三一九年(서기1986년) 丙寅 菊秋 

 

三登公 十三代孫 晳鎬 謹序

 

三登公派 丙寅世譜 跋(1)서문목록보기

 

天地萬物(천지만물)이 各(각) 有根源(유근원)하야 發達繁昌(발달번창)함은 大自然之理(대자연지리)라.其中(기중)에 惟人(유인)이 最貴(최귀)라 함은 必是(필시) 三綱五倫(삼강오륜)의 法度(법도)가있음이며  自古(자고)로 우리나라를 禮儀東方(예의동방)이라 稱(칭)함은 崇祖精神(숭조정신)과 孝親敬長之道(효친경장지도)를 繼承發展(계승발전)시켜온데 基因(기인)함이니라.우리韓民族(한민족)은 先祖(선조)의  功德(공덕)과 遺訓(유훈)을 後孫(후손)에게 周知(주지)시켜 龜鑑(귀감)이 되도록하고  家系(가계)를 明確(명확)히 記錄(기록)하여 萬代(만대)에 至(지)토록 傳(전)키 爲하여 普合成冊刊行(보합성책간행)함을 名曰(명왈) 族譜(족보)라 한다.

惟我(유아) 淸州之韓(청주지한)은 箕聖東萊以後(기성동래이후)에 至于馬韓(지우마한)하여 始得韓姓(시득한성)하고 數十代(수십대)에 至(지)하여 諱蘭(휘란)하신분이 始居淸州(시거청주)하심으 로 貫于淸州(관우청주)하니 韓氏之始祖(한씨지시조)라. 公(공)께서 佐高麗太祖(좌고려태조)하여 三韓統合壁上功臣三重大匡門下太尉(삼한통합벽상공신삼중대광문하태위) 諡威襄(시위양)이라.高麗朝(고려조)의 重臣(중신)으로 크게 榮達(영달)하여 文武將相(문무장상)과 名公巨卿(명공거경)이 續出(속출)하여 麗朝五百年間(려조오백년간)의 始終(시종)을 같이 하였으며 入朝鮮(입조선)하여서는 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개국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 議政府領議政(의정부영의정) 西原府院君(서원부원군) 諡文簡諱尙敬(시문간휘상경)을 爲始(위시)하여 王妣相臣忠節功臣(왕비상신충절공신) 이 益益輩出(익익배출)되어 名門巨族(명문거족)으로서의 名實相扶(명실상부)함이 世人(세인)이 周知(주지)하는 바이다. 公(공)의 三孫(삼손)이신 諱繼禧(휘계희)는 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議政府左贊成(의정부좌찬성) 西平君(서평군)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諡文靖公(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시문정공)이요.文靖公(문정공)의 三子諱士信(삼자휘사신)은 通訓大夫宣略司猛三登縣令(통훈대부선략사맹삼등현령)贈通禮院左通禮(증통례원좌통례)이시다.

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는 至今(지금)으로부터 百有十餘年前(백유십여년전) 甲戌(갑술)에 初刊(초간)되었다.其間(기간) 再刊(재간)을 謨議(모의)하였으나 六十餘年前(육십여년전) 庚申(경신)에 文靖公派譜(문정공파보)가 初刊되었고 이어 甲子大譜(갑자대보)가 編刊(편간)되었으며 十與年前(십여년전) 丁巳(정사)에 文靖公派譜(문정공파보)가 再刊(재간)됨으로 有意未遂(유의미수)한 바이다.今番 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를 再刊(재간)키로 한 動機(동기)는 其間(기간) 各譜(각보)에 漏脫(루탈)된 子孫(자손)도 編合(편합)하는 同時(동시)에 墓誌碑文及遺事(묘지비문급유사)가 純漢文(순한문)으로 되어서 現代人(현대인)으로는 見而不知(견이부지)라. 然故(연고)로 內容(내용)을 後孫(후손)에게 周知(주지)시키기 爲(위)하여 原文(원문)은 勿論(물론)이고 國漢文(국한문)으로 適當(적당)히 解錫(해석) 又(또)는 懸吐(현토)하여 習得(습득)시키기 위함을 目的(목적)으로 한것이다. 

僉宗(첨종)에게 付託(부탁)하고자 함은 碑文及遺事(비문급유사)를 習讀(습독)하면 先祖(선조)의 來歷(내력)을 알게 되고 自己根源(자기근원)을 正確(정확)히 앎으로 因(인)하여 爲先之誠(위선지성)이 倍加(배가) 될줄 믿는 바이다. 끝으로 會長(회장) 晳鎬甫(석호보)를 爲始(위시)하여 譜務(보무)에 專力(전력)하신 宗員(종원)들의 勞苦(노고)에 深甚(심심)한 謝意(사의)를 드리는 바이다.

 

檀紀四三一九年(서기1986) 丙寅 九月 日 

 

三登公 十七代 宗孫 萬鳳 謹跋

 

三登公派 丙寅世譜 跋(2) 서문목록보기


三韓甲族(삼한갑족)의 名門巨族(명문거족)으로 自他(자타)가 共認(공인)하는 우리韓門(한문)은 全國(전국) 數(수)많은 著姓中(저성중)에서 어느姓氏(성씨)보다도 그 淵源(연원)이 悠久(유구)한 韓國(한국) 最高(최고)의 姓氏(성씨)이며 人口(인구)에 있어서도 單一本(단일본)으로는 가장 많은 數爻(수효)를 가지고 繁盛(번성)한 大姓(대성)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왔다.箕子文聖王(기자문성왕)께서 後朝鮮(후조선)을 創業(창업)하신 爾來(이래)로 馬韓末(마한말)까지 四十九世에 一千百餘年(1100여년)에 王位(왕위)를 繼承(계승)하면서 文化民族(문화민족)으로 領導(영도)한 王家(왕가)의 後裔(후예)이며 農耕社會(농경사회)를 開拓(개척)하였던 것이다. 馬韓八代(마한8대) 元王(원왕)께서 友平(우평),友諒(우량),友誠(우성)의 三兄弟(삼형제)를 두셨는데  이中(중) 友諒(우량)께서 韓(한)으로 得姓後(득성후)  數十世後(수십세후) 諱蘭(휘란)께서 上黨(상당) 卽(즉) 淸州(청주)에 居住(거주)함으로 해서 淸州韓氏(청주한씨)를 始源(시원)하게 되었다.  蘭(란)께서는 佐高麗建國(좌고려건국)하여 三重大匡壁上功臣(삼중대광벽상공신) 諡威襄(시위양)하시다. 後孫(후손)들이 크게 榮達(영달)하여 文武將相(문무장상)과 名功巨卿(명공거경)들이 續出(속출)하였으며 入朝鮮(입조선)하여서 益益昌大(익익창대)하여 王妃六后(왕비6후)와 駙馬四尉(부마4위)며 相臣十二位(상신12위) 忠節功臣(충절공신) 孝子烈行等(효자열행등) 많은 偉人(위인)을 輩出(배출)하여 箕子朝鮮(기자조선)으로부터 三千餘年間(3000여년간)을 韓民族(한민족)의 支柱(지주)가 되어왔던 자랑스러운 族閥(족벌)을 形成(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名門巨族(명문거족)인 吾韓(오한)은 宗族(종족)의 團結(단결)을  鞏固(공고)히하고 活動(활동)을 더욱 活潑(활발)히 하여 宗族(종족)의 繁榮(번영)과 秩序(질서)를 維持(유지)하기 爲(위)한 必要性(필요성)에서 族譜(족보)가 編纂(편찬)된 것이다. 族譜(족보)는 宗族(종족)의 歷史(역사)이며 血統(혈통)을 實証(실증)하는 文獻(문헌)이다.卽(즉)自身(자신)이 由來(유래)한 血統(혈통)을 保存(보존)하고 同族(동족)의 宗支(종지)와 序列(서열)을 體係的(체계적)으로 整理(정리)하였으며 祖上任(조상님)들이 國家(국가)와 社會(사회)를 爲(위)하여 남기신 業績(업적)을 收錄(수록)한 文獻(문헌)인 것이다.吾韓(오한)의 族譜(족보)는 各個人(각개인)이 所藏(소장)하고있던 筆寫本(필사본)을 根據(근거)로 하여 光海朝(광해조) 丁巳(정사)에 石灘公(석탄공) 諱孝仲(휘효중)께서 木板本(목판본)으로 刊行(간행)된 後(후) 甲申(갑신) 戊辰(무진) 己酉譜(기유보)等 累次(누차) 刊行(간행)되었고 그후 庚申(경신서기1920년)에 別刊于(별간우) 文靖公派譜(문정공파보) 初刊(초간)이 있엇고 西紀一九二四年 甲子(서기1924년갑자)에도 大同譜(대동보)가 刊行(간행)되었다.其後(기후) 文簡公派譜(문간공파보)와 丁巳(정사)에 文靖公派譜(문정공파보) 再刊(재간)이있다.

우리 三登公派宗門(삼등공파종문)으로서는 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가 修譜(수보)된지百有十餘年(백유십여년)이 되어서 文靖公庚申丁巳兩譜時(문정공경신정사양보시)에 連絡未備(연락미비)로 漏譜(누보)된 宗族(종족)이 많아 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를 刊行(간행)하게 되었다. 三登公(삼등공)의 曾孫(증손)되시는 參議公諱祿字(참의공휘록자)의 後孫(후손)이 모두 漏譜(누보)되었고 其外(기외)도 적지 않게 漏譜(누보)되었으며 誤記(오기)된 部分(부분)이 많아 뜻잇는 宗親(종친)들께서 乙丑(을축 서기1985년)十月五日 栗里(율리)에서 開催(개최)된 總會(총회)에서 一生(일생)을 宗事(종사)에 獻身(헌신)하셨고 우리 宗人(종인)의 全國各地(전국각지)에 散在分布(산재분포) 되어있는 狀況(상황)을 詳細(상세)하게 알고 게시는 宗叔晳鎬氏(종숙석호씨) 生存時(생존시)에 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를 再刊(재간)하여 우리宗門(종문)의 體系秩序(체계질서)를 바로 하자는 題議(제의)가 있어 滿場一致(만장일치)로 合意(합의)를 보았으며 參議公派宗中(참의공파종중)에서는 巨額(거액)을 獻誠協助(헌성협조)하여 주겠다는 約束(약속)을 받고 派譜(파보)를 再刊(재간)케되니 祖上(조상)의 靈(영)에 上達(상달)되여 우리 宗親(종친)과 血統(혈통)이 더욱 繁昌(번창)하고 發展(발전)됨을 祖上(조상)의 蔭德(음덕)을 期待(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 後孫(후손)들은 三韓甲族(삼한갑족)의 名門巨族(명문거족)임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最善(최선)을 다하여 國家(국가)와 社會(사회)에 棟樑(동량)이 되어 奉先裕後(봉선유후)의 活力(활력)이 再創造(재창조)되기를 비는 바이다. 끝으로 修譜(수보) 에盡力(진력)하신 會長任(회장님) 그리고 任員(임원) 여러분의 勞苦(노고)에 깊이 感謝(감사)를 드림니다.       

 

檀紀四三一九年(서기1986)丙寅 秋 

 

三登公十四代孫 禮東(예동) 謹跋

 

三登公派 丙寅世譜 跋(3)서문목록보기

 

悠久(유구)한 歷史(역사)속 이땅에 뿌리내린 數(수)많은 氏族中(씨족중)에서 우리 韓氏(한씨)는 我邦(아방)의 王族後裔(왕족후예)로 三韓甲族 名門巨族(삼한갑족 명문거족)으로 三千里江土(삼천리강토)를 支配(지배)하였고 支導(지도)하시어 우리 國家(국가)와 民族(민족)을 爲하여 燦爛(찬란)한 文化(문화)와 業績(업적)과 功勳(공훈)을 많이 남기신 偉大(위대)하시고 훌륭하신 祖上(조상)님들 이시다. 한 나라에는 그 나라의 國史(국사)가 있고 한 氏族(씨족)에는 그 家門(가문)의 譜系(보계)가 있으니 이 族譜(족보)는 곧 家族(가족)의 血緣系統(혈연계통)과 함께 그 發展過程(발전과정)을 記錄(기록)하여  過去(과거) 祖上(조상)님들의 行績(행적)을 살피고 現在(현재) 自己의 生存有來(생존유래)와 未來(미래)를 밝혀주는 家門(가문)의 寶典(보전)으로 自身(자신)들의 根本(근본)을 唯一無二(유일무이)하게 敎知(교지)하여 주는 것이 族譜(족보)의 큰 意義(의의)인 것이다.그러기에 우리 先祖(선조)님들은 崇祖愛族(숭조애족)과 護孫繼承精神(호손계승정신)으로 萬代(만대) 累孫(누손)에게 傳(전)하는 族譜發刊(족보발간)에 努力(노력)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韓氏가 三韓甲族(삼한갑족)이니 名門巨族(명문거족)의 子孫(자손)이니 해봤댔자 나 自身(자신)이 그만한 血統(혈통)을 이어갈 資質(자질)과 能力(능력)과 力量(역량)才能(재능)이 없는 바에야 祖上(조상)을 내세워 자랑해본들 그것이 무슨 所用(소용)이 있으리요.祖上의 歷史(역사)를 探知(탐지)하는 誠意(성의)는 祖上을 崇拜(숭배)하고 後孫(후손)을 指導(지도)하는 報本(보본)이온대 近世에 우리 國土가 南北으로分斷(분단)되고 西洋文化(서양문화)가 無分別(무분별)하게 擴散(확산)되고  6.25動亂(동란)과 人口의 急增等(급증등) 社會(사회)가 變遷(변천)됨에 따라 美風良俗(미풍양속)과 倫理觀(윤리관)이 退潮(퇴조)되어 우리의 傳統的(전통적)인 大家族制度(대가족제도)는 小單位(소단위) 核家族(핵가족)으로 分裂(분열)되고 産業發展(산업발전) 過程(과정)에서 구조적으로 分業化(분업화) 形態(형태)로 바뀌게 됨에 따라 道義心(도의심)과 人情(인정)이 각박해져 가는 現實下(현실하)에 始祖以下(시조이하) 數十分派(수십분파) 子孫(자손) 六十與萬(육십여만)의 大同宗族中(대동종족중)에는 傍祖(방조)의 歷史(역사)는 勿論(물론)이요 自己所祖歷史(자기소ㅇ조역사)도 모르는자 不小(불소)하여 同宗間(동종간)의 情誼(정의)도 自然中(자연중) 稀薄(희박)해져 가고 있으니 同宗親族 血緣間(동종친족혈연간)의 親和 愛情心(친화애정심)을 나눌 수 있는 받침대의 基本(기본)이 되는 것은 오로지 唯一(유일)한 族譜(족보)뿐이라고 生覺(생각)됩니다. 족보를 探知(탐지)해 보면 燦爛(찬란)한 業績(업적)과 遺蹟(유적)과 功勳(공훈)을 남기신 조상님들이 數(수)없이 많으니 우리 先祖님들은 참으로 훌륭하셨으며 偉大(위대)하셨다. 그 高貴(고귀)하신 忠(충)의 정신, 나라를 爲(위)하신 一片丹心(일편단심), 많은 才能(재능)과 知德(지덕) 松竹(송죽)같은 굳은 節槪(절개) 참으로 壯(장)하셨으며 偉大(위대)하셨습니다.

  銘心(명심)할지어다. 後孫(후손)들이어. 모두 矜持(긍지)를 가질지어다. 其間(기간) 우리 韓氏族譜가 數次(수차) 發刊(발간)되었고 特(특)히 113年前 甲戌(갑술) 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와 十年前 丁巳(정사) 文靖公派譜(문정공파보)가 發刊되었으나 時代(시대)의 變遷(변천)과 더불어 血統根源(혈통근원)찾기 思想(사상)이 高潮(고조)되어 族譜所藏(족보소장)을 渴望(갈망)하는자 많은 此際(차제)에 譜學(보학)에 博識(박식)하신 晳鎬(석호) 門長께서 三登公派譜 (삼등공파보) 重刊編纂事業(중간편찬사업)을 相議協助要請(상의협조요청)하여 不敏(불민)하고 淺學(천학)한 宗末不肖(종말불초)가 조상의 遺德(유덕)을 欽慕(흠모)하고 족보를 探究(탐구)하는 心情(심정)으로 敢(감)히 今番(금번) 族譜編纂事業(족보편찬사업)에 參與(참여)하였으며 今番(금번) 重刊(중간)하는 族譜編纂(족보편찬)에 力点事項(역점사항)은 漏落(누락)된 同宗(동종)을 索出(색출) 登載(등재)하여 一族(일족)간의 融和敦睦(융화돈목)하고 純 漢文族譜(순한문족보)를 한글과 漢文(한문) 倂用(병용)으로 記載(기재)하고 年號(연호)와 其他(기타) 未洽部分(미흡부분)을 現時代(현시대) 感覺(감각)에 맞추어 누구든지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記述(기술)하고자 留念(유념)하고 努力(노력)하였으니 僉宗諸位(첨종제위)께서는 後孫(후손)에게 田宅(전택)을 물려주지 못할지언정 영광된 나의 조상의 뿌리를 올바르게 찾아서 물려주는 것이 값진 遺産(유산)이 될 것이며 이는 곧 禮儀東邦人(예의동방인)의 道理(도리)인 동시에 자손된 의무일 것입니다. 금번 重刊(중간)되는 丙寅(병인)三登公派譜(삼등공파보)가 우리 同宗(동종)에게 널리 閱覽(열람)되어 先代(선대)를 올바르게 認識(인식)하고 自我再發見(자아재발견)의 열쇠가 되어 우리들의 혈관속에 脈(맥)이 鼓動(고동)치는 韓氏 氣質(한씨기질)을 子孫萬代(자손만대)에 綱倫(강륜)의 定立(정립)과 進路(진로)를 일깨워주는 유일하고 貴重(귀중)한 寶鑑(보감)이 될것을 믿는 바입니다.

끝으로 이번 族譜重刊(족보중간)에 있어 總責(총책)을 맡으신 都總務(도총무)님과 各委員(각위원) 諸位(제위)와 地方門中(지방문중) 收單委員(수단위원) 여러분의 노고에 대하여 深甚(심심)한 謝意(사의)를 表(표)하며 各門中 子孫萬代(자손만대)의 繁榮(번영)과 無窮(무궁)한 發展(발전)을 祈願(기원)합니다.

 

西紀一九八六年丙寅 

 

三登公二十代孫 澤圭 謹跋(근발)

 

三登公派 丙寅世譜 跋(4)서문목록보기

 

대저 譜牒(보첩)은 곧 家史(가사)라 稱(칭)하고 家史(가사)는 곧 一門(일문)의 歷史(역사)로 系統(계통)을 列記(열기)한 것이다. 이에 崇祖敦族(숭조돈족)과 修譜趣旨等(수보취지등)은 舊譜序文(구보서문)에 詳細(상세)히 羅列(나열)된 바 있어 重言(중언)을 要(요)치 않으나 다만 世次(세차)와 昭穆(소목)이 差誤(차오)없이 公正(공정)을 期(기)해서 丁巳始譜(정사시보)로부터 五校甲子譜(오교갑자보)에 이르기까지 編纂(편찬)하였고 그간 文簡公世譜(문간공세보) 또는 文靖公派譜再刊(문정공파보재간)과 三登公族譜等(삼등공족보등) 累次(누차) 刊行한 바 있거니와 世代(세대)가 멀어지고 族派(족파)가 蕃衍(번연)하여 四海(사해)에 散在(산재)하고 또는 隱遯幽居(은둔유거)하여 相互間(상호간) 連結(연결)이 不可能(불가능)한 世態(세태)에서 合編(합편)치못한 事例가 間或(간혹) 不無(불무)함을 勘案(감안)하였을 때 漏脫(누탈) 또는 失系(실계)가 發生(발생)함은 당연한 일이라 思料(사료)된다. 然(연)이나 勢也(세야)라 奈何(내하)리요 만은 如斯(여사)한 差異(차이)가 있으면 이를 是正(시정)함도 당연하다는 意圖(의도)로서 우리 三登公派孫(삼등공파손)들만이라도 우선 率先(솔선)하여 事必歸正(사필귀정)을 希求(희구)하는 心情(심정)에서 삼등공종친회장등 多數宗人(다수종인)의 發議(발의)가 있어 서울 금호동2가 850-5 韓允東(한윤동)宅에 編輯所(편집소)를 두고 삼등공족보를 再編(재편)함에 즈음하여 都有司(도유사) 韓晳鎬甫(한석호보)를 중심으로 眞(진안)을 구별하고 垂後慕先(수후모선)하는 뜻을 후세에 傳(전)하려 합니다. 於噫(어희)라. 本旨(본지)를 在南(재남) 京鄕諸族(경향제족)이 一心團合(일심단합)하여 無漏修單(무루수단)하였으니 大義(대의)를 發端(발단)한 것은 참으로 다행할뿐 아니라 根源(근원)을 다함께 糾合(규합)하여 世次(세차)나 昭穆(소목)을 더욱 밝히고 路上視人(로상시인)을 免(면)하게 되었으니 豈不壯哉(개불장재)아. 오직 譜役(보역)에 참여하신 諸宗(제종)과 특히 譜務(보무)에 專(전단)하신 禮東(예동),廣愚(광우),淳泰(순태)甫에게 寒暑(한서)를 겪으면서 단시일 내에 完成登梓(완성등재)토록 不撤晝夜(불철주야)하고 東奔西走(동분서주)하신 勞苦(노고)에 深甚(심심)한 謝意(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不肖(불초) 用國(용국)이 跋文(발문)의 請(청)을 받고 累辭不獲(누사불획)하여 拙文(졸문)과 短見(단견)으로 감히 本文(본문)을 題(제)하면서 以俟後人之辨(이사후인지변)하노라.

 

西紀1986年 丙寅 菊秋 

 

後孫 用國 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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