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bernation_back.gif 청주한씨 개요(槪要)

범례

한씨 득성론

이름 행렬표

성사

한씨의 연원

청주한씨 통례공파족보 약사

성원고

종훈

한씨의 본관

중요 향사 일람표

淸州(청주)의 沿革(연혁)

 

 

 

 

 

 

 

 

 

 

범례 top

1.이 사이트는 문정공의 제3자 삼등공의 셋째 아드님이신 16세 통례공 휘상의 자손들을 위해 통례공종중의 소식과 족보를 볼 수 있도록 꾸민 홈페이지입니다.

 2.이 사이트의 족보는 1977년판 문정공정사파보와 1986년 삼등공파 병인세보, 6교보 및 6교중수보의 내용을 수록하였습니다.

 3.시조 위양공으로부터 15세 삼등공까지는 상세에 수록하고 16세 통례공이하는 하세에 수록하였습니다.

 4.과거 한자로만 기록하였던 것을 새로운 세대들이 볼 수 있도록 한글을 병기하였습니다.

 5.과거 단기연호와 중국왕조의 연호,육십갑자등으로 기록되어 연대를 알기 어려운 점을 가능한 범위내에서 현재 사용중인 서력기원으로 환산하여 시기를 인식하기 쉽도록하였고

 6.계보도는 7단횡간으로 하고 개인의 신상에 대한 상세정보는 이름을 클릭하면 나타나도록하여 계보도가 압축되도록 하여 친족간의 관계를 좀더  쉽게 알도록 하였으며

 7. 자녀의 기록순서를  편의상 아들은 좌측 딸은 우측에 기록하였고 출가자(입양)와 딸은 이름의 글자색을 청색으로 처리하여 구분하였습니다

                 2002.  6.   30.

 行列字 表示(행렬자 표시) top

5교 갑자보의 항렬자

대개 이름을 지을 때에 한자를 그 항렬(行列)의 같은 자와 함께 쓰는 것은 친소를 밝히고 세대의 차례를 분명하게 하여 일가간의 돈목하는 기풍을 세우려는 때문이다. 그 뜻을 생각해 볼 때 진실로 가벼이 할 수 없는 바가 있다.
후세에 내려오면서 점점 번성하여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살게되니 만약 원래부터 강정(講定)해 놓은 것이 없다가 갑자기 주장을 하게되면 연락이 되지 않는이도 있을 것이고 또 글자의 막힘과 지장(支障)이 있어서 억지로 같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몇 대가 지나면 그 "합쳐짐과 나누어짐"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드디어 파가 나뉘고 호구가 갈라져 남남과 다름없게 된다면 아마도 근본을 돈독히 하고 수족(收族)하는 좋은 법도가 아닐 것이다.
어찌 미리 강정(講定)하여 혼란하지 않게 준비하지 않을 것인가.
이리하여 종중회의에서 여러사람이 동의하여 우선 합당한 행제()차 10개를 골라 35세부터 44세까지 차례대로 기록하여 우리 여러종인이 영구히 따르고 위반하지 않도록하고자 함이다.

自始祖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行列字

○大

○元

○玉

○憲

○五

○立

○世

○善

○九

○升

위의 항렬자는 1924년 발간된 5교 갑자대동보에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문정공파의 항렬자

문정공파 경신파보(1920)시 정한 항렬자

自始祖

32세

33

34

35

36

37

38

39

40

41

行列字

萬○

○九

丙○

○寧

成○

○熙

庚○

○宰

廷○

○揆

문정공파 정사파보(1977)시 정한 항렬자

自始祖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行列字

承○

○敏

寅○

○卿

振○

○起

南○

○秉

重○

○白

盛○

○炫

※위의 문정공파보에서 정한 항렬자가 중앙종친회와 상이한 것은 운영자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함으로 그내용만을 기록한 것입니다.

각파 현행 행열자 대조표

※아래는 지금까지 각 파에서 사용해온 행렬자를 대략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문중에 따라서는 다른 행렬자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문정공파

○會

百○

○澤

○寧

成○

○熙

庚○

○宰

廷○

○揆

 

○源

○愚

基○

萬○

○九

丙○

 

 

 

 

 

 

 

 

 

 

 

 

 

 

 

 

 

 

 

 

 

 

善○

○永

相○

 

 

 

 

 

 

 


충간공파

 

 

 

 

 

 

 

 

 

 

 

 

 

 

 

 

 

 

 

 

 

 

 

 

양절공파

 

 

 

 

 

 

 

청주한씨의 연원(淸州韓氏 淵源) top

  상당한씨(上黨韓氏 : 淸州의 옛이름이 上黨이었음)는 마한 원왕(元王)의 아들 諱 우량(友諒)이 나라가 멸망하자 신라로  망명하여 탈해왕 (脫解王)에 벼슬하면서(仕事)부터 상당한씨(上黨韓氏)라 칭하니 우리나라의 韓氏로 득성(得姓)하게된 기원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그 종원(宗源)이 기자(箕子)로부터 유래하였으므로, 韓氏는 기자의 후예(後裔)가 되는 것이다.
  기자는 상(商=은)나라의 종실(宗室)로써 주(紂)왕의 숙부(叔父)가 된다. 주가 잔인하고 포악하여 국정이 쇠퇴함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이를 토멸(討滅)한 후에 기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길(방법)을 청하여 물으니 기자는 홍범(洪範)을 해설하여 전수(傳授)하고 의리상 그의 신복(臣僕 : 믿음직한 신하)이 될 수는 없다 하여 동으로 조선에 망명하였다. 때마침 조선은 단군조선이 1200여년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므로 기자-그뒤를 이어 후조선(한씨조선)을 창건하시어 예의로 교화하고 생업을 계도(啓導)하여 3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의군자국(禮義君子國)으로 지칭받고 우리가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이 강역을 지켜온 국기(國基)를 열어주신 대성군(大聖君)이시니 이 사적은 비단 동국사서(東國史書)에만 기전(記傳)되어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사책 위략(魏略) 위지(魏志)등에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고금의 박식군자(博識君子)들의 한씨사(韓氏史)에서 세덕(世德)은 기성이래(箕聖以來)로 유구(悠久)수천년에 면면익진(綿綿益振)함이 타성중에서 그 유례를 볼 수가 없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는 터이다.
 이와같이  기자이후부터 마한 원왕(元王)까지는 역사책의 명문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고신(考信) 할수 있으나 원왕의 아들 諱 우량(友諒)이 신라에 망명한 이후부터 태위공(太尉公) 이전까지의 계파나 소목(昭穆)이 자세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삼한시대까지는 아직 태고시절 (太古時節)이어서 인문(人文)이 미비하였던 관계도 있고, 또 50세를 이어온 왕손으로서 망국의 한을 품은 망명생활에서 명리(名利)를 은피(隱避)하여 온 연유도 있으리라고 본다.
  본보(本譜)에는 구보에 의거하여 기자의 세계와 사적 그리고 학자들의 기술한 문헌등을 찾아 등재하고 마한 원왕자부터 태위공까지의 계보는 사서에 유루(遺漏)되었으나 강원도 동종가문과 관서족인의 가문에 가장으로 전래한 계보가 양자 부합된다하여 구보에 수록되었기 이를 전재하여 후인들의 탐구와 보완에 기여코자 한다 

  성원고(姓源考)   top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기자후 40여세에 이르러 준왕이 연(燕)나라에서 망명하여온 위만에게 나라를 공탈(攻奪)당하고 그 좌우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났다가 韓地(지금의 익산)에 정착하여 한왕이 되었더니 그후에 또 나라가 망하였으나 지금도 韓人이 그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고 한다.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기자의 후손중에 우평(友平)과 우량(友諒)과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은 북원(北原)에 돌아가서 선우(鮮于)씨라 칭하고 우량은 그대로 마한구제(馬韓舊制)에 따라 상당한씨(上黨韓氏)라 칭하고 우성은 평강(平江)으로 돌아가서 덕양기씨(德陽奇氏)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기자외사(箕子外史)에 이르되 조선태조(朝鮮太祖) 문성왕(文聖王)의 성은 子氏요. 이름(諱)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라 하니 주(紂=은나라의 마지막 왕)의 숙부이다.식읍을 기(箕)땅에 봉(封)하였으므로 기자(箕子)라 칭한다.
기묘년(BC1122)에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토멸하니 기자는 홍범(洪範=우왕이 요순이래의 정치 대법을 집대성한 9가지의 법칙)을 전하여주고 동으로 조선에 들어갔으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朝鮮候)로 봉하였으나 기자는 신하로서 무왕을 섬기지는 않았다.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재위 40년에 훙(薨)하시고 2세 장혜왕(莊惠王)이하 계승하여 왕통을 전하여 오다가 애왕(哀王)준(準)에 이르러 연인(燕人)위만(衛滿)에게 쫓기어 좌우궁인(左右宮人)만을 데리고 바다에 떠서 남으로 금마군(金馬郡; 현재의 익산)에 와서 건국(建國)하니 이것이 즉 마한(馬韓)이다.
마한은 학왕(學王)에 이르러 백제에게 멸망되고 원산(圓山),금현(錦峴) 두 성만 보전(保全)하고 있다가 백제온조왕27년(己巳=AD9)에 두성도 백제에 투항하니 기자 이하 왕통이 50세요.역년(歷年)이 1131년이다.
마한(馬韓)말 원왕(元王)의 아들 셋이 있으니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다. 나라가 망하니 友平은 고구려에 가서 유리왕조(琉璃王朝)에 벼슬하면서 북원(北原) 선우(鮮于)씨가 되었고,友諒은 신라에 가서 탈해왕(脫解王)조에 벼슬하면서 상당(上黨=淸州) 韓氏가 되어 淸州로 본관을 삼았고 友誠은 백제로 가서 온조왕 (溫朝王)조에 벼슬하면서 덕양(德陽) 기(奇)氏가 되어 행주(幸州)로 본관을 삼았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이르되 우리나라에서 명문으로 역사에 저명(著名)된 자가 여기저기 적지 않지만 혹 일시 번성하다가도 바로 쇄퇴하거나 중도에 꺽겨서 부흥하지 못하거늘 세세 끊임없이 혁혁한 업적을 이어오면서 오래갈수록 더욱 창성한 가문은 바로 淸州韓氏가 제일이라고 극찬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이르되 한씨는 상당(上黨=淸州)에서 계출(系出)하였다. 태위공(太尉公) 란(蘭)이 고려 태조를 보필하여 삼한을 통합하고 개국공신의 호를 받음으로서 자손이 번성하여 700여년동안 공후(公候) 장상(將相) 문학무공(文學武攻)이 배출되기 13대를 연면계속하니 명문귀족을 차례로 따저보아도 이보다 앞선 집이 별로 없으리라고 하였으며 미수(眉
) 허목(許穆)은이르되 "한씨는 상당인이니 상당한씨는 기자로부터 계출하였다. 기자왕조가 쇄퇴하여 마한이 되었더니 그자손이 상당에 거주하였으므로 상당한씨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韓氏의 本貫   top

 시조(始祖) 태위공=위양공(太尉公= 威襄公) 諱 란(蘭))께서 청주(淸州) 방정리(方井里)에 살으셨으므로, 그 후 자손들이 마침내 청주로 본관(本貫)을 삼으니 상당(上黨) 또는 서원(西原)이라 칭하는 것은 청주의 옛 이름인 때문이다. 선대로부터 韓氏는 단일본(單一本)이었다고 전하여 왔는데 근세에 이르러서

 1. 예빈윤(禮賓尹) 연(漣)을 중시조로하는 안변한씨(安邊韓氏)
 2. 평산백(平山伯) 후저(候抵)를 중시조로하는 평산한씨(平山韓氏)
 3. 평장사(平章事)자희(自熹)를 중시조로하는 목천한씨(沔川韓氏)
 4. 시랑(侍郞) 언공(彦恭)을 중시조로하는 장단한씨(長湍韓氏) 
 5. 통사랑(通仕郞)근(瑾)을 중시조로하는 당진한씨(唐津韓氏) 
 6. 첨사(詹事) 원서(元
)를 중시조로하는 한양한씨(漢陽韓氏)
 7. 중찬(中贊)희유(希愈)를 중시조로하는 가주한씨(嘉州韓氏)  
 8.
평장사(平長事)예(銳)를 중시조로하는 곡산한씨(谷山韓氏)

 이상의 8파가 본관을 달리했던 韓門으로써 특히 크고 현저한 문중이요, 기타 부안, 양주, 금계, 교하, 신평等의 본관을 달리했었던 문중도 있다.그러나 戊辰譜(1748 영조24년 제3교대동보)에 평산(平山)목천(沔川) 두 계파는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합보(合譜)가 되었고 안변한씨는 그 문중 신사사보에 역시 청주를 본관으로 수보하였다.이런 점으로 추상하건대 본관이 다른 한씨라도 모두 청주 후예(後裔)로서 문중에 계보를 잃어 버리고 봉작 받은 군읍이나 거주(居住)하는 곳을 각기 본관으로 한 것이요,혹시 세대나 서열이 높고 청주가 본관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성원(姓原)을 소급하여 따진다면 역시 마한에서 계출(系出)되었을 것이므로 韓氏가 한 본이라 함은 이와 같은 연유(緣由)인가 한다.

다만 곡산 한씨의 시조 평장사(平長事) 한예(韓銳)는 중국 송나라 팔학사의 한사람으로 고려 희종2년(1206 丙寅)에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로 곡산부원군에 봉해졌다고하며 그뿌리가 다르다 하여 합본하지 않았다.

 

 淸州(청주)의 沿革(연혁)   top

 청주는 본래 백제 상당현(上黨縣)이니 일명 낭비성(娘臂城)이라고 하며,혹은 낭자곡(娘子谷) 또는 낭성(娘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더니 경덕왕(景德王)이 격을 높여 西原京이라 하였다.고려 태조가 지금의 이름 청주로 개칭하였는데 성종이 목사를 배치하였다가 이어서 절도사를 배치하고 전절군(全節軍)이라 호칭하였다.조선조에 와서 세종이 관찰사를 배치하고 목사를 겸무케 하였으나 얼마가지 않아 폐지 되었다. 고려 태조는 청주의 토지가 비옥하고 인물과 호걸이 많다고도 하였다.(동국여지승람록) 현재는 청주군을 분할하여 중심부는 청주시가 되고 둘레의 각 면은 청원군이 되니 시조(蘭)의 유기(遺基)와 묘소(墓所)는 청원군에 있다.

 

  韓氏得姓論 top

  韓氏가 득성한 확실한 년대에 대하여는 시대가 오래되어 문헌(文獻)이 많지 않아 자세하지 않으나 현재 전하는 문헌에 의하면 위략(魏略)에는 "조선의 후가 금마군으로 패주하여 국호를 한이라하고 기자의 자손의 나라라함으로 인하여 한씨라 하였다.(朝鮮候奔金馬郡 國號韓箕子親留在國者 因冒韓姓)"라고 하였고 동사(東史)에 "마한이 망한뒤 원왕자 량이 신라로 가서 탈해왕조에 벼슬을 하며 한씨라 칭하였다 (馬韓之凶也 元王子諒 奔新羅 仕於脫解王爲韓氏)"라고하였으며 위지(魏志)에는 "기자의 후예에 우평, 우성, 우량이 있으니 우평은 선우씨의 성을 습성하여 북원으로 가고, 우성은 평강으로 가 덕양기씨가 되고 우량은 마한에 남아 상당한씨가 되었다.(箕子子姓後有 曰友平 曰友誠 曰友諒 而友平仍襲鮮于氏歸北原 友城歸平江仍爲德陽奇氏 友諒襲馬韓仍爲上當韓氏)"라 하였으니, 위략(魏略)에 의하면 韓氏 득성이 마한 초기 이전이라고 하고, 동사(東史)나 위지(魏志)에 의하면 마한말에 이루어 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종합하여 본다면 韓氏 창씨는 마한 이전에 있었으며 마한 말기 원왕자 우량은 韓氏를 습성한 것이라 보여진다.  소위 기자조선의 성이 韓氏라는데 "후한왕부(後韓王府)"의 잠부론(潛夫論) 제9권중에 "韓西(東의 誤)亦姓韓爲衛滿伐還 運居海中 南朝鮮"이란 것에 있다.  이는 후일 위만에 쫓겨 남하한 애왕(哀王=箕子朝鮮의 마지막 王)의 성이 韓氏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니 이 왕실이 어느 때부터 韓氏로 창씨하였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하였든 준왕(準王) 이전에 이미 그렇게 득성하였던 것은 위의 문면에서 알 수 있다.  위략(魏略)에는 위만에게 억류된 준왕자(準王子) 및 그 친족이 韓이라 잉성(仍姓)하였다 한다.

이는 그동안 우리씨족사에서 마한 원왕의 제3자 諱우량이 한씨 득성의 기원으로 기록하고 있는 바와 상반되니 앞으로 이에 대한 고증도 하여야 할 것이다.

    姓史(성사)   top

  무릇 우리 한씨가 韓氏로 된 것은 중엽에 비롯된 것이라.그 근원을 더듬은즉 황제(黃帝)씨로부터 나온 것이라 황제(黃帝)씨는 그 성을 공손(公孫)으로도 하고 희(姬)로도 했으니 중간에 사성한 것 같도다
제곡(
)성이 희(姬)씨인즉 이것으로 인해서 후세에 전한 것이라 그뒤18世를 계승했으며 성탕(成湯)에 이르러 자(子)씨로 姓을한즉 그사이 33세동안은 姬성이 몇대이고 子성이 몇대인지 알 수 없도다.
기자(箕子)로부터 애왕(哀王)諱 준(準)에 이르기 41세왕이나 되며 위차(位次)와 년대(年代)는 있으나 대수는 알지 못하니 41대로 증명할 수 없으니 문득 어찌 씨족과 분파를 기록해 말할까.
애왕(哀王)으로부터 마한(馬韓)에 옮겨와서 강왕(康王)으로 시작해서 원왕(元王)에 이르기 7왕이나 되나 계승한 사적을 상고할 수가 없으니 그사이 무슨성씨로 전한지 알지못한지라. 
원왕(元王)왕자 諱 우량(友諒)으로부터
 처음으로 성을 韓氏로하고 청주로 관향(貫鄕)을 했으니 씨족과 나라를 뜻한 것이라 한씨가 왕자이후 고려가 건국한 918년(戊寅) 위양공(威襄公)녹훈한때 까지 992년동안 세대가 전함이 없는지라 동국에 풍속이 저속해서 정해온 기록을 익히지 않은 때문이라.
위양공(威襄公=시조)이하 직장공(直長公) 諱혁(
奕)이상은 성은 비록 전했으나 대수가 상세하지 못한고로 옛날에 수보할 때에 전자는 누락된 곳과 의심처가 있고 후자는 스스로 기만하는 책망을 받았으니 생각컨데 자손들이 보첩을 보관하지 못한 연고라.
직장공(
直長公=4세) 이하는 호구와 비문과 행장이 국사와 가첩에 밝게 되어 있는지라 무릇 후(候)와 王이 81대요.경,대부와 사,서인으로 내려온 것이 26대라
연대를 계산한즉
황제(黃帝)로부터 성탕(成湯)까지가 940년이고 기자(箕子)로부터 마한(馬韓)7왕까지가 1181년이고 원왕(元王)으로부터 시조까지가 992년이고 고려가 475년 조선조 초부터 이제 갑술(甲戌=1814)까지가 483년인즉 다 합하면 4803년이나 되는지라
그런즉 성을 전한 것이 4차(公孫又姬,子,箕,
韓)요.대수를 세어보니 100여세라.아! 거룩하도다.이로부터 많은 자손을 가히 다 기록할까.비록 불초한 내가 감히 전해온 내력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다만 예날 족보에 전후2설(누락과 自誣)을 어찌 분석을하고 고증을할까.시말을 기록해서 널리 상고해 보기를 바라노라.

 

 청주한씨 통례공파 족보의 약사   top

기 발간된 보책에 의하면 고려태조11년 무자년(928)에 시조이신 위양공께서 공을 세우시고 봉작을 받은이래 고려 고종16년 무자(1228)에 문혜공께서 탄생하시기 까지 300년이 흘렀으나 시조께서 봉작을 받으실 때의 연세가 마땅히 30-40세는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니 330-340년간에 대수가 7세까지 밖에 이어지지 않음은 중간에 계대가 실호된 것이라. 무진(1748)보에 이르기를 "고려조 500년간에 20여대가 되었을 터인데 우리 한씨는 시조로부터 문경공에 이르기까지 그대수가 11세밖에 전하지 않으니 이는 중간에 여러대가 이어지지 못한 것이라. 문혜공의 호적에 의하여 직장공으로부터 그계보가 밝혀지고 또 고려사에도 기록이 있어 고증할 근거가 있으니 위양공으로 부터 직장공 이전까지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시기는 건국초기로 사회가 안정되지 않았고 걸안과 여진등의 침공과 무신의난 이어서 몽고에 의한 병화가 전국에 미치니 사료와 기록이 온전히 남지 않아 소상하게 밝혀내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앞으로 선조들께서 못다한 부분이므로 숨겨진 사료를 찾아내어 복원할 수 있도록 우리 후손들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통례공파와 관련된 족보 발간의 궤적을 살펴보면 시조로부터 700여년이 지난 1617년에 이르러서야 석탄공 효중께서 각 집안마다 소규모로 전하던 가승보를 모아 전 씨족의 계보를 집대성하여 시간 정사보를 출간하였다. 당시 교통과 통신의 어려움, 고증을 하는 일등을 생각할 때 대단히 어려운 대역사였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1704년의 재교갑신보, 1748년의 3교무진보, 1796년에는 4교기유보를 발간하였다.
1814년에는 참판 긍인께서 주도하여 삼등공이하의 세보를 간행하였고, 1920년 문정공경신파보를 발간하였다.
공교롭게도 같은해 5교 경신보가 간행되었는데 우리 문정공파에서는 파보에 먼저 등록한 관계로 많은 일가가 5교에 수단을 하지 않아 누락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5교경신보가 일부내용이 문제가 있다하여 1924년에 갑자보를 다시 출간하였다. 경신보와 갑자보를 합하여 경.갑 통5교라 칭한다.
이후 5교발간 50여년만에 문정공파에서 파보발간을 추진 1977년 문정공정사파보를 간행하였으며 1986년에 정사파보에 누락된 일가들의 요구로 삼등공파 병인세보를 간행하였다.
1987년 중앙종친회주도하에 제6교 대동보를 시작하여 1993년 간행을 완료하였고 6교에 누락된 일가를 위해 1999년 6교중수보를 출간하였다.
과거에는 족보를 발간하는 것이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여 경제적인 부담이 매우 커 시간 정사보이후 지금까지 약 400년이 가깝게 시간이 지났으나 지난 6교 대동보까지 길게는 120여년만에 족보를 간행하는 경우도 발생하니 그 기록을 정확히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중앙종친회에서 제7교 전자족보를 제작 인터넷을 통하여 서비스되고 있으며 이족보가 그 역할을 다 하려면 일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많은 호응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전자족보는 실시간 등록이 가능하고 잘못된 내용은 수정 또한 수시로 할 수 있으므로, 과거 족보 간행시 연락이 되지 않아  누보되는 등의 폐단은 사라지게 되었다.

                                                 2007년    1월    30일             시조 32세손   亨 삼가씀

淸州韓氏宗訓   top

 

 

淸  州  韓  氏  宗  

 

 

 

 

 

 

 

 

 

 

 

 忠

 勤

 

忠과 孝 德과 禮로서 自己行動을 착하게 하고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恭遜한 마음과 儉素한 生活로서 家業을 일으켜 나가라.

始祖 神道碑文 中에서 後裔 銘心 不忘之訓則也

淸州韓氏 中央宗親會

 

上黨華族(상당화족)    상당땅 밝은정기 빛나는 씨족이요

錦川震源(금천진원)    금강물 맑은줄기 거룩한 근원이라

千派一本(천파일본)    천갈래 갈렸어도 근원은 하나이며

萬枝同根(만지동근)    만가지 뻗었어도 뿌리는 한가지라

忠孝之家(충효지가)    충성과 효도로서 이름난 집안이요

道義之門(도의지문)    도덕과 의리로서 번성한 문중이라

世守敦睦(세수돈목)    대대로 돈목스런 친목을 지켜오며

永乘後昆(영승후곤)    영원히 후손에게 전하여 가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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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名

향사일

행사 장소

적요

 

시조 태위공

10월 1일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산리 시조묘소

 

교위공 영

상동

상동 (4위 단소)

 

별장공 상휴

상동

상동 (4위 단소)

 

직장공 혁

상동

상동 (4위 단소)

 

상장군공 희유

상동

상동 (4위 단소)

 

예빈경공 광윤

3월  1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 신사동 추원재

 

문혜공 강

3월  2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모원재

 

제학공 사기

3월  3일

 광주직할시 광산구 서봉동 어등산 봉강재

 

사숙공 악

4월  5일(식목일)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사숙공 단소

 

평간공 공의

4월  5일(식목일)

 상동 평간공묘역

 

문경공 수

4월  5일(식목일)

 상동 문경공 묘역

 

문간공 상경

3월  7일(불천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배위 향사일 4월 17일 (불천위)

청산군 혜

10월 3일

상동 청산군 묘역

 

문정공 계희

10월 5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서평릉

 

 

삼등공파

삼등공 사신

10월 5일

상동

문정공 향사 후

옥천공 영

10월 5일

상동

삼등공 향사 후

도정공 석

10월 5일

상동

상동 

통례공 상

10월 5일

상동

상동

전랑공 경원

 

경남 함안군 법수면 윤내리 마태산

 

10월15일

충남 서산시 고북면 정자리 묘역

 

 

 

 

 

동래공 성원

10월 5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간절 동래공 묘역

통례공 향사 후

사과공 의

10월 5일

상동

상동 

유촌공 형길

10월 2일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

 

처사공 규

상동

상동

 

첨정공 기

상동

상동

 

만은공 은

10월10일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단석리 종주원

 

 

 

 

 

판서공 소

10월13일

경남 사천군 북면 구암리 강성곡 입우산

 

기세

13일후첫일요일

상동

 

중추공 인세

10월15일

경남 고성군 상리면 조산리 와곡

 

오세

상동

경남 통영시 도산면 원산리 사계촌

 

 

 

 

 

 상기 날자중 사숙공, 평간공, 문경공의 향사일은 식목일인 양력 4월 5일이고 그 외의 분들의 향사일은 음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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