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bernation_back.gif  기자(箕子)

     

 

 

 

 

 

 

 

箕子系譜(商以前) top

1세

黃帝(황제)

4세

(제곡)

7세

相土(상토)

10세

冥(명)

13세

報丁(보정)

16세

主壬(주임)

2세

(현효)

5세

契(계)

8세

昌若(창약)

11세

振(진)

14세

報乙(보을)

17세

主癸(주계)

3세

極(교극)

6세

昭明(소명)

9세

曹園(조원)

12세

微(미)

15세

執丙(집병)

18세

天乙(천을)

기자의 세계는 황제로부터시작되었다. 18세 천을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을 몰아내고 제위에 올라 은(상이라고도 함)을 건국하니 이가 곧 성탕이다

.箕子系譜(商王朝)  top

1세

성탕(成湯)

諱 리(履),號 천을(天乙) 字 탕(湯)

 

 

 

 

 

 

 

 

 

 

 

 

 

 

 

 

 

 

 

 

 

2세

태정(太丁)

 

 

 

 

 

 

 

 

 

 

외병(外丙)

중임(仲壬)

 

 

 

 

 

 

 

 

 

 

 

 

 

 

 

 

 

3세

태갑(太甲)

 

 

 

 

 

 

 

 

 

 

 

 

 

 

 

 

 

 

 

 

 

 

 

 

 

 

 

 

 

 

 

4세

옥정(沃丁)

태경(太庚)

 

 

 

 

 

 

 

 

 

 

 

 

 

 

 

 

 

 

 

 

 

 

 

 

 

 

 

 

 

5세

 

 

소갑(小甲)

옹기(雍己)

태무(太戊)

 

 

 

 

 

 

 

 

 

 

 

 

 

 

 

 

 

 

 

 

 

 

 

 

 

6세

 

 

 

 

 

 

중정(仲丁)

외임(外壬)

하단갑(河亶甲

 

 

 

 

 

 

 

 

 

 

 

 

 

 

 

 

 

 

 

 

 

 

 

 

 

 

 

 

 

 

 

 

 

 

 

 

 

7세

조을祖乙

 

 

 

 

 

 

 

 

 

 

 

 

 

 

 

 

 

 

 

 

 

 

 

 

 

 

 

 

 

 

8세

조신祖辛

 

 

 

 

 

 

옥갑沃甲

 

 

 

 

 

 

 

 

 

 

 

 

 

 

 

 

 

 

 

 

 

 

9세

조정祖丁

 

 

 

 

 

 

남경南庚

 

 

 

 

 

 

 

 

 

 

 

 

 

 

 

 

 

 

 

 

 

 

 

10세

양갑陽甲

반경盤庚

소신小辛

소을小乙

 

 

 

 

 

 

 

 

 

 

 

 

 

 

 

 

 

 

 

 

 

 

 

 

 

 

 

 

 

 

 

 

 

 

 

 

 

 

 

 

11세

무정武丁

 

 

 

 

 

 

 

 

 

 

 

 

 

 

 

 

 

 

 

 

 

 

 

 

 

 

 

 

 

 

 

12세

조경祖庚

조갑祖甲

 

 

 

 

 

 

 

 

 

 

 

 

 

 

 

 

 

 

 

 

 

 

 

 

 

 

 

13세

 

 

름신

경정庚丁

 

 

 

 

 

 

 

 

 

 

 

 

 

 

 

 

 

 

 

 

 

 

 

14세

 

 

 

 

무을武乙

 

 

 

 

 

 

 

 

 

 

 

 

 

 

 

 

 

 

 

 

 

 

 

 

 

15세

 

 

 

 

태정太丁

 

 

휘리諱理

 

 

 

 

 

 

 

 

 

 

 

 

 

 

 

 

 

 

 

16세

 

 

 

 

제을帝乙

 

 

기자箕子

 

 

 

 

 

 

 

 

 

諱 수유(須臾)또는 서여(胥餘) 誕于 제을 丙戌

17세

 

 

 

 

제신帝辛

 

 

주나라 무왕 己卯 동출 조선

 

 

 

 

 

名 수(受) 號 주(紂) 丁未卽位

 

 

 

 

 

 

 

 

 

 

 

 

 

 己卯 스스로 분사(焚死)함

 

 

 

 

 

 

 

 

    성탕으로부터 제신(紂)까지 17세에 29명의 제왕이 645년간왕조를유지함(自成湯 至帝辛 凡17世 29帝 享國645年)

기자조선계보(箕子朝鮮王位諱號世系) top

太祖

文聖大王
문성대왕
箕子

太祖文聖大王箕子姓子氏諱須臾又諱胥餘商帝武乙次子諱理子也誕降于帝乙十七祀丙戌五十四祀周武王己卯痛深革殷志堅罔僕逐東出朝鮮都平壤國號後朝鮮敎民八條變夷爲夏周成王戊午薨在位四十壽九十三墓平壤城北王荇山負子原俗稱兎山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BC1122~BC1082

태조 문성대왕 기자의 성은 자씨요, 이름은 수유 또는 서여 상나라 무을왕의 차남 휘리의 아들이다.제을17년병술에 탄생하여 54세되는 기묘년(BC1122)에 주무왕이 은을 토멸함에 동쪽으로 조선에 망명하여 도읍을 평양으로 정하고 후조선을 국호로 건국하여 교민8조로 백성을 교화하시다 재위 40년인 주성왕 무오년(BC1083)에 93세로 승하하셨다. 묘소는 평양성북 왕행산(토산)에 있다. 36세 가덕왕이 왕으로 추존하였다.

2世

莊惠王
장혜왕

諱松 周成王三十四年 己未立 在位二十五年諱中封於于 其子孫 在鮮在于者食 其二國 因姓鮮于

BC1082~BC1057

휘는 송, 주 성왕 34년 기미년(BC1082)에 즉위, 25년간 재위,자손중에 중봉이 선국과 우국에 식읍함으로 선우라는 성을 득하다.

3世

敬孝王
경효왕

諱詢 康王二十二年 甲申立 在位二十七年

BC1057~BC1030

휘는 순, 중국 강왕 22년(B.C 1,057)갑신에 즉위, 27년간 재위

4世

恭貞王
공정왕

諱佰 昭王二十三年 辛亥立 在位三十年

BC1030~BC1000

휘는 백, 중국 소왕 23년(B.C 1030)신해에 즉위, 30년간 재위

5世

文武王
문무왕

諱椿 穆王二年 辛巳立 在位二十八年

BC1000~BC972

휘는 춘, 중국 목왕 2년(B.C 1000)신사에 즉위, 28년간 재위

6世

太原王
태원왕

諱禮 穆王三十年 己酉立 在位4年

BC972~BC968

휘는 예, 중국 목왕 30년(B.C 972)기유에 즉위, 4년간 재위  

7世

景昌王
경창왕

諱莊 穆王三十五年 癸丑立 在位十年

BC968~BC957

휘는 장, 중국 목왕 35년(B.C 968)계축에 즉위, 10년간 재위 

8世

興平王
흥평왕

諱捉 穆王四十五年 甲子立 在位十四年

BC957~BC943

휘는착 중국 목왕 45년(B.C 957)甲子에 즉위 14年간재위

9世

哲威王
철위왕

諱調 共王四年 戊寅立 在位十八年

BC943~BC925

휘는 주, 중국 공왕 4년(B.C 943)무인에 즉위, 18년간 재위  

10世

 宣惠王
선혜왕

諱索 懿王十四年 丙申立 在位二十九年

BC925~BC896

휘는 색, 중국 의왕 14년(B.C 925)병신에 즉위, 29년간 재위 

11世

誼襄王
의양왕

諱師 孝王十四年 乙丑立 在位五十三年

BC896~BC843

휘는 사, 중국 효왕 14년(B.C 896)을축에 즉위, 53년간 재위 

12世

文惠王
문혜왕

諱炎 礪王三十六年 戊午立 在位五十年

BC843~BC793

휘는 염, 중국 려왕 36년(B.C 843)무오에 즉위, 50년간 재위 

13世

盛德王
성덕왕

諱越 宣王三十五年 戊申立 在位十五年

BC793~BC778

휘는 월, 중국 선왕 35년(B.C 793)무신에 즉위, 15년간 재위   

14世

悼懷王
도회왕

諱職 幽王四年 癸亥立 在位二年

BC778~BC776

휘는 직, 중국 유왕 4년(B.C 778)계해에 즉위, 2년간 재위

15世

文烈王
문열왕

諱優 幽王六年 乙丑立 在位十五年

BC776~BC761

휘는 우, 중국 유왕 6년(B.C 776)을축에즉위, 15년간 재위  

16世

昌國王 창국왕

諱睦 平王十年 庚辰立 在位十三年

BC761~BC748

휘는 목, 중국 평왕 10년(B.C 761)경진에 즉위, 13년간 재위   

17世

武成王
무성왕

諱平 平王二十三年 癸巳立 在位二十六年

BC748~BC722

휘는 평, 중국 평왕 23년(B.C 748)계사에 즉위, 26년간 재위   

18世

貞敬王
정경왕

諱闕 平王四十九年 己未立 在位十九年

BC722~BC703

휘는 궐, 중국 평왕 49년(B.C 722)기미에 즉위, 19년간 재위   

19世

樂成王
낙성왕

諱懷 桓王十七年戊寅立在位二十八年

BC703~BC675

휘는 회, 중국 환왕 17년(B.C 703)무인에 즉위, 28년간 재위

20世

孝宗王
효종왕

諱存 惠王二年 丙午立 在位十七年

BC675~BC658

휘는 존, 중국 혜왕 2년(B.C 675)병오에 즉위, 17년간 재위   

21世

天老王
천노왕

諱孝 惠王十九年 癸亥立 在位二十四年

BC658~BC634

휘는 효, 중국 혜왕 19년(B.C 658)계해에 즉위, 24년간 재위   

22世

修道王
수도왕

諱立 襄惠王十八年 丁亥立 在位十九年

BC634~BC615

휘는 립, 중국 양혜왕 18년(B.C 634)정해에 즉위, 19년간 재위   

23世

徽襄王
휘양왕

諱通 頃王四年 丙午立 在位二十一年

BC615~BC594

휘는 통, 중국 경왕 4년(B.C 615)병오에 즉위, 21년간 재위   

24世

奉日王
봉일왕

諱參 定王三十年 丁卯立 在位十六年

BC594~BC578

휘는 참, 중국 정왕 30년(B.C 594)정묘에 즉위, 16년간 재위

25世

德昌王
덕창왕

諱僅 簡王八年 癸未立 在位十八年

BC578~BC560

휘는 근, 중국 간왕 8년(B.C 578)계미에 즉위, 18년간 재위

26世

壽聖王
수성왕

諱翔 一云商 靈王十二年 辛丑立 在位四十一年

BC560~BC519

휘는 상, 중국 령왕12년(B.C 560)신축에 즉위, 41년간 재위

27世

英傑王
영걸왕

諱藜 敬王1年 壬午立 在位十六年

BC519~BC503

휘는 려, 중국 경왕1년(BC519)임오에 즉위, 16년간 재위   

28世

逸民王
일민왕

諱岡 敬王十七年 戊戌立 在位十七年

BC503~BC486

휘는 강, 중국 경왕17년(BC503)무술에 즉위, 17년간 재위

29世

濟世王
제세왕

諱混 敬王三十四年 乙卯立 在位二十一年

BC486~BC465

휘는 혼, 중국 경왕34년(BC486)을묘에 즉위, 21년간 재위  

30世

淸國王
청국왕

諱璧貞 定王五年 丙子立 在位三十三年

BC465~BC432

휘는 벽정, 중국 정왕5년(BC465)병자에 즉위, 33년간 재위 

31世

導國王
도국왕

諱澄 考王十年 己酉立 在位十九年

BC432~BC413

휘는 징, 중국 고왕10년(BC432)기유에 즉위, 19년간 재위 

32世

赫聖王
혁성왕

威烈王十三年 戊辰立 在位二十八年

BC413~BC385

휘는 수 , 중국 위열왕13년(BC413)무진에 즉위, 28년간 재위 

33世

和羅王
화라왕

諱謂 安王十七年 丙申立 在位十六年

BC385~BC369

휘는 위, 중국 안왕17년(BC385)병신에 즉위, 16년간 재위 

34世

說文王
설문왕

諱賀 烈王七年 壬子立 在位八年

BC369~BC361

휘는 가, 중국 열왕7년(BC369)임자에 즉위, 8년간 재위 

35世

慶順王
경순왕

諱華 顯王八年 庚申立 在位十九年

BC361~B342C

휘는 화, 중국 현왕8년(BC361)경신에 즉위, 19년간 재위 

36世

嘉德王
가덕왕

顯王二十七年 己卯立 在位二十七年 

BC342~BC315

휘는 후, 중국 현왕 27년(BC342) 기묘에 즉위, 27년간 재위

37世

三老王
삼노왕

王六年 丙午立 在位二十五年

BC315~BC290

휘는 오, 중국 신정왕 6년(BC315) 병오에 즉위, 25년간 재위

38世

顯文王
현문왕

諱釋 赫王二十五年 辛未立 在位三十九年

BC290~BC251

휘는 석, 중국 혁왕25년(BC290)신미에 즉위, 39년간 재위 

39世

章平王
장평왕

諱潤 東周君五年 庚戌立 在位十九年

BC251~BC232

휘는윤, 중국 동주군 5년 (BC251)경술에 즉위, 19년간 재위 

40世

宗統王
종통왕

諱丕 初諱恤 秦王政十五年 己巳立 在位十二年

BC232~BC220

휘는 비, 초휘는 휼, 진시황15년(BC232)기사에 즉위, 12년간 재위 

41世

哀 王
애왕

諱準 輿地勝覽云武康王 始皇二十七年 辛巳立 漢惠帝元年 丁未 燕人 衛滿 來侵 率左右宮人 浮海南出 立國金馬郡 今益山開國 號曰馬韓 在平壤 爲王二十七年 自箕聖東渡 己卯後 凡四十一世 歷年爲 九百二十九年

BC220~BC194

휘는 준, 여지승람에는 무강왕으로 전하며 진시황27년(BC220)에 즉위하여 한나라 혜제원년(BC194)정미에 연나라 위만의 침공으로 좌우신하와 궁인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옮겨 금마 (지금의 익산)에 마한이라는 국가를 세우니 평양에서의 재위가 27년이요 문성왕이 동래한 기묘년(BC1122)으로부터 41세요, 역사가 929년이다.

마한(馬韓 九世 王位 諱號)世系 top

1世

武康王
무강왕

BC220-BC194

一云哀王 諱準 丁未(B.C 194)移都 馬韓 其年薨 哀王己入於都平壤四十一世則  馬韓王爲八世

애왕, 휘는 준. 漢혜제 원년(B.C 194)정미년 도읍을 마한으로 옮긴후 그해 승하, 태조 문성대왕이 평양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운후 41세이고 마한 왕위는 8세를전함

2世

康王
강왕

BC193-BC189

諱卓 惠帝二年(B.C 193)戊申立 在位四年

휘는 탁, 漢혜제 2년(B.C 193)무신에 즉위, 4년간 재위 

3世

安王
안왕

BC189-BC157

諱龕 惠帝六年(B.C 189)壬子立 在位三十二年

휘는 감, 漢혜제 6년(B.C 189)임자에 즉위, 32년간 재위 

4世

惠王
혜왕

BC157-BC144

諱寔 文帝後元七年(B.C157)甲申立 在位十三年

휘는 식, 漢문제7년(B.C157)갑신에 즉위, 13년간 재위 

5世

明王
명왕

BC144-BC113

諱武 景帝十三年(B.C144)丁酉立 在位三十一年

휘는 무, 漢경제 13년(B.C144) 정유에 즉위, 31년간 재위 

6世

孝王
효왕

BC113-BC73

諱亨 武帝二十八年(B.C113)戊辰立 在位四十年

휘는 형, 漢무제 28년(B.C113) 무진에 즉위, 40년간 재위 

7世

襄王
양왕

BC73-BC58

諱燮 宣帝本始元年(B.C73年)戊申立在位十五年

휘는 섭, 漢선제본시원년(B.C73年) 무신에 즉위, 15년간 재위 

8世

元王
원왕

BC58-BC32

諱勳 宣帝神爵四年(B.C 58)癸亥立 在位二十六年 甲子(B.C 57)新羅王朴赫居世立國慶州遂竝辰韓 二十二年(B.C 37)甲申 高句麗 東明王 高朱蒙 立國 成川倂二府 元稽之末

휘는훈, 漢선제신작4년(B.C 58)계해에 즉위 재위26년, 갑자(B.C 57)에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 경주가 진한경계 밖으로 나갔으며 왕22년(B.C 37)갑신에는 동명왕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 성천2부가 병합되었고 계왕이 즉위하였으나 이미 나라가 기울어 짐

9世

稽王
계왕

BC32-BC17

諱貞 成帝建始元年(B.C 32)己丑立 鴻嘉四年(B.C 17)甲辰 爲百濟溫祚 所奪 在位十六年

 휘는 정, 중국 성제 원년(B.C 32)기축에 즉위, B.C 17년갑진에 백제 온조왕에게 나라를 잃음, 재위 16년,   

持國人只保圓山 錦峴二城 新莽元年(A.D 9)己巳 降于百濟馬韓逐不祀 自康王戊申 至己巳爲 馬韓 凡8王 歷202年

自箕子朝鮮41世 至馬韓9世 前後共50世 箕子元年至 韓末之歲合1131年

馬韓之末 元王 勳 有子三人

     一曰 友平 入黃龍國爲北原(或云太原)鮮于氏

     一曰 友諒 仕于新羅脫解王朝爲上黨韓氏以淸州爲本

     一曰 友誠 降百濟仕于溫祚王朝爲德陽奇氏以辛州爲本

按魏誌曰箕子子姓其後有曰友平,友諒,友成                      

友平因襲鮮于氏歸北原

友諒襲馬韓仍爲上黨韓氏

友誠歸德陽爲奇氏

見石灘公所刊萬曆丁巳譜(見석탄공 휘 효중 간행 시간 정사보)

持國人只 保圓山 錦峴2城이 新莽원년(A.D 9)己巳에 항복함으로 향사를 중단하니 마한의 역사는 강왕 무신년부터 기사년까지 8왕 202년이요.기자조선41세 마한9세 도합50세에 기자원년부터 마한말까지 역년이 1131년이라.

8세 원왕 훈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우평은 황룡국(고구려)에 들어가 북원 선우씨가 되고,

      우량은 신라 탈해왕조에 들어가 청주 한씨라 일컫게 되고,

      우성은 백제 온조왕조에 들어가 덕양 기씨라 칭하다.

上黨(淸州)韓氏 王子以下 世系 top

1世

友諒

元王 第2子 新羅司徒 始爲上黨韓氏

17世

義臣

司空

우량

원왕 제2자 신라사도 시위상당한씨

의신

사공

2世

致殷

新羅 侍中

18世

俊武

司徒

치은

신라 시중

준무

사도

3世

司空

19世

恭烈

司徒

사공

공열

사도

4世

箕憲

司徒

20世

仁謙

司徒

기헌

사도

인겸

사도

5世

采圭

光祿僕射

21世

侍中

채규

광록복사

시중

6世

廷杰

司徒

22世

憲祖

孝友著世

정걸

사도

헌조

효우저세

7世

遂良

光祿僕射

23世

鶴齡

學行著世

수량

광록복사

학령

학행저세

8世

以雄

光祿僕射

24世

鳳允

入 安東 華盖山 處士 終身

이웅

광록복사

봉윤

입 안동 화개산 처사 종신

9世

文倜

光祿僕射

25世

麟瑞

司徒

문척

광록복사

인서

사도

10世

綏東

光祿僕射

26世

龍彩

府使

수동

광록복사

용채

부사

11世

治安

光祿僕射

27世

德彬

牧使

치안

광록복사

덕빈

목사

12世

再煥

司徒

28世

禮燦

僖康王朝 爲 左僕射

재환

사도

예찬

희강왕조 위 좌복사

13世

守業

司徒

29世

邦亨

贈侍中

수업

사도

방형

증시중

14世

壽萬

司徒

30世

光宗

贈侍中

수만

사도

광종

증시중

15世

司徒

31世

智原

贈侍中 是爲 太尉公 考

사도

지원

증시중 시위 태위공 고

16世

忠卿

司徒

32世

 太尉公

충경

사도

 태위공

 吾韓丁甲戌三譜只有魏志魏略及先儒所論明箕子之後己酉譜始載後朝鮮四十八王及馬韓八王至丁亥修譜時湖南宗人在洙謂以太尉公以上失傳世系出於關西同宗之家而送於譜所羅史之未及稽家牒之所不載而或有後之博雅君子出而有所考證則豈不爲吾韓氏之幸歟姑錄此以俟云謹按甲子修譜時又考本宗人在權家藏則出於江原道白頭山下韓致玉家云而此系旣入錄故今又隨錄焉 

箕子朝鮮의 새로운 觀點에서의 照明 top

 http://home.megapass.co.kr/~hsg1000/index.htm 에서전재

 고대 우리 민족의 이동  경로와 우리 한씨의 뿌리를 밝히는데 또 다른면에서 훌륭한 자료라고 생각하여 인용하였으나 국사 학계에서 아직 정설로 인정되지 않아 교과서 내용과 서로 다름으로 입시등에는 이 자료를 사용하시면 안됩니다.더 많은 내용을 원하시면 위의 주소로 들어가시면 보실수 있습니다. 아울러 본 자료를 등재할 수 잇도록 허락하여 주신 한순근 종인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 개설

                                  2. 건국시기

                                  3. 수도

                                  4. 기자의 동래

                                  5. 기자조선세계

                                  6. 중국에 거주한 기자족

                                  7.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

                                  8. 기자조선의 영역

                                  9. 기자조선의 역사

1. 개설

[사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인정 또는 부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기자조선을 인정하는 사학자들은 기자조선의 존재시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기자조선과 왕검조선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존재에 관하여 사학계는 이를 인정하는 견해와 인정하지 않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註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는 기자조선이 진번조선(眞番朝鮮)으로,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북부여기(北夫餘紀)에는 번조선(番朝鮮)으로, 위략(魏略)에는 조선(朝鮮)으로 각 적혀 있다. 본서는 이 조선을 다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기자조선이라 부른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학자들도 기자조선의 존재시기에 관하여 상서대전(尙書大傳 )에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동래(東來)하였다고 적혀 있는 B.C 1122년부터 사기(史記)에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 B.C 194년까지로 보는 견해와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箕)가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稱王)하였다고 적혀 있는 B.C 323년부터 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번조선(番朝鮮) 왕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패하여 망하였다고 적혀 있는 B.C 194년까지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 진다.

우리나라나 일본의 강단(講壇) 사학자 대다수는 은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동래하였다는 기자(箕子)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神話的)인 인물이라며 중국에서 동래하였다는 기자를 시조로 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전국시대 때 수유족의 우두머리 기후가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하였다는 나라도 기자조선으로 보지 않고 왕검조선의 일부로 보고 있다. [註 일부 사학자는 이 나라를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적혀 있는 명칭대로 진번조선(辰番朝鮮)이라 부른다.]

전국시대 때 칭왕한 나라는 모두 다른 나라에 복속하지 않는 독립국이므로 기후가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한 나라는 왕검조선의 일부가 아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검조선은 개국 후 1908년만에 멸망하였고, 환단고기 단군세기 및 북부여기에 의하면 왕검조선은 개국 후 2096년만인 B.C 238년에 멸망하였으므로, 그후 B.C 194년에 위만에게 멸망한 조선은 왕검조선이 아니다.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학자들이 보는 기자조선의 존재시기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동래(東來)하였다는 B.C 1122년부터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B.C 194년까지로 보는 견해

중국의 사서(史書)인 상서대전(尙書大傳) 등에는 B.C 1122년에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기자(箕子)가 주무왕(周武王)에게 신속(臣屬)하지 아니하고 조선(朝鮮)으로 가니 주무왕(周武王)이 이를 듣고 기자(箕子)를 조선의 후(侯)에 봉(封)하였다고 적혀 있다.

중국의 사서 영향을 받은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는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와서 후조선(後朝鮮)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제왕운기의 내용을 믿는 사학자들은 왕검조선(王儉朝鮮)은 기자(箕子)의 동래 이전에 이미 멸망하였고, 조선 지역에는 B.C 1122년부터 기자(箕子)가 세운 후조선(기자조선)이 존재하였다고 보고 있다.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箕)가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稱王)한 B.C 323년부터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B.C 194년까지로 보는 견해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하던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箕)가 B.C 323년에 번한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稱王)하였다고 적혀 있고, 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는 이 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B.C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 내용을 믿는 사학자들 중 일부는 기자조선세계 등을 근거로 기후가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한 나라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있다. 본서도 이 견해이다. [註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번한세가(番韓世家)에 적혀 있는 역대 번한과 기자조선세계(箕子朝鮮世系)에 적혀 있는 역대 기자조선왕을 대비해 보면, 기후(箕) 이후 왕들은 일치하나 기후 이전 왕들은 전혀 다르다. 기자조선세계에는 기후 이전 왕들이 역대 수유족의 우두머리들로 적혀 있으나, 번한세계에는 기후 이전 왕들이 역대 번한왕들로 적혀 있다. 기후 이전 왕들이 서로 틀리는 것은 기후가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하므로써 새나라를 세운 후 기후 이전 수유족 우두머리들을 기자조선의 왕으로 추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한세가에 기후 등이 번한왕으로 적혀 있는 것은 기후가 번조선을 빼앗아 칭왕하였지만 새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지 않고 번조선의 왕통만 바뀐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에 만주에 거주한 만주 기마족에 대하여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만주 기마족에 대하여는 구려에 관한 사서편의 사기 흉노전 부분 참조).

고대에 만주에 거주한 유목족과 사냥족은 중국에 거주한 농경족에 비하여 전투력이 훨씬 강하였다. 그 때문에 만주 기마족은 수시로 중국을 침략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점령지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점령지에 정착한 만주 기마족은 농경 지역에 살면서부터 기마 및 무기 사용과는 거리가 멀어져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 결과 점령지에 정착한 만주 기마족은 중국왕조에게 점령지를 도로 빼앗겼다.  이와 같이 고대에는 만주 기마족의 중국 중부이북 지방 점령과 중국왕조의 수복(收復)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될 무렵부터 사정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왕조는 철기문명의 발달로 우수한 철제무기를 보유하게 되자 성곽 및 기마 장애물을 만들고, 중국왕조의 보병부대가 만주 기마족의 기마부대를 방어할 수 있도록 긴 창을 이용한 보병밀집대형전술(步兵密集隊形戰術:陣法)을 개발하였으며, 중국왕조의 군대도 말을 사용하여 전차부대와 기마부대를 만들어 기동력 부족을 해결함으로써 전투력이 강해졌다. 이때부터 중국왕조는 만주 기마족에게 빼앗겼다가 수복(收復)한 지역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았으나, 아직 대량의 말을 보유하지 못하여 중국의 북부 지방에 남아 있는 만주 기마족을 만리장성 방면으로 밀어내지 못하였다.

중국왕조가 만주 기마족을 만리장성 방면으로 밀어낸 시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부터이다. 사기 흉노전을 보면 전국시대 초부터 만주 기마족이 북쪽으로 계속 밀렸다. 이는 만주 기마족의 전투력이 갑자기 약해진 것이 아니라 중국왕조의 군대도 대량의 말을 보유함으로써 기동력과 전투력이 강해졌고, 또 중국왕조가 많은 군사와 물자를 동원하여 대규모 토벌군을 연달아 보내는 소위 인명.물자 소모전술을 사용하였을 때, 인구가 적은 만주 기마족이 이를 당해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앞에 나온 내용을 참고로 하여 기자(箕子), 기자족(箕子族)에 대하여 살펴본다.

사기 흉노전에는 은(殷)나라 때 만주 기마족이 빈에 있던 고공단보(古公亶父)를 공격하여 기산(岐山)으로 쫓아 버렸다고 적혀 있고,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의 흘달단제(屹達檀帝) 갑오년(B.C 1767년)에 왕검조선의 군사가 하(夏)나라로 쳐들어가서 관중의 빈, 기(岐) 땅에 웅거하여 관청을 설치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처럼 만주 기마족이 중국을 침략하여 점령하였을 때,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살던 수유족(須臾族) 무리들도 중국의 태곡(太谷), 상당(上黨), 서화(西華) 등지를 점령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점령지에 정착하였다.

은나라는 태곡(太谷)에 정착한 수유족(須臾族) 1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동방(東方:조선 지역)에서 온 분이라는 뜻으로 기(箕:易에서 箕는 동방에 속한다)라는 작호(爵號)를 내렸는데, 이때부터 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기자(箕子)라 불렀다. 이 기자족(箕子族) 무리의 종실(宗室)이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일부 책에는 이 무리도 중국식 명칭인 기자족(箕子族)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이 무리들이 중국식 명칭인 기자족(箕子族)으로 적혀 있지 않고 원래의 명칭인 수유족(須臾族)으로 적혀 있고, 이 무리의 우두머리 명칭도 중국식 명칭인 기자(箕子)로 적혀 있지 않고 원래 명칭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胥餘), 수유(須臾) 등으로 적혀 있다. 이 서우여, 서여, 수유의 원래 명칭은 선우여(單于餘)로서 선우(單于)는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여(餘)는 부여 무리를 뜻한다. 즉 선우여는 부여 무리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선우여(單于餘)가 서우여(徐于餘), 서여(胥餘), 수유(須臾) 등으로 적혀 있는 것은 선우여 발음이 뒤에 선우여→서우여→서여→수유 순서로 변하자 발음이 변한대로 다른 한자로 적었기 때문이다.

후에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이조 때 수유족(須臾族)의 후손들이 그 세계(世系)를 다시 만들면서 그 세계를 미화(美化)하기 위하여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명칭을 원래 우리민족이 부른 명칭인 서우여, 서여, 수유 등으로 적지 않고 중국식 명칭인 기자(箕子)로 바꾸어 적었다. 그 때문에 후세의 일부 사학자는 수유족(須臾族)이 세운 나라를 원래 명칭인 선우(또는 서우여, 서여, 수유)를 앞에 붙여 선우조선이라 부르지 않고 중국식 명칭인 기자를 앞에 붙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 불렀다.

2. 건국시기

1).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기자조선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尙書大傳)이나 삼국지(三國志) 예전(濊傳) 등에는 은나라가 멸망한 후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의 후(侯)에 봉(封)하였다고 적혀 있다.

상서대전과 삼국지 예전에 적혀 있는 기자(箕子)에 관한 문구를 살펴본다.

「은나라를 이긴 무왕이 옥에 갇혀 있는 기자를 놓아주니, 기자는 주나라에 의하여 석방된 것을 감수할 수 없어 조선으로 가니,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武王勝殷繼公子祿父釋箕子之囚箕子不忍爲周之釋走之朝鮮武王聞之因爲朝鮮封之」尙書大傳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이를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조선후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 昔箕子旣適朝鮮作八條之敎以敎之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其後四十餘世朝鮮侯准僭號稱王」三國志 濊傳

상서대전 문구에는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의 후(侯)에 봉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사기 흉노전에 의하면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무찌르고 낙양을 도읍으로 꾸몄을 때 경수(涇水)와 낙수(洛水) 이북은 만주 기마족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상서대전 등 문구는 사실이 아니므로, 은나라가 망하였을 때 중국에서 온 기자가 다스렸다는 기자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무왕 때 주나라 영역

                                     

 [주무왕 때 주나라 영역은 하수 이남이었다]

2).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기자조선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B.C 323년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箕詡)가 무력으로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왕을 칭하였다.

「보을(普乙) 단제 무술년(B.C 323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 허락을 청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戊戌年正月邑借箕詡以兵入宮自以番朝鮮王遣人請允제許之使堅備燕」桓檀古記 檀君世紀

기후는 이보다 앞선 B.C 342년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36世 嘉德王 諱詡 顯王 27年 己卯(B.C 342年)立 在位 27年」

기자조선세계에 의하면 기후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한 후 기후 이전 수유족(須臾族) 우두머리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追尊)하였다.

「태조 문성대왕 기자의 성은 자씨이고 휘는 수유 또는 서여이다..중략..36세 가덕왕 때 왕으로 추존되었다. 太祖文聖大王箕子姓子氏諱須臾又諱胥餘..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의하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건국 후 한동안 왕검조선(王儉朝鮮)과 우호관계에 있었고, 그 뒤 고구려(高九黎)와도 우호관계에 있었다.

기후가 세운 기자조선은 B.C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었다.

3. 수도

기자조선의 초기수도

기후(箕詡)는 B.C 323년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는데, 중국의 사서에는 고죽국이 있던 곳에 기자조선이 있었고 영지현이 설치된 곳에 고죽성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당나라 배구전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었는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해 조선이 되었다. 唐裵矩傳云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以封箕子爲朝鮮」三國遺事

「영지(令支)에 고죽성(孤竹城)이 있었다.」漢書地里志(遼西郡)

한나라 때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을 둔 곳은 난하와 장성이 만나는 난하 바로 서쪽이었는데, 전에 고죽국이 있던 곳에 기자조선이 있었고,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었으므로, 고죽성이 있는 곳 즉 기자조선의 초기수도는 난하 바로 서쪽에 있었다.

기후가 기자조선을 세운 후 번한(番汗)이 후기수도로 사용한 대릉하 부근의 번한성(番汗城)을 수도로 사용하지 않고 난하 바로 서쪽에 있는 만번한(滿番汗)을 수도로 사용한 것은 당시 연나라가 기후 등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대신과 자제를 번한(番汗)에 인질로 보내는 등 국력이 매우 약해져 있어 만번한이 연나라의 공격을 받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의 후기수도

기자조선은 B.C 281년에 연나라장군 진개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난하 서쪽에 있는 만번한을 상실하고 천여리 동쪽으로 옮겼다.

[전략..그 뒤 연나라의 명장 秦開가 흉노(匈奴:註 만주 기마족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나 여기서는 기자조선 지칭)에게 인질로 가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다음 연나라로 돌아오자 곧 동호(東胡:註 기자조선 지칭, 위략에는 조선으로 적혀 있다)를 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천여리나 후퇴를 했다] 史記 匈奴傳

「연국이 장수 진개를 보내어 조선의 서방을 쳐서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으로 국경을 삼았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魏略

위만은 기자조선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웠는데,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창려의 험독현이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였다고 적혀 있다. 즉 기자조선의 후기수도는 위만조선의 초기수도였는데, 중국의 사서에는 그곳이 창려의 험독으로 적혀 있다.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고, 응소는 지리지에서 주석하기를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지라고 하였다. 徐廣曰..昌黎有險督縣 應劭注地里志遼東險督縣朝鮮王舊都」史記集解소

「응소는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 」 漢書地里志 遼東郡 險督縣 注

위 창려의 험독 위치에 대하여 한서보주(漢書補註)에는 "今營州古城東南一百七十里"라고 적혀 있고,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는 "今錦州府義州西北境"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기자조선의 후기수도는 대릉하 부근 의(義) 서북경에 있었다.

4. 기자의 동래

B.C 3세기에 지은 상서대전에는 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의 후(侯)로 봉하였다고 적혀 있고, A.D 3세기에 지은 삼국지에는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箕子)의 40여세 후손이 왕을 칭하였다고 적혀 있다.

「은나라를 이긴 무왕이 옥에 갇혀 있는 기자를 놓아주니, 기자는 주 나라에 의하여 석방된 것을 감수할 수 없어서 조선으로 가니,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武王勝殷繼公子祿父釋箕子之囚箕子不忍爲周之釋走之朝鮮武王聞之因爲朝鮮封之」尙書大傳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이를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조선후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 昔箕子旣適朝鮮作八條之敎以敎之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其後四十餘世朝鮮侯准僭號稱王」三國志 濊傳

위 문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은나라가 멸망한 후 주나라의 후국(侯國)이 되었다.

-은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조선으로 온 기자(箕子)의 40여세 후손이 왕을 칭하였다.

위 상서대전이나 삼국지 예전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를 살펴보기 위하여 사기 흉노전에서 은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과 만주의 상황을 살펴본다.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무찌르고 낙읍(雒邑)을 도읍으로 꾸민 다음 풍(酆), 호(鄗)에 살며 융이(戎夷)를 경수(涇水)와 낙수(洛水) 이북으로 내쫓았다.(B.C 1122년-1100년경)」

「그 200년 뒤 목왕(穆王)이 견융(犬戎)을 쳤다.」

「그 200년 뒤 견융(犬戎)이 쳐들어와 주유왕(周幽王)을 여산(驪山) 기슭에서 죽였다. 견융(犬戎)은 주나라의 초확(焦穫)을 빼앗아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중국을 침범하고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

「진양공(秦襄公)이 주(周)를 구원하여 주평왕(周平王)은 풍(酆), 호(鄗)를 떠나 동쪽 낙읍(雒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진양공은 견융(犬戎)을 치고 기산(岐山)에 까지 이르렀다.」(B.C 770년경)

「그 65년 뒤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넘어와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제희공(齊禧公)이 산융(山戎)과 제(齊)나라 도성 밖에서 싸웠다.」(B.C 707년)

「그 44년 후 산융이 연(燕)나라를 치자 연(燕)나라는 곧 위급함을 제(齊)나라에게 알렸고 제환공(齊桓公)은 산융(山戎)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그 20년 뒤 융적(戎狄)이 낙읍(낙邑)으로 쳐들어와 주양왕(周襄王)을 공격하여 양왕(襄王)은 정(鄭)나라의 범읍(氾邑)으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융적(戎狄)은 혹은 육혼(陸渾)에서 살고 혹은 동쪽으로 위(衛)나라에 이르러 중국을 침략, 약탈하며 포학을 일삼았다. 주양왕(周襄王)은 도성 밖에서 살기를 4년이나 했다. 그래서 사신을 진(晋)으로 보내 위급함을 고했다. 진문공(晋文公)은 군사를 일으켜 융적(戎狄)을 쳐서 내쫓고 주양왕(周襄王)을 맞아들여 낙읍에 살게 했다. 진문공(晋文公)은 융적(戎狄)을 하서(河西)의 은수(圁水)와 낙수(洛水) 사이로 내쫓고 진목공(秦穆公)은 유여(由余)를 신하로 맞아들임으로써 서융(西戎)의 8국을 복종시켰다.」

춘추시대 이전 만주 기마족(匈奴)의 영역

[주무왕 때 주나라의 영역은 하수(황하) 이남이었다] 

앞에 나온 사기 흉노전 문구에 의하면, 은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주나라의 세력 범위는 하수(황하) 이남이었고, 하수 이북은 만주 기마족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다. 따라서 사기 흉노전 문구에 의하면 은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조선이라 부른 발해북안(渤海北岸)은 주나라의 세력권 바깥에 있었으므로, 은나라 멸망 후 주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의 후(侯)에 봉하였다는 상서대전 문구는 사실이 아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였을 때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箕子)는 솔나(率那) 단제 정해년(B.C 1114년) 즉 동래한지 8년 후에 도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정해년(B.C 1114년) 기자 서화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箕子徙居西華謝絶人事」桓檀古記 檀君世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의하여도 은나라 멸망 후 중국에서 조선으로 온 기자(箕子)는 동래한지 8년 후 도로 돌아 갔으므로,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와 그 후손들이 주나라의 후(侯)가 되어 40여세 동안 조선을 다스렸다는 중국사서 문구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왜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의 후(侯)에 봉(封)한 것처럼 사서를 왜곡하고, 또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箕子)의 후손이 40여 세 동안 조선을 통치한 것처럼 사서를 왜곡하였을까? 이는 중국왕조의 이민족 정책 때문이다.

역대 중국왕조가 이민족(異民族)의 나라를 복속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방법을 보면, 이민족의 나라가 전에부터 중국왕조에게 복속해 온 복속국인 것처럼 사서를 왜곡하여 그것을 이민족의 나라를 복속시키는 명분으로 삼았고, 그래도 이민족의 나라가 복속하지 않으면 왜곡한 사서를 근거로 하여 이민족의 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왕조에 복속해 온 복속국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중국왕조에 복속하지 않으므로 부득이 정벌한다는 식으로 전쟁의 명분을 만들었으며, 그 명분을 이민족에게 선전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된 책임을 이민족 나라의 지도자에게 덮어씌워 이민족 나라를 내부적으로 분열시켰고, 그 명분을 이용하여 이민족 나라의 측방과 후방에 동맹세력을 만들어 이민족 나라를 포위하였다.

앞에 나온 상서대전 문구는 논어(論語) 등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이 나오자 상서대전은 이를 왜곡하여 은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주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의 후(侯)에 봉한 것처럼 왜곡하였고, 삼국지(三國志) 예전(濊傳) 문구는 상서대전 문구를 더 왜곡하여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한 후부터 조선이 주나라의 후국(侯國)이 된 것처럼 왜곡하였다

5. 기자조선세계

현존하는 기자조선세계(箕子朝鮮世系)에는 기자조선의 건국시기가 기자(箕子)가 동래 하였다는 B.C 1122년으로 적혀 있고, 역년은 41세 929년으로 적혀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기자조선세계에 의하면 왕검조선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 우두머리 기후(箕詡)는 B.C 323년에 왕검조선의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기자조선을 세우고 수유족 세계(世系)를 미화(美化)하기 위하여 기후 이전 수유족 우두머리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였다. 따라서 기자조선세계에 적혀 있는 기후(箕詡) 이전 기자조선왕들은 진짜 기자조선왕이 아니고 추존왕이고, 재위기간도 기자조선왕으로서의 재위기간이 아니고 수유족 우두머리로서의 재위기간이다.

기후가 기자조선을 세운 후 기자조선의 추존시조로 삼은 사람은 누구일까?

삼국지에는 칭왕(稱王)한 조선후(朝鮮侯)의 40여대 선조로 적혀 있다.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이를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조선후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 昔箕子旣適朝鮮作八條之敎以敎之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其後四十餘世朝鮮侯准僭號稱王」三國志 濊傳  [註 조선의 후(侯)가 칭왕한 때는 연나라 역왕(易王:BC 333-321년) 때이고, 칭왕한 사람은 기후(箕詡)이지 기후보다 훨씬 후에 재위한 기준(箕准:BC 220-194년)이 아니다. 삼국지 예전 문구는 기후를 기준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기자조선세계에는 기후가 왕을 칭한 후 기자조선의 추존시조로 삼은 사람은 은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왔다는 기자(箕子)로 적혀 있다(아래에 나오는 기자조선세계 참조).

삼국지 예전에는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의 40여세 후손이 왕을 칭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현존하는 기자조선세계에는 왕을 칭한 기후 윗대가 35대밖에 되지 않는다. 즉 삼국지를 지을 때 본 기자조선세계보다 현존하는 기자조선세계에는 기후 윗대가 5대 누락되어 있다. 이는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이조 때 후손들이 기자조선세계를 다시 만들면서 그 세계를 빛내기 위하여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를 기자조선의 추존시조로 만들고 기자 동래 이전에 수유족 우두머리로 재위한 추존왕 5명을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세계

1世 太祖文聖大王箕子姓子氏諱須臾又諱胥餘 商帝武乙次子諱理子也誕降于帝乙十七祀丙戌五十四 祀周武王己卯痛深革殷志堅岡僕遂東出朝鮮都平壤國號後朝鮮敎民8條變夷爲夏周成王戊午薨在位四十祀壽九十三墓平壤城北王荇山負子原俗稱兎山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2世 莊惠王 諱松 周成王34年己未立 在位25年 諱仲 封於于其子孫在鮮在于者食其二國因姓鮮于

3世 敬孝王 諱詢       康王22年甲申(B.C 1057)立   在位 27年

4世 恭貞王 諱伯       昭王23年辛亥(B.C 1030)立   在位 30年

5世 文武王 諱椿       穆王2年辛巳(B.C 1000)立     在位 28年

6世 太原王 諱禮       穆王30年己酉(B.C 972)立     在位  4年

7世 景昌王 諱莊       穆王35年癸丑(B.C 968)立     在位 11年

8世 興平王 諱捉       穆王45年甲子(B.C 957)立     在位 14年

9世 哲威王 諱調       共王4年戊寅(B.C 943)立      在位 18年

10世 宣惠王 諱索     懿王14年丙申(B.C 925)立     在位 29年

11世 誼襄王 諱師     孝王14年乙丑(B.C 896)立     在位 53年

12世 文惠王 諱炎     려王36年戊午(B.C 843)立     在位 50年

13世 盛德王 諱越     宣王35年戊申(B.C 793)立     在位 15年

14世 悼懷王 諱職     幽王4年癸亥(B.C 778)立      在位   2年

15世 文烈王 諱優     幽王6年乙丑(B.C 776)立      在位 15年

16世 昌國王 諱睦    平王10年庚辰(B.C 761)立     在位 13年

17世 武成王 諱平    平王23年癸巳(B.C 748)立     在位 26年

18世 貞敬王 諱闕    平王49年己未(B.C 722)立     在位 19年

19世 樂成王 諱懷     桓王17年戊寅(B.C 703)立     在位 28年

20世 孝宗王 諱存     惠王2年丙午(B.C 675)立      在位 17年

21世 天老王 諱孝     惠王19年癸亥(B.C 658)立    在位 24年

22世 修道王 諱立     襄惠王58年丁亥(B.C 634)立    在位 19年

23世 徽襄王 諱通     頃王4年丙午(B.C 615)立      在位 21年

24世 奉日王 諱參     定王13年丁卯(B.C 594)立    在位 16年

25世 德昌王 諱僅     簡王8年癸未(B.C 578)立      在位 18年

26世 壽聖王 諱翔     靈王12年辛丑(B.C 560)立    在位 41年

27世 英傑王 諱黎     敬王1年壬午(B.C 519)立      在位 16年

28世 逸民王 諱岡     敬王17年戊戌(B.C 503)立    在位 17年

29世 濟世王 諱混     敬王34年乙卯(B.C 486)立    在位 21年

30世 淸國王 諱璧     貞定王5年丙子(B.C 465)立  在位 33年

31世 導國王 諱澄     考王10年己酉(B.C 432)立    在位 19年

32世 赫聖王 諱준     威烈王13年戊辰(B.C 413)立 在位 28年

33世 和羅王 諱謂     安王17年丙申(B.C 385)立    在位 16年

34世 說文王 諱賀     烈王7年壬子(B.C 369)立      在位  8年

35世 慶順王 諱華     顯王8年庚申(B.C 361)立      在位 19年

36世 嘉德王 諱詡     顯王27年己卯(B.C 342)立     在位 27年

37世 三老王 諱     愼王6年丙午(B.C 315)立   在位 25年

38世 顯文王 諱釋     赫王25年辛未(B.C 290)立    在位 39年

39世 章平王 諱潤    東周君5年庚戌(B.C 251)立    在位 19年

40世 宗統王 諱丕初諱恤 秦王政15年己巳(B.C 232)立 在位 12年

41世 哀王 諱準 輿地勝覽云武康王始皇二十七年申巳立 漢惠帝元年丁未燕人衛滿來侵率佐 右宮人浮海南出立國金馬郡今益山改國號曰馬韓在平壤爲王二十七年 自箕聖東渡己卯後凡四十一世 歷年爲九百二十九年.

[註 위 기자조선세계에는 37세 三老王의 휘(諱)가 로 적혀 있으나, 뒤에 이기하면서 욱(煜)을 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는 煜으로 적혀 있다]

위 기자조선세계(箕子朝鮮世系)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문성대왕조(文聖大王條)에 의하면 문성대왕(文聖大王)은 36세 가덕왕(諱 詡) 때 왕으로 추존(追尊)되었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자조선세계에 적혀 있는 가덕왕 이전 기자조선왕들은 모두 가덕왕 때 왕으로 추존된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들이다(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문성대왕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시조로 적혀 있다. 문성대왕이 기자조선의 시조로 적혀 있는 것은 문성대왕이 기자조선을 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후가 칭왕한 후 수유족 우두머리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였는데,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이조 때 후손들이 기자조선세계를 다시 만들면서 그 세계를 빛내기 위하여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를 기자조선의 시조로 만들고 기자 동래 이전에 수유족 우두머리로 재위한 추존왕 5명을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애왕조(哀王條)에는 B.C 194년에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익산 금마로 남하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기자조선이 한반도 북반부에 존재하였고, 기자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위만은 기자조선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웠는데, 기자조선의 후기수도는 위만조선의 초기수도였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창려의 험독현이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였다고 적혀 있는데, 창려의 험독 위치에 대하여 한서보주(漢書補註)에는 "今營州古城東南一百七十里"라고 적혀 있고,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는 "今錦州府義州西北境"이라고 적혀 있다. 즉 위만조선의 초기수도 겸 기자조선의 후기수도는 대릉하 부근 의(義) 서북경에 있었지 평양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기준은 평양에서 익산 금마로 남하하지 않았다.

후한서한전이나 마한세계에는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마한(馬韓)으로 이동하였다고 적혀있다.

「무강왕(일명 애왕) 휘 준 정미년에 마한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 해 죽었다.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 移都馬韓 其年薨 」 馬韓世系

「41세 애왕 휘 준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무강왕은 진시황 27년 신사년에 즉위하여 한 혜제 원년 정미년에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궁인들을 데리고 바다를 통하여 남쪽으로 와서 금마군에서 나라를 세웠다. 지금의 익산이다. 나라 이름을 바꾸어 마한이라 하였다. 41世 哀王 諱準 輿地勝覽云武康王始皇二十七年申巳立 漢惠帝元年丁未燕人衛滿來侵率佐右宮人浮海南出立國金馬郡今益山改國號曰馬韓」 箕子朝鮮世系   [註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 A.D 1486년에 노사신, 김종직이 지은 사서이다.]

「초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 무리들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 왕이 되었다. 준 후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後漢書 韓傳

위 문구에 나오는 마한(馬韓)은 익산 금마가 아니고 지금의 평안도 지방이다. 고대에 한반도의 통치자를 뜻하는 마한(馬韓) 또는 마한이 있는 곳을 높여서 금마(金馬)라 불렀는데, 기준의 후손들이 기자조선세계를 다시 만들면서 동국여지승람을 보고 기준이 이도(移都)한 금마(金馬)를 익산 금마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기준의 후손이 익산 금마로 남하하여 익산 금마 마한왕이 된 시기는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한 후이므로, 기준이 죽은지 약 200여 년이 지난 후이다.

참고 :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번한세가(番韓世家)에 적혀 있는 역대 번한(番汗)과 기자조선세계(箕子朝鮮世系)에 적혀 있는 역대 기자조선왕을 대비해 보면, 기후(箕詡) 이후는 일치하나 기후 이전 왕들은 전혀 다르다. 기자조선세계에는 기후 이전 왕들이 역대 수유족의 우두머리들로 적혀 있으나, 번한세계에는 기후 이전 왕들이 역대 번한왕들로 적혀 있다. 기후 이전 왕들이 서로 틀리는 것은 기후가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하므로써 새나라를 세운 후 기후 이전 수유족 우두머리들을 기자조선의 왕으로 추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한세가에 기후 등이 번한왕으로 적혀 있는 것은 기후가 번조선을 빼앗아 칭왕하였지만 새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지 않고 번조선의 왕통만 바뀐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6. 중국에 거주한 기자족

고대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 무리들은 만주의 다른 무리들과 같이 중국을 침략하였고, 그때 수유족(須臾族) 무리 중 일부가 태곡(太谷), 상당(上黨), 서화(西華) 등지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 중 태곡(太谷)에 정착한 수유족(須臾族) 무리의 우두머리가 은나라로부터 "기(箕:箕는 易에서 동방을 뜻하는고, 기자는 동방에서 온 분이라는 뜻이다)"라는 작호(爵號)를 받고 기자(箕子)라 불린 후부터 이 무리를 기자족(箕子族)이라 불렀다.

기(箕)의 위치에 대하여 통지(通志) 등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箕子의 國은 商의 畿內諸侯이다. 杜預가 말하기를 "太原 陽邑懸 南에 箕가 있다"고 하였으니, 陽邑은 隋가 太谷으로 고쳤고, 지금은 太原에 隸하고 있다. 武王이 商을 克하매 箕子를 朝鮮에 改封하니 그 地는 뒤에 晋의 邑이 되었다.」 通志 箕氏

 「太谷懸은 府 東南 120里, 본래 晋大夫 陽處父의 邑이었고, 漢이 陽邑縣으로 삼아 太原郡에 屬하게 하였다...隋 開皇 18年에 太谷縣으로 고쳤다.」讀史方輿紀要 山西 太原府

위 문구에 의하면 기(箕) 지역은 태원(太原) 부근이다. 그러나 다른 사서에는 서화(西華), 상당(上黨) 등지도 기(箕) 지역으로 적혀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였을 때 조선으로 온 기자(箕子)는 몇 년 뒤 서화(西華)로 돌아갔다. 대청일통지에 의하면 서화는 옛 기(箕) 지역이었다.

「솔나(率那) 단제 정해년(B.C 1114년) 기자 서화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箕子徙居西華謝絶人事」桓檀古記 檀君世紀

「서화는 옛 기 지역이다. 개봉부 서쪽 90리에 있다. 西華故箕地在開封府西九十里」大淸一通志

중국에 거주한 기자족(箕子族)은 나중에 중화족에 동화되었다.

7.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

중국에 거주한 기자족(箕子族)과 만주남부 지방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 무리들은 만주의 다른 무리들과 같이 수시로 중국을 침략하였고, 그 무리 중 일부가 태곡(太谷), 서화(西華), 상당(上黨) 등지에 정착해 살았다. 그 중 태곡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 무리의 우두머리가 은나라로부터 기(箕)라는 작호(爵號)를 받고부터 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기자(箕子)로, 이 무리를 기자족(箕子族)이라 불렀다.

그러나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은 그 우두머리의 칭호를 중국식 명칭인 기자(箕子)로 부르지 않고 원래 명칭대로 계속 서우여(徐于餘), 서여(胥餘), 수유(須臾) 등으로 불렀다. 강학용(講學用) 교재에는 만주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과 중국에 거주한 기자족(箕子族)이 모두 중국식 명칭인 기자족(箕子族)으로 적혀 있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의하면 전기왕검조선(前期王儉朝鮮) 소태(蘇台) 단제(檀帝) 때 수유족의 우두머리 서우여가 왕검조선의 상장(上將)이라는 직위에 있는 등 수유족은 강력한 무력(武力)을 가지고 있었다.

「소태(蘇台) 단제 경인년(庚寅年:B.C 1291년) 때에 은나라 왕 무정이 병을 일으켜 사방을 치려 하므로 고등이 이를 듣고 마침내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러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時殷主武丁方欲興兵高登聞之遂與上將西余共破之追至索度縱兵焚掠而還」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수유족(須臾族)의 세력이 막강하자 소태 단제는 서우여(徐于餘)에게 단제 자리를 넘겨주려 하였으나, 이에 반발한 색불루(索弗婁)가 무력(武力)으로 부여신궁(夫餘新宮)을 점령함으로써 서우여(徐于餘)는 단제 즉위에 실패하였다.

「소태(蘇台) 단제 을미년(B.C 1286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 안을 돌아보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父老)들을 두루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 오가들을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했는데, 자신은 늙어서 게을러졌다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맡기고 싶어하면서 그를 살수 둘레 땅 1백 리의 섭주로 봉하고 호를 기수(奇首)라 부르도록 하였다. 우현왕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내 이를 듣지 않았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 명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 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이 되게 하고, 단제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생을 끝마쳤다. 乙未年右賢王高登薨其孫索弗婁襲爲右賢王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右賢王聞之遣人勤帝止之帝終不聽於是右賢王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帝不得己傳玉冊國寶廢徐于餘爲庶人帝隱於阿斯達以終」桓檀古記 檀君世紀

단제 즉위에 실패한 서우여(徐于餘)는 몰래 좌원(坐原)에 돌아와 사냥꾼 수천 인을 모아 군대를 일으켰다. 개천령(蓋天齡)이 이를 듣고 토벌하려다 패하자 색불루 단제는 서우여(徐于餘)를 번한(番汗)에 임명하여 무마하였다.

「단군 색불루는...이보다 앞서 서우여를 페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檀君索弗婁...先是廢徐于餘爲庶人徐于餘潛歸坐原與獵戶數千謀起兵蓋天齡聞卽欲伐敗沒于陣帝親率三軍往討之乃先遣勤降約封爲裨王再諭以聽之是命徐于餘爲番汗」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이렇게 되어 서우여(徐于餘)는 단제 즉위에는 실패하였지만 그 대신 수유족(須臾族)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검조선의 번한(番汗)이 되어 B.C 1285년부터 B.C 1225년까지 번한 지역을 다스렸다.

그 후 번한(番汗)이 된 서여(胥餘)가 죽고 아들 서여가 번한(番汗)을 이어받지 못하자 후손 서여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신사년(B.C 1120년)에 서여가 번한(番汗) 지역에 있는 수유족 무리들을 이끌고 태행산맥 서북의 땅으로 이동하였다.

「기묘년에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 신사년(B.C 1120년)에 아들 서여(胥餘)가 거처를 태행산(太行山)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己卯殷滅後三年辛巳子胥餘避居太行山西北地莫朝鮮聞之巡審諸州郡閱兵而還」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 馬韓世家

그 후 수유족(須臾族) 무리들은 다시 번한(番汗) 지역으로 되돌아왔고, B.C 323년에 수유족(須臾族) 우두머리인 기후(箕詡)가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왕을 칭하였다.

보을(普乙) 단제 무술년(B.C 323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 허락을 청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戊戌年正月邑借箕詡以兵入宮自以番朝鮮王遣人請允제許之使堅備燕」桓檀古記 檀君世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은 B.C 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한지(韓地)로 이동하였다.

「무강왕(일명 애왕) 휘 준 정미년에 마한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 해 죽었다.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 移都馬韓 其年薨 」馬韓世系

「초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 무리들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 왕이 되었다. 준 후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後漢書 韓傳

8. 기자조선의 영역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동서남북 변경을 살펴본다.

1). 기자조선의 동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동변(東邊)은 대략 요하하류, 해성, 압록강중류, 청천강상류를 연결하는 선이었고 거의 변동이 없었다. 이는 기자조선의 동변(東邊)이 왕검조선(王儉朝鮮) 또는 고구려(高九黎)와 경계를 맞닿고 있었고, 기자조선이 왕검조선 또는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2). 기자조선의 북변과 남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북변(北邊) 중 요하(遼河) 서쪽 방면은 북으로 서요하(西遼河), 시라무렌하(西刺木倫河)를 넘어서지 못하였고, 요하(遼河) 동쪽 방면은 요하하류에서 압록강중류를 연결하는 선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남변은 만주 방면은 발해연안 해안지대이고 한반도 방면은 청천강(靑川江)이었다.

3). 기자조선의 서변

B.C 281년 진개(秦開)의 공격 이전

「연국의 동쪽에는 조선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있고, 남쪽에는 호타, 역수가있으며 국토는 사방 2천리이다. 蘇秦將爲從北說燕文侯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陀易水地方二千餘里」 戰國策 燕策

위 문구는 전국시대 때 소진(蘇秦)이 연(燕)의 문후(文侯)에게 합종(合從)의 이로움을 설득하면서 한 말의 일부이다.

소진이 합종을 성립시키고 6국의 재상을 겸한 시기는 B.C 333년이므로, 소진이 이 말을 할 때는 왕검조선의 번한(番汗) 지역에 기자조선이 건국되기 전이다.

기자조선은 B.C 323년에 왕검조선의 번한(番汗) 지역에서 건국되었으므로, 앞에 나온 문구를 분석해 보면 진개가 기자조선을 공격하기 전 기자조선의 서변(西邊)을 알 수 있다.

위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위 문구에는 "朝鮮遼東"이라 적혀 있다. 조선은 중국인들이 동쪽을 가리키는 말이고, 조선과 함께 쓰인 문구는 조선을 특정하는 말이므로, 조선요동은 요수(遼水)의 동쪽이 조선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자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는 요수(遼水)였다.

-사기 흉노전과 위략에 의하면 연나라 장군 진개는 B.C 281년에 기자조선을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동쪽으로 천여 리 패주시켰고, 연나라는 점령지에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다.

위 상곡군은 북경 서북쪽에, 어양군은 북경 동북쪽에, 우북평군은 북경 동쪽에, 요서군은 우북평군의 동쪽에, 요동군은 요서군의 동쪽에 각 설치되었는데, 진개의 공격 전에는 위 5군이 모두 조선 지역이었으므로, 진개의 공격 전 기자조선의 서변은 북경 부근에 있는 요수(遼水)였다.

B.C 281년 진개의 공격 후

「대부가 말하기를..중략..연국은 갈석에 의하여 막히고, 사곡에 의하여 끊겼으며, 요수에 의하여 둘러싸였다..중략..이것들이 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게 하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 大夫曰..燕塞碣石絶邪谷繞援遼...邦國之固而山川社稷之寶也」鹽鐵論 險固

「연국이 장수 진개를 보내어 조선의 서방을 쳐서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으로 국경을 삼았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魏略

위 문구는 진개의 공격 후 연나라의 변경에 대한 내용이다.

위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연나라는 갈석(碣石)에 의하여 막히었다고 적혀 있다. 이 "갈"은 크거나 길다는 뜻이고, 갈석은 긴 산줄기라는 뜻이다. 종래에는 갈석(碣石)을 특정 산으로 생각하였으나, 연나라의 북쪽 방어선인 갈석은 연장성 산줄기이지 특정 산이 아니다. 이 갈석은 지금의 만리장성 산줄기를 따라 조양(造陽:북경 북쪽)에서 양평(襄平:난하 바로 서쪽)까지 연장성(燕長城)을 쌓은 산줄기이다. 즉 연나라의 북변은 난하 서쪽 지금의 만리장성 산줄기를 따라 쌓은 연장성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연장성과 만리장성이 같은 줄로 착각하여 진개(秦開)의 공격 후 연나라가 쌓은 연장성이 산해관까지 뻗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연장성은 난하까지만 설치되었고 요동군도 난하 서쪽에 설치되었다.

-요수(遼水)에 의하여 둘러싸였다고 적혀 있다. 이 요수는 지금의 만리장성 산줄기를 끊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난하이다. 즉 난하는 연장성 동쪽 끝에 있었다.

-사곡(邪谷)에 의하여 끊기었다고 적혀 있다. 이 사곡은 난하가 지금의 만리장성 산줄기를 끊고 흐르면서 생긴 험한 계곡이다. 즉 사곡도 연장성 동쪽 끝에 있었다.

-진개가 만번한(滿番汗)까지 점령하였다고 적혀 있다. 진개의 공격 후 연나라의 동변은 난하이므로, 만번한은 난하 바로 서쪽에 있었다.

이를 정리하면 진개 공격 후 연나라의 변경은 북으로는 연장성(燕長城) 산줄기이고, 동으로는 사곡(邪谷)과 난하였다.

진개는 동으로 난하와 사곡(邪谷), 북으로 갈석(지금의 만리장성 산줄기)에 연장성(燕長城)만 쌓으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보고 난하까지만 점령한 후 조양(북경 북쪽)에서부터 양평(난하와 장성이 만나는 곳)까지 난하 서쪽 지금의 만리장성 산줄기에 연장성을 쌓았다.

진(秦)나라와 기자조선의 경계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 기존의 연장성(燕長城) 등을 보수하고 임조를 기점으로 하여 요동에 이르기 까지 1만여리에 달라는 장성을 쌓아 만리장성을 완성한 후부터 진나라와 기자조선의 경계는 만리장성이었다. 즉 진나라 때 기자조선의 서변(西邊)은 만리장성이었다.

한(漢) 나라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경계

「한나라가 일어나자 조선은 너무 멀고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漢興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史記 朝鮮傳

위 연(燕)나라는 한(漢)나라의 후국(侯國)이다. 한나라는 요동(遼東)의 옛 요새들을 수리하여 난하까지만 방어하였다. 따라서 한나라 때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서변은 난하였다.

 기자조선의 영역과 수도

                                                    

[기자조선의 서변은 원래 북경.상곡 방면이었으나, B.C 281년에 연나라 장군 진개에게 난하 서쪽 지역을 빼앗기고부터 난하가 기자조선의 서변이 되었다.

9. 기자조선의 역사

연나라와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사이에 일어난 싸움에서 번한(番汗)을 도와 연나라를 물리친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箕詡)는 B.C 323년에 왕검조선의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稱王)하였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왕을 칭한 나라는 후국(侯國)이 아니고 독립국이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등에 적혀 있는 기자조선의 역사를 살펴본다.

「보을(普乙) 단제 무술년(B.C 323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 허락을 청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戊戌年正月邑借箕詡以兵入宮自以番朝鮮王遣人請允제許之使堅備燕」桓檀古記 檀君世紀

「병오년(B.C 315년)에 기후가 죽고 아들 기욱(箕煜)이 즉위하였다. 箕詡薨丙午子箕煜立」桓檀古記 三汗 管境本紀 番韓世家

「보을(普乙) 단제 을축년(B.C 29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乙丑年韓介率須臾兵犯闕自立上將高列加起義擊破之」桓檀古記 檀君世紀

을축년에 한개가 수유(須臾)의 군대를 이끌고 장당경(藏唐京)을 공격한 일 때문에 왕검조선과 기자조선은 적대관계가 되었다. 이는 기자조선이 뒤에 연나라 장군 진개의 침략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신미년(B.C 290년) 기욱이 죽고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이 해 각 주, 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辛未子箕釋立是歲命州郡擧賢良一時被選者二百七十人」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기묘년(B.C 282년)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己卯番韓親耕于郊」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해모수(解慕漱) 단제 경진년(B.C 221년)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庚辰年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桓檀古記 北夫餘紀  [註 위 문구에는 진개의 침략 사실이 해모수 단제 경진년(B.C 221년)조에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1갑자 빠른 왕검조선의 고열가 단제 경진년(B.C 281년)에 일어난 사실이다. 그리고 만번한은 번한(番汗)이 수도로 사용한 곳으로 난하 바로 서쪽에 있었다.]

「경술년(B.C 251년) 기석이 죽고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다. 庚戌箕釋薨子箕潤立」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해모수(解慕漱) 단제 기사년(B.C 232년) 기윤이 죽고 아들 기비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재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데 기비 때문이다. (箕潤)薨己巳子箕丕立初箕丕與宗室解慕漱密有易璽之約勤贊佐命使解慕漱能握大權者惟箕丕其人也」桓檀古記 北夫餘紀

「임신년(B.C 229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 질하고 돌아갔다. 壬申年北漠尊長山只喀隆襲寧州殺巡使穆遠登大掠而去」桓檀古記 北夫餘紀

위 임신년조 사실은 사기 흉노전에는 B.C 209년경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와 약 20년 차이가 난다. 이때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북부 지방에 거주한 유목족(胡)은 시라무렌하 유역을 내몽고 지방의 흉노에게 빼앗기고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으로 이동해 갔고, 남은 무리들은 흉노에 복속하였다. 이때부터 기자조선의 영역은 발해연안 농어업 지역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경진년(B.C 221년) 기비가 죽고 아들 기준이 번조선 왕이 되었다. 箕丕薨庚辰子箕準立」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해모수(解慕漱) 단제 임진년(B.C 209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연, 제, 조 백성들 수만 명이 도망 오므로 상하장에서 살게 하고 장군을 보내 감독하였다. 壬辰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桓檀古記 北夫餘紀

「기해년(B.C 202년) 연나라의 노관이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패수로서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난하이다. 己亥年燕盧관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난河也」桓檀古記 北夫餘紀

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 위략(魏略) 등에 의하면 기준은 위만(衛滿)을 믿고 총애하였다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병오년(B.C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때 번조선 왕 기준이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중략..정미년 번조선왕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모두 풍요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丙午年燕盧관叛漢入匈奴其黨衛滿求亡於我帝不許然帝以病不能自斷番朝鮮王箕準多失機遂拜衛滿爲博士劃上下雲障而封之..中略..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不還」桓檀古記 北夫餘紀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인 위만도 망명을 하였는데, 호복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가서 항복하고 준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 지역에 거주할 곳을 구하면서 중국의 망명자들을 모아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기준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삼고 규(圭)를 하사하였으며, 1백 리의 땅을 봉지로 주고 서쪽 변경을 수비하도록 명령하였다. 위만은 망명인들을 모아 그 무리가 점차 많아지자 사람을 보내어 준에게 거짓으로 고하기를 한나라 군사가 열 길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사자가) 돌아오자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及관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魏略

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기준(箕準)은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월지(月支)로 이동하였다.

「정미(丁未) 원년 정미년 번조선왕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모두 풍요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일컬어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변.진 2한도 역시 각 자기들이 받은 땅 1백 리를 가지고 수도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亦名以其衆受封百里立都自號皆聽用馬韓政令世世不叛」桓檀古記 北夫餘紀

후한서(後漢書)에는 기자조선왕(箕子朝鮮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남은 무리 수천인과 같이 바다 길로 한지(韓地)로 이동하여 마한(馬韓)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패한 후 남은 무리 수천인과 같이 바다 길로 도망하여 (한지로 가서)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 후는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後漢書 韓傳  

 

기자의  생애  top

태조(太祖) 문성왕(文聖王) 기자(箕子)의 성은 子氏요. 諱는 수유(須臾) 또는 서여(胥餘)이시니 은(殷)의 14세왕 무을(武乙)의 차자(次子) 리(理)의 아들로 제을(帝乙)17년 병술년(丙戌) 경자월(庚子月) 계축일(癸丑日) 경신시(庚申時)에 탄강(誕降)하시었다. 은나라 17세왕 제신(帝辛=紂;주)를 섬겨 태사(太師)가 되셨고 자작(子爵)으로 기(箕)땅에 식읍(食邑)을 봉(封)하였으므로 기자(箕子)라 칭하였다. 주왕의 음탕(淫蕩)하고 포악(暴惡)함이 날로 심해지므로 기자께서는 힘써 간하였으나 주가 듣지 않고 도리어 가두고 노예로 삼았다. 버리고 가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으나 箕子께서는 신하된 도리에 군주의 횡폭을 간하다가 듣지 않는다하여 버리고 가는 것은 군주의 악행을 폭로하고 자기만 민중의 호감을 얻으려는 것이니 나는 차마 그럴 수 없다며 머리를 산발하고 거짓 광인이 되어 갖은 모욕을 다 받으며 거문고와 노래로 비애를 자위하고 계셨다. 箕子께서 54세 되시던 己卯년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왕을 토멸하고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箕子의 가둠을 풀어놓고 친히 은태사(殷太師) 箕子앞에 나아가 천도를 물으니 箕子께서는 대도가 장차 암혼(暗昏)할까 염려하사 홍범구주(洪範九疇 ; 西經의 홍범에 있는 禹가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가지 원칙)를 베풀어 무왕에게 전수하고 나는 의리상 周나라의 신복(臣僕)이 될수 없다 하여 동국 조선(東國朝鮮)으로 주입(走入)하시니 조선인사들이 箕子의 성덕에 열복하여 높이 받들어 王을 삼으니 도읍을 평양에 정하고 국호를 후조선이라 칭하였다. 국민에게 시,서,예,악(詩 書 禮 樂)을 교육하고 농사, 양잠, 직조(織造) 공작(工作)을 가르치며 팔조의 교법을 설정하니 온 국민이 태평가를 부르며 송덕하였다.

재위 40년 壽93세로 돌아가시니 릉은 평양성북 칠성문밖 왕행산(今 兎山) 자좌(子坐)이고 궁전유지는 정양문(正陽門)내에 있고 유적으로는 숭인전(崇仁殿), 인현서원(仁賢書院)과 기자지(箕子誌), 평양지(平壤誌), 한국서사, 삼국사기 등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영정은 성천 ( 成川) 백령산(百靈山)에 봉안되어 있다가 현재 전북 진안에 이안(移安)되어 있다.

 

殷太師 箕子 眞像의 奉安 top

平壤誌(평양지)에 이르기를  仁賢書院(인현서원)은 蒼光山(창광산) 西쪽 산기슭에 자리한  옛 神護寺(신호사)터에 있으니 殷太師(은태사)의 畵像(화상)을  奉安(봉안)한 곳이다.明宗19년(1564)甲子에 監司鄭宗榮(감사 정종영)이 學古堂(학고당)을 창건하였고  宣朝9년(1576)丙子에 監司金繼煇(김계휘)가  그 제도를 확대하고 洪範書院(홍범서원)으로 개칭하면서  箕子像(기자상)을 尊奉(존봉)할 계획이었으나 미처 성사치 못한채  선조 25년(1592)임진에 왜란으로 院舍(원사)가 불탔다.선조27년(1594)甲午에 監司 李元翼(이원익)이 院舍(원사)를  중건하여 書齊(서일제)로 개칭하였고 선조33년(1600)庚子에 監司 徐省(서성)이 曺孟俯(조맹부)가"箕子(기자)가 武王(무왕)에게 洪範(홍범)을 陳述(진술)하는 장면을 묘사한 圖像(도상)"을 中國 朝廷(중국 조정)에서 求得(구득)하여 院中(원중)에 寶藏(보장)하였다. 선조37년(1604)甲辰에 監司 金信元(김신원)이  敍倫堂(서윤당)과 東西齊(동서제)를 건립하고 4년후 戊申(무신)에 仁賢殿(인현전)의 賜額(사액:임금이 현판을 새겨 내림)을 받았으며 光海5년(1613)癸丑에 監司 鄭賜湖(정사호)가 仁賢殿(인현전)을 重建(중건)하였다.仁祖元年(1623)癸亥에 楊德祿(양덕록)이 箕子畵像(기자화상)을 奉安(봉안)하기를 요청함으로 4년후 丙寅(병인)에 畵師 李臣欽(화사 이신흠)에게 명하여 曺孟賻(조맹부)의 所畵遺像(소화유상)을 模寫(모사)하였으나 봉안하지 못한 채 다음해 정묘호란을 만나 眞本(진본)을 逸失(일실)하고 草本(초본)만이 보존되어 있었다.仁祖10년(1632)壬申에 監司 閔聖徽(민성휘)가 다시 이를 模寫(모사)하여 仁賢殿 敍倫堂(인현전 서륜당)에 봉안하고 弘範堂(홍범당)이라 개칭하였다.정묘호란에 逸失(일실)되었던 眞本(진본)이 僧 韓某(승 한모)씨의 收得(수득)이 되어 長淵 鶴接寺(장연 학접사)에 奉藏(봉장)하였다가 韓僧(한승)이 다시 流離(류의)하게 되자 또 유실될까 염려하여 韓連希(한연희)에게 信託(신탁)하였다. 連希(연희)는 자신이 箕聖(기성)의 後裔(후예)이므로 정성으로 寶藏(보장)하여 4世 孫 晋泰(진태)에까지 전래하다가 己亥(기해) 11월 20일 晋泰(진태)가 其函(기함)을 本院(본원)에 奉還(봉환)하니 본원에 봉안된 粹容(수용)과 모습이 毫末(호말)도 차이가 없는지라 櫃(궤)에 넣어 院中(원중)에 安置(안치)하였다가 申丑(신축) 10월 21일에  韓明后(한명후)등의 呈狀(정상)으로 인하여 成川(성천)의 黃龍山(황룡산)에 移安(이안)하게 되었던것이다.단기4253년(1920)庚申(경신)에 서울 慶雲洞 韓氏 宗約所(경운동 한씨 종약소)에 移安(이안)하였더니 宗約所(종약소)의 解散(해산)으로 인하여 다시 由緖(유서)가 깊은 故 馬韓(마한)의 領域(영역)인 鎭安郡(진안군) 顔川面(안천면) 軒韓里(헌한리) 仁賢洞(인현동) 文聖殿(문성전)에 移安(이안)하고 遠近(원근)士林(사림)과 後孫(후손)들이 每年(매년) 春秋(춘추)에 釋奠禮(석존례)를 行(행)한다.

 

箕子手筆 top

 

左愛民如子四字卽箕子遺筆也粤在英宗癸未馬韓故都金馬郡古寺壞塔中箕子後四十一代系錄及遺筆出焉鮮于氏其後裔也得之於土人弁于譜藏于家以爲寶有名鋴者善士也袖榻本以示蝌蚪古篆蒼然可愛余敬玩摩娑不忍釋于手久矣嗚呼洪範皇極之篇卽帝王治世之心法也箕子傳授武王及乎東來推其餘意愛民如子布八條之敎約以禮磨以義過化孟神迄于今二千有九百餘載此土之民慕之如父母愈徃而愈不忘然則今此四字奚但爲鮮于氏之寶也抑亦環東土爲牧民之官皆可以爲寶也豈敢以聖人微言以忽之也亟今刻揭宣堂之楣以爲常目警省之一助云爾

壬戌(단기4195, 서기1862) 仲夏上澣 按使 海平 尹致定 識

愛民如子(애민여자)라고 쓴 넉 자는 箕子(기자)의 遺筆(유필)이다. 英祖39년(1763)癸未에 馬韓(마한)의 舊都(구도) 金馬郡(금마군)에 있는 옛 절의 허물어진 塔(탑)中에서 箕子(기자) 後(후)의 41代 系錄(계록)과 遺筆(유필)이 出現(출현)된것을 그 후예가 되는 鮮于氏(선우씨)가 그 지방 인사로부터 구하여 家譜(가보)에 수록하고 家寶(가보)로 奉藏(봉장)하였더니 이름을 (극)이라 칭하는 선량한 人士(인사)가 있어그 사본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올챙이체로 된 옛날 전자가 古色(고색)이 역역하여 실로 가상한지라 내가 鄭重(정중)히 鑑賞(감상)하였는데 만져보고 문질러보고 차마 手中(수중)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嗚呼(오호)라 洪範(홍범)의 皇極篇(황극편)은 帝王(제왕)이 治世(치세)하는 心法(심법)이라 箕子(기자)께서 武王(무왕)에게 이 법을 전하여 주시고 朝鮮(조선)에 오시어 皇極(황극)의 意義(의의)를 推理(추리)해서 民生(민생)을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하시고 八條敎法(팔조교법)을 宣布(선포)하여 禮義(예의)로써 敎化(교화)하신 것이 지금까지 2900여년이 되었지만 이 나라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흠모하여 세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못잊어 하는지라 지금에 이 네 글자가 어찌 鮮于氏(선우씨)의 家寶만 될 것인가. 朝鮮 全國(조선 전국)의 牧民官(목민관)이 모두 다 珍寶(진보)로 삼아야 할 것이다.聖人(성인)의 微言(징언)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널리 알려서 刻字(각자)로하여 宣化堂(선화당) 문설주에 걸어두고 항상 눈 여겨 보고 자기의 所行(소행)을 警戒(경계)하는데 도움이 되게 일러둔다.

서기1862(임술)년 5월 상한 안사 해평인 윤치정

 

기자 묘비명 (箕子廟碑銘) top

宣德3年 戊申年(세종10年무신 1428)여름 4月 甲子일에 國王(국왕) 전하가 傳旨(전지)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周(주)나라 武(무)王이 殷(은)나라를 정벌해 이기고, 殷(은)나라의 太師(태사)를 우리나라에 封(봉)하여 그가 周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우리나라의 文物(문물)과 禮樂(예악)을 중국과 같이 비길 수 있음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0여년이 된다.이것은 오직 箕子(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돌아 보건데 그의 祠字(사우)는 좁고 누추하여 쳐다보며 구부리기에 알맞지 않다. 우리 父王(부왕)께서 일찍이 重修(중수)하기를 命(명)하였고 내가 그 뜻을 받들어 독려하였다. 이제 落成(낙성)을 告(고)하였으니, 마땅히 돌에 새겨서 오래도록 後世(후세)에 보여야겠다. 史臣은 그 글을 지으라"하셨다.臣 季良(계량)은 명을 받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臣이 그윽히 생각하니 孔子(공자)는 文王(문왕)과 箕子(기자)를 易經(역경) 明夷卦(명이괘)의 象辭(상사)에서 열거하였으며, 또 3인[微子(미자), 箕子(기자), 比子(비자)]으로 일컬었으니 箕子의 德(덕)은 너무 커서 칭찬할 수도 없다.
옛날 夏禹氏(하우씨)가 홍수와 토지를 다스리니 하늘이 洪範(홍범)을 내려주셔서 떳떳한 彛倫(도리)가 베풀어 졌다. 그러나 그 말은 일찍이 虞(우)나라나 夏(하)나라의 글에는 한번도 보이지 않았고 천여년이 지나고 箕子(기자)에 이르러 비로서 발설되었다.그 때에 箕子(기자)가 武王(무왕)을 위하여 진술하지 않았다면 洛書(낙서)의 하늘과 사람에 관계된 學文(학문)을 후인들이 어디에서 알겠는가. 箕子(기자)가 斯道(사도)에 有功(유공)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箕子(기자)는 武王(무왕)의 스승이다.武王(무왕)이 그를 다른 곳에 봉하지 않고 우리 조선에 봉하였으므로 조선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친히 箕子(기자)의 敎化(교화)를 받아 君子(군자)는 큰 道(도)의 요점을 얻어 들을 수 있고 백성들은 至治(지치)의 은택을 입을 수 있어서 그 교화는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하늘이 우리나라를 厚(후)하게 하여 어질고 착한 이를 주어 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음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井田(정전)의 제도와 八條(팔조)의 법이 밝히기가 해와 별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천년 뒤에도 그 당시에 있던 것과 같아서 楸然(추연)히 우러러 볼 때 저절로 사모함을 마지 못하는 바가 있다. 우리 恭定王(공정왕)께서는 총명하여 古事(고사)를 常考(상고)하고 經書(경서)와 史記(사기)를 즐겨 보았으며,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지혜롭고 어진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아서 洪範九疇(홍범구주)의 道(도)에 대하여 정신으로 會通(회통)하고 마음에 融合(융합)함이 있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恭定王(공정왕)은 시작하시고 우리 전하는 이어 닦아서 箕子(기자)에게 德(덕)을 높이고 功(공)을 보답하는 禮(예)를 이룬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실로 前代(전대)의 君王(군왕)들이 얻어 짝할 수  없는 바이다.
 卿士(경사)와 庶民(서민)들이 서로 이끌고 일어나서 이에 따르고 이를 행하여 하늘의 밝은 빛에 가까워 져서 그 펴주신 복에 참여함을 얻은 것이 의심이 없으니 아, 장하시도다.무릇 집을 지은 것이 약간 있고 거기에 소속된 田地(전지)를 두어서 瓷盛(나라의 大祭에 쓰는 기장과 피)을 제공하게 하고, 復戶(다른 노역을 면제해 주는 것)를 시켜 청소에 응하게 하였으며, 府尹(부윤)에게 명하여 享祠(향사)를 삼가 받들게 하였으니 廟宮(묘궁)의 일은 대체로 유감됨이 없다. 臣 季良(계량)은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며, 삼가 손을 들어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銘(명)을 올리도다.
"아, 箕子(기자)는 文王(문왕)의 무리로 하여서 아름다운 홍범이 上帝(상제) 훈계를 펼쳤네. 殷(은)나라 스승만이 아니라 진실로 武王(무왕)에게 스승이었네. 殷(은)나라는 그를 버려 멸망했고 周(주)나라는 그를 찾아 創盛(창성)하였네. 위대하다, 천하의 안전과 위태함이 그 몸에 매었는데 거두어 東(동)쪽으로 오셨음은 하늘이 우리를 偏愛(편애)함일세. 가르치고 다스림에 그 법은 여덟조목, 우매한 자 뉘 아니 밝아지며, 유(유는 陰,,즉 소인의 道)한 자 뉘 아니 剛(강은 陽, 즉 군자의 道)해 졌으랴. 길에서는 흘린 것을 줍지 않는다고 漢書(한서)에서 칭찬하고, 東夷(동이)로 하여금 中華(중화)같게 하였다고 唐(당)나라에 碑(비)가 서 있네. 열심히 힘쓰시는 우리 임금 끊긴 學文(학문)을 빛나게 이었네. 마음은 그 이치에 契合(계합)하고 몸으로는 그의 法을 실천하시네. 아버지 지으시고 아드님 이어시니 사당집 의젓하여 날아갈 듯 솟았네. 높다란 그 마루에 箕子(기자)의 神(신)을 奉安(봉안)하고 歲時(세시)로 享祀(향사) 올려 공경하고 치성하네. 아, 小臣(소신)은 끼친 글에 潛心(잠심)했더니, 이제 王命(왕명)을 받들고 머리 조아려 銘(명)을 쓰노니 盛大(성대)한 德(덕)이 광채로워 억만년 길이 빛나리" 하였다.

                                                         

卞季良  撰(변계량 지음)

 

 

箕子實記 top

 

箕子(기자)의 姓(성)은 子(자)요. 名(명)은 胥餘(서여) 또는 須臾(수유)라 하니 商(상=은)나라 宗室(종실)이시다. 天道(천도)에 투철한 學識(학식)과 聖道(성도)를 傳授(전수)하신 몸으로 畿內諸侯(기내제후)로서 太師(태사)가 되시었다. 帝乙(제을)의 嫡子(적자) 受(수=紂)가 口辯(구변)이 빠르고 輕薄(경박)하여 忠諫(충간)을 拒否(거부)하고 非理(비리)를 좋아하되 그의 庶(서)형 啓(계)는 조심성이 있고 孝道(효도)가 克盡(극진)하므로 箕子(기자)께서 紂(주)가 좋은 王材(왕재)가 못됨을 짐작하고 啓(계)는 長子(장자)이며 兼(겸)하여 賢良(현량)하므로 太子(태자)로 封(봉)하도록  帝乙(제을)에게 勸(권)하였으나 帝乙(제을)이 嫡子(적자)를 버릴 수 없다 하여 마침내 受(수)를 太子(태자)로 封하고 啓를 微子(미자)로 封하였다. 帝乙(제을)이 죽은후 受(수)가 卽位(즉위)하니 王號(왕호)를 紂(주)라 稱(칭)하다.王位(왕위)에 오르는 즉시 象牙(상아) 젓가락을 장만하는지라 箕子(기자) 탄식하며 이르기를 저 사람이 象牙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玉(옥)으로 술잔도 만들 것이요,각 지방에서 나오는 珍貴(진귀)한 寶物(보물)들을 進上(진상)토록 할 것이니 宮室(궁실)과 여러 器具(기구)의 사치가 지금부터 次次로 甚(심)할 것이로다 하시었다.紂(주)의 淫蕩(음탕)하고 暴惡(포악)함이 나날이 尤甚(우심)한지라 微子(미자)가 나라가 亡(망)할까 염려하여 箕子(기자)와 少師 比干(소사 비간)과 더불어 謨議(모의)하되 이제 殷(은)나라가 망하는 것이 大水(대수;큰물)가 터진 것과 같아서 막을 길이 없는지라  지금 우리가 如何(여하)한 指針(지침)도 없고 未久(미구)에 정복될 것이 짐작되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다.箕子(기자)께서는 商(상)나라에 이제 큰 災難(재난)이 있으니 나는 受(수=紂)와 같이 敗亡(패망)할 것이요, 商(상)이 滅亡(멸망)하더라도 나는 倫理(윤리)를 지키며 王子(왕자)를 깨우쳐 타일러서 引導(인도)하고 왕자를 害(해)쳐서 떨어 버리면 나도 따라서 같이 죽을 것이나 計策(계책)을 모색하여 事物(사물)을 處理(처리)하면 國民(국민)들도 先王(선왕)께 몸 바쳐 따르리라.나는 逃避(도피)하기를 願(원)치아니한다 하시었다.微子(미자)는 이리하여 가 버리고 箕子(기자)는 紂(주)를 諫(간)하였으나 紂가 듣지 않고 箕子(기자)를 가두고 종을 삼으니 或(혹)은 버리고 가는 것이 可(가)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나 箕子께서는 臣下(신하)된 道理(도리)에 諫(간)하다가 듣지 아니한다고 가면 이것은 王의 惡行(악행)을 暴露(폭로)하고 자기만이 國民(국민)의 好意(호의)를 얻으려는 것이니 나는 못할 짓이다 하시고 머리를 풀어 散髮(산발)하고 狂人(광인)으로 假裝(가장)하여 갖은 侮辱(모욕)을 다 받아가며 거문고와 노래로 悲哀(비애)를 自慰(자위)하였다.比干(비간)은 계속하여 諫(간)하다가 紂에게 被殺(피살)되었다.
周武王(주무왕)이 商(상=은)을 討滅(토멸)하고 召公 奭(소공 석)에게 下命(하명)하여 箕子의 가둠을 풀어 놓은 후 왕이 親(친)히 箕子를 찾아보고 謙虛(겸허)한 마음으로  내가 紂(주)를 죽인 것이 可(가)한 일인가 不可(불가)한 일인가 殷(은)나라의 亡(망)한 所以(소이)를 묻는데 箕子(기자)는 차마 답변하지 못하였다. 王은 다시 天道(천도)에 對(대)하여 물었다.箕子(기자)여,하나님이 은연중에 人民(인민)에게 禍福(화복)을 내려 주심으로 그 理氣(이기)에 感應(감응)하여 사는 것인데 나는 그 倫理(윤리)의 차례를 알지 못하겠노라. 箕子께서 이에 말씀하시되 옛날 곤(禹王의 父)이 견(地名)에 洪水(홍수)가 났을 때 五行法(오행법)을 함부로 늘어 놓았더니 上帝(상제) 크게 怒(노)하사 洪範九疇(홍범구주)를 주지 않으시니 倫理(윤리)가 頹廢(퇴폐)한 所致(소치)라. 곤을 罪주어 죽게 하였고 禹王(우왕)이 代(대)를 이으니 上帝(상제) 이제서야 禹王(우왕)에게 洪範九疇(홍범구주)를 주시니 이는 倫理(윤리)의 定(정)한 바 질서이다.이리하여 洪範(홍범)을 벌리게 되었으니 그 大目(대목)이 一曰五行(일왈오행)이요,二曰敬用五事(이왈경용오사)요, 三曰農用八政(삼왈농용팔정)이요,四曰協用五紀(사왈협용오기)요, 五曰建用皇極(오왈건용황극) 이요, 六曰乂用三德(육왈예용삼덕)이요, 七曰明用稽疑(칠왈명용계의)요, 八曰念用庶徵(팔왈염용서징)이요, 九曰嚮用五福(구왈향용오복)하고 威用六極(위용육극)이라. 그중에서 皇極(황극)이라는 것은 편벽되지 않고 막히는 데가 없이 王의 義理(의리)를 쫓아야 하고 좋은 일을 하여서 王의 道里(도리)를 쫓아야 하며, 惡(악)한 일을 없이 하여 王의 갈 길을 쫓아야 하나니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으면 王道(왕도)가 평탄할 것이요,反覆(반패)하거나 側傾(칙경)하는 일이 없으면 王道가 正直(정직)한 것이라 모든 事物(사물)은 그 運用(운용)하는데 있어 至極(지극)히 미묘한 곳이 있는 法이라 하였다.箕子가 武王(무왕)을 爲(위)하여 道(도)를 傳(전)하고 벼슬하기를 不願(불원)하시니 武王 역시 强勸(강권)하지 못하였다.
箕子- 中國(중국)을 避(피)하여 朝鮮(조선)에 들어 오시니 中國人(중국인) 中 따르는 者가 五千(오천)이라. 詩書禮樂(시서예악) 陰陽卜筮(음양복서)의 流(류)와 技術 藝術(기술, 예술)등 百工(백공)이 모두 따라왔다.처음에는 言語(언어)가 不通(불통)하여 通譯(통역)으로 意思(의사)를 相通(상통)하고 民衆(민중)에게 禮義(예의)와 農事 養蠶 織造(농사, 양잠, 직조)를 가르치고 井田制度(정전제도)를 劃策(획책)하였다.八條禁法(팔조금법)도 設定(설정)하시니 大略(대략) 殺人者(살인자)는 生命(생명)으로 報償(보상)하고 傷害罪(상해죄)는 穀物(곡물)로 報償(보상)하고 盜賊(도적)은 잡아서 종으로 賤役(천역)을 치르게 하였다. 自進(자진)하여 속죄하는 者가 五十萬이요, 혹은 容恕(용서)받은 사람이라도 이웃이 羞恥(수치)하여 시집 가고 장가 드는데 데릴감이 없게 되었고 도적이 없으니 문단속의 필요가 없게 되고 부인들은 모두 貞淑(정숙)하여지고 田野(전야)와 都市(도시)를 開拓(개척)하고 음식에는 변豆(콩)를 쓸줄 알고 儒敎(유교)를 信仰(싱앙)하여 中國(중국)의 風習(풍습)을 따르게 되었다.戰爭(전쟁)을 숭상하지 않고 德化(덕화)로써 强暴(강폭)한자를 悅福(열복)케하니 이웃나라가 그 義로움에 感化(감화)되어 歸屬(귀속)하였으며 文物(문물)이 中國과 同一하였다.그 후에 箕子(기자)께서 周(주)나라에 가서 殷(은=商)나라 옛터를 지나다가 궁전이 없어지고 五穀(오곡)이 무성한 것을 보고 상심하여 麥秀歌(맥수가)를 지어 읊었다.<보리가 잘 자랐네 기장도 무성하구나. 저 교활한 아이 紂(주)여 나와 더불어 좋지 못한 사이었네>(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殷(은)나라 國民(국민)들이 이 노래를 듣고 모두 울었다 한다.
朝鮮(조선)이 仁賢(인현)의 德化(덕화)를 받아서 詩書(시서)와 禮樂(예악)의 國家(국가)가 되어 朝野(조야)가 無事(무사)하고 人民(인민)이 喜悅(희열)에 넘쳐서 大同江(대동강)을 黃河(황하)에 비유하여 頌德歌(송덕가)를 지어 불렀다.箕子(기자)께서 薨(훙)하시니 子孫(자손)이 代(대)를 이어 君王(군왕)이 되었다. 周(주)나라 末葉(말엽)에 燕伯(연백)이 自稱(자칭) 王이 되어 朝鮮(조선)을 侵攻(침공)하려고 하므로 王이 燕(연)나라를 討伐(토벌)하고 周(주)나라를 도우려 한 즉 大夫(대부)禮(예)가 諫(간)하여 中止(중지)하고 禮(예)를 燕나라에 보내 어 說得(설득)시켜서 侵略(침략)을 中止(중지)케 하였다.
朝鮮候(조선후)의 子孫(자손)들이 점차로 교만하고 暴惡(포악)하여지니 燕(연)나라가 西方一千餘里(서방 일천여리)를 略奪(약탈) 湖(호), 潘(반), 汗(한)까지 들어와서 國界(국계)를 삼으니 우리 國勢(국세)가 점점 약해졌다.秦(진)나라가 天下(천하)를 統一(통일)하고 遼東(요동)에 이르기까지 萬里長城(만리장성)을 構築(구축)하니 朝鮮王否(조선왕부)가 秦(진)의 威力(위력)에 눌려서 腹屬(복속)하고 말았다.否王(부왕)이 薨(훙)하고 아들 準(준)이 王位(왕위)에 오른지 十年에 秦(진)이 燕(연), 濟(제),趙(조)를 討滅(토멸)하니 亡命(망명)하여 入國(입국)하는 者가 많음으로 朝鮮(조선)은 燕(연)나라와 浿水(패수)로써 國界(국계)를 삼았다.燕王(연왕) 盧琯(노관)이 叛(반)하여 凶奴(흉노)에 들어가므로 그 臣下(신하)였던 衛滿(위만)이 千餘軍卒(천여군졸)을 거느리고 浿水(패수)를 건너와서 西部(서부)에 接住(접주)하면서 潘(반)의 侵入(칩입)을 防備(방비)하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請(청)하므로 準王(준왕)이 이것을 믿고 博士(박사)의 職位(직위)와 玉(옥)으로 만든 忽(홀)을 下賜(하사)하고 百里(백리) 땅을 封(봉)하여 주면서 西部邊城(서부변성)을 지키게 하였다.滿(만)이 亡命軍卒(망명군졸)을 誘致(유치)하여 形勢(형세)가 旺盛(왕성)해지니 王準(왕준)에게 "漢兵(한병)이 大擧(대거) 侵來(침래)하니 自己(자기)가 近衛隊(근위대)로서 王宮(왕궁)을 守護(수호)하겠다"고 詐稱(사칭)하고 王準을 反擊(반격)하였다.準王이 戰敗(전패)하여 海路(해로)를 利用(이용)하여 남쪽으로 달아나고 朝鮮(조선)은 衛滿(위만)의 領有(영유)가 되고 말았으니 箕子以後(기자이후) 41대 928년만에 나라를 잃었다.
箕準(기준;準王)은 쫓겨날때 左右宮人(좌우궁인)을 引率(인솔)하고 韓나라땅 金馬郡(금마군)에 와서 馬韓王(마한왕)이 되고 50여 大小國(대소국)을 統合(통합)하여 여러 代를 繼承(계승)하여 王位(왕위)를 傳하였다. 그후 新羅(신라), 高句麗(고구려), 百濟(백제) 三國이 점점 커지면서 馬韓(마한)이 衰退(쇠퇴)하니 百濟(백제) 始朝(시조) 溫祚王(온조왕)26年에 馬韓을 습격하여 合倂(합병)하니  箕氏가 馬韓(마한)의 王統(왕통)을 가진 것이 200년으로서 前後 王統(전후 왕통)이 1120餘年이었다.贊(찬)하여 曰(왈)

 

아아, 殷太師(은태사)여, 暗君時代(암군시대) 태어나서
內外卦(내외괘)의 運氣(운기)따라 行事(행사)마다 義(의)로웠네
거문고를 타는 뜻을 하느님은 알리로다
내 나라가 亡(망)했거늘 내 갈 곳은 어디런가
蒼姬(창희)에게 法(법)을주고 靑璣(푸른구슬)에 몸을 담아
새 나라를 創建(창건)하고 樂浪(낙랑)땅에 都邑(도읍)했네
아침나라 긴긴밤에 햇님 별님 밝게 비쳐
八條禁法(팔조금법) 設定(설정)하고 禮義敎化(예의교화) 밝혔도다
大同江(대동강)과 太白山(태백산)에 瑞氣(서기)마저 영롱하니
子子孫孫(자자손손) 繼承(계승)하여 千歲萬歲(천세만세) 萬萬歲(만만세)라
끊임없이 이어오니 우리聖祖(성조) 蔭德(음덕)일세
어진 님을 받드는 뜻 永遠(영원)토록 傳(전)하소서

 

내 짐짓 按察(안찰)하여 보건대 하늘이 人生(인생)을 創調(창조)할 때에 반드시 聖人(성인)을 보내서 이를 主導(주도)케 하여 바른 길로 돕고 길러서 社會文化(사회문화)를 밝혀 그 生活(생활)을 遂行(수행)케 하고 그 교본을 세우는 것이다.伏羲氏(복희씨)로부터 三王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聖人으로서 天義(천의)를 대신하여 社會文物(사회문물)의 길을 열어 놓았다.太古(태고)적 우리나라에 民生(민생)이 생긴 것이 中國(중국)보다 뒤늦지 않으리라고 상상되는데  슬기로운 哲人(철인)이 나와서 君師(군사)의 責務(책무)를 다한 바 있다고 들은 일도 없고 檀君(단군)께서 처음 납신 聖祖(성조)라고 稱(칭)하나 정확한 문헌이 없으므로 참고 할 수도 없는 터이다.오직 箕子(기자)께서 朝鮮에 君臨(군림)하사 이 百姓(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養育(양육)하고 勤實(근실)하게 敎導(교도)해서 中國 文明에 뒤지지 않는 國家로 成長케 하셨으니 우리가 오늘날까지 그 은혜를 받아서 禮樂(예악)의 風習(풍습)이 끊임이 없는지라 孔子(공자)께서 바다를 건너서 朝鮮(조선)땅에 살고 싶은 뜻을 말씀하신바 있다 하니 聖君을 만나지 못한 恨(한)이 얼마나 컸던가 짐작된다.아, 위대하시다. 箕子이시여, 旣往(기왕)에 武王(무왕)에게 洪範(홍범)을 傳授(전수)하여 道敎(도교)를 中國에 밝히고 그 여세를 몰아 朝鮮을 敎化(교화)하니 그 遺澤(유택)이 子子孫孫(자자손손) 千餘年間(천여년간)을 後代君王(후대군왕)들이 日月같이 敬慕(경모)하며 弘德(홍덕)을 崇仰(숭앙)하고 功勳(공훈)에 報答(보답)하려는 그 法式(법식)이 갈수록 더욱 굳건하니 진실로 大聖(대성)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아, 거룩하시다. 齊(제)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 名宰相(명재상) 管中(관중)이나 晏瓔(안영) 만을 알 뿐이니 우물에 앉아 하늘보는 格(격)이다.孔子(공자)의 弟子(제자)들은 孔子(공자)의 말씀이나 되풀이하고 程朱學徒(정주학도)들은 程子(정자)나 朱子(주자)의 遺敎(유교)만을 偏傳(편전)하는 것도 事理(사리)에 當然(당연)한 바이다.
  우리나라가 箕子(기자)의 罔極(망극)한 恩惠(은혜)를 받았으니 집집마다 사람마다 익히 알아야 당연하거늘 지금 士友(사우)들이 倉卒間(창졸간)에 箕子(기자)의 事跡(사적)을 물으면 能熟(능숙)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것은 기록된 文獻(문헌)이 어수선하게 흩어져서 일일이 찾아 익히지 못한 까닭이다. 尹公斗壽(윤두수)가 지난날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유림들이 箕子(기자)의 사적을 請問(청문)하는 자가 다수였는데 能熟(능숙)하게 답변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귀국한 후에 廣範圍(광범위)하게 經典(경전)과 史書(사서) 等 書籍(서적)을 探考(탐고)하여 사실과 논지를 수집하고 詩人(시인)들의 歌辭(가사)나 傳說(전설)등을 모아서 編輯(편집)하니 이것이 箕子志(기자지)이다.그 功(공)이 크고 後學(후학)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고 본다.그러나 散漫(산만)하게 각 經典(경전)과 傳記(전기)에서 雜編(잡편)된바 있으므로 系統(계통)을 따져 보기에는 不便(불편)한 점이 많아서 珥(율곡)가 분수에 넘친 일임을 불구하고 志中(지중)의 기록에서 拔取(발췌)하여 日篇(일편)을 엮고 箕子(기자)의 建國(건국)하신 始終(시종)과 世系(세계) 歷年(역년)등을 略述(약술)하여 箕子實記(기자실기)라 이름하였으니 後人(후인)들의 觀覽(관람)에 便益(편익)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숭인전(崇仁殿-기자묘실)  top

소재지 : 평양시 중구 종로동   숭인전(崇仁殿)은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를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 지내는 전각으로 평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1325년(충숙왕 12)에 창건한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과 6.25한국전쟁때 피해를 입었으나 보수되었고 현 숭인전은 1977년에 숭령전 옆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전면 12.9m, 측면 8.72m에 안팍 3포(三包)의 포식두공(包式枓공)을 얹고 겹처마·합각지붕에 모로단청(毛老丹靑)한 건물이다. 기단은 화강석 댓돌을 쌓았고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전면의 가운데칸을 좌우의 측면칸보다 넓게 하였다. 네모서리의 기둥은 가운데 기둥보다 8cm 안쪽 대각선 방향으로 기울게 하였다. 양옆의 기둥은 차츰 높여 가운데 기둥보다 12cm나 높아 기둥위에 얹은 액방(額枋)의 양골이 살짝 들렸다. 이것은 기울어져 보이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한 방법으로 건물전체의 균형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서까래와 덧서까래 추녀와 덧추녀들이 정연하고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지붕 네모서리에는 부채살을 펴놓은 듯 부채살 서까래 12개를 아름답게 대었다. 지붕용마루와 지붕면들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고려시대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점에서 건축사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箕子 遺蹟 文獻 top

箕子操(기자의 탄식)

슬프도다!
슬프도다! 紂(주)가 무고하여 比干(비간)을 죽였도다.
슬프고 또 슬퍼라. 나 홀로 어이 할꼬 全身(전신)에 옻칠하여 문둥이로 변신하고 머리풀어 산발하여광인으로 가장하니 지금의 이 종묘를 뉘라서 받들손가?
하느님도 야속하오 돌을 지고 깊은 물에 풍덩 빠져나 볼까나 슬프고 슬프도다. 이 사직을 어이 할꼬.

麥秀歌(맥수가)

箕子宮殿(기자궁전)

  箕子宮殿(기자궁전)은 正陽門下(정양문하)요. 旗子井(기자정) 北쪽에 있으니 英祖元年乙巳(영조원년 1725년을사 )에 監司 李廷濟(감사 이정제)가 朝廷(조정)에 狀啓(상계)하여 담을 쌓고 中央(중앙)에 九疇壇(구주단)을 신축하고 南으로 八敎門(팔교문)을 설치하였으며 단의 서쪽에 記蹟碑(기적비)를 건립하였다.

箕子井(기자정) top

  箕子井(기자정)은 箕子宮殿(기자궁전) 남쪽에 있으며 水味(수미)가 淸精(청정)하기로 유명하다. 宣祖 9년丙子(선조9년1576 병자)에 監司 朴來亮(감사 박래량)이 井閣(정각)을 세웠다.

箕子墓(기자묘)

箕子의 墓(묘)는 平壤 七星門(평양 칠성문)外 王荇山(왕행산=兎山)의 子座(자좌)이니 壬辰倭亂(임진왜란1592) 때에 왜적이 비석을 粉碎 折斷(분쇄절단)하고 墓域(묘역) 일부를 犯掘(범굴)하였는데 왜란이 끝난 후에 墓域(묘역)을 改封(개봉)하고 새 비석에 石峰(석봉) 韓濩(한호)가 글을 써서 舊處(구처)에 건립하고 鐵索(철색)으로 穿孔(천공)하여 新碑(신비) 후면에 付著(부저)하였다.

其他 箕子의 遺跡과 文獻

  당시의 토지제도로서 田자모형으로 구획된 箕子井田(기자정전)의 유적이 含毬(함구) 正陽(정양) 두 문사이에 분명히 남아있고 유구한 세월이 지났으므로 修築(수축)한 바 있을 것이나 당초에는 기자의 所築(소축)으로 전하여 오는 성곽등 평양성내외에는 상당수의 유적이있고  月沙(월사) 李廷龜(이정구) 撰(찬) 崇仁展碑文(숭인전비문), 四佳(사가) 徐居正(서거정) 撰 箕子廟賦(기자묘부)를 비롯하여 평양지,기자지등의 다수 문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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