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56_next.gif              上世譜1-1      quartz_red.gif세계도 보기

1세

 

 

 

 

 

 

 

 

 

 

 

 

 

 

 

 

 

 

 

 

 

 

 

 

 

 

 

 

2세

 

 

 

 

 

 

 

 

 

 

 

 

 

 

 

 

 

 

 

 

 

 

 

 

 

 

 

 

3세

尙休

 

 

 

 

 

 

 

 

 

 

 

 

 

 

상휴

 

 

 

 

 

 

 

 

 

 

 

 

 

 

4세


 

 

 

 

 

 

 

 

 

 

 

 

 

 

 

 

 

 

 

 

 

 

 

 

 

 

 

 

5세

希愈

 

 

 

 

 

 

 

 

 

 

 

 

 

 

희유

 

 

 

 

 

 

 

 

 

 

 

 

 

 

6세

光胤

 

 

 

 

 

 

 

 

 

 

 

 

 

 

광윤

 

 

 

 

 

 

 

 

 

 

 

 

 

 

7세


 

 

 

 

 

 

 


 

 

 


李舒

 

 

 

 

 

 

 

 

 

 

 

이서

 

8세

謝奇

謝譜

謝壽

守延

趙瑞

張碩

奇廷瑞

林卿 

藺卿

季卿

尹萬庇


 

 

사기

사보

사수

수연

조서

장석

기정서

안전

임경

란경

계경

윤만비

 

 

s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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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世 穎(영)

용호군(龍虎軍) 교위(校尉)
고려관제(高麗官制)의 서반(西班)에는 응양(鷹揚), 용호(龍虎)의 二軍이 있음.
1985년10월에 태위공묘소역내 동측 기슭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3世 尙休(상휴)

별장동정(別將同正) 고려관호는 당나라의 제도를 본뜬 것이 많으며(高麗官號多襲唐之官制)
당나라에서 설치한 동정원은(唐置同正員) 내외의 여러직책을  겸직하였음(內外職皆兼).
1985년10월에 태위공묘소역내 동측 기슭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4世 奕(혁)

상의직장(尙衣直長) 증금자광록대부(贈金紫光祿大夫) 특진상서성좌복야(特進尙書省左僕射)를 지냄. 
1985년10월에 태위공묘소역내 동측 기슭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5世 希愈(희유) cybernation_back.gif

검교신호위(檢校神虎衛) 상장군(上將軍) 행의장부별장(行儀杖府別將=정7품)
고려관제의 서반(西班)에는 좌,우신호위(左,右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 등 6위를 두었으며
각 위에는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의 직을 두었다.
1985년10월에 태위공 묘소 역내 동측 기슭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6世 光胤(광윤) cybernation_back.gif

예빈경 휘 광윤 유사

입비전말

행적과 묘소

추명

표석중수기

추원재기(원문)

묘비명(원문)

추원재기(역문)

묘비명(역문)

추원재와 묘소(사진)

유사 예빈경 광윤

과거에 급제하여(登第) 조정대부(朝正大夫) 예빈경을 지냈으며(行禮賓卿)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에 추봉(追封)됨
배위는 통의군부인(通儀郡夫人) 나주진씨(羅州陳氏)이며, 호장(戶長)
부친은 각(慤) 이거나 의(懿)이며 옛이름은 세장(世長)이다.
 묘소는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 지장산(支莊山) 아래 신사동(薪寺洞)에 임좌(壬坐) 합조(合兆)이다. 오랫동안 실호되어(屢世失護) 오(吳),강(姜),김(金)씨등의 민간인들이(三姓民間人) 모점(冒點)하였던 것을, 영조17년 辛酉(1741)에 후손 세구(世龜,希孟,日周,重彦)등이 묘갈을 찾아 확인하고(尋得墓碣) 이듬해(翌年壬戌=1742) 종중에서 철증(喆增)을 유사로 삼아 관에 송사를 제기하여 승소하였고 묘소를 개봉축하고 제전을 마련하였으며(改封築置祭田), 1744년 甲子에는 집의(執義) 원진(元震)이 비명을 지었으며(撰碣銘), 1746년 丙寅에는 계진(啓震)이 영광군수로 와서 이와 같은 내력을 표석에 기록하여 세우고(宰本郡立碣而託基事), 1750년 庚午에는 후손 익모(翼慕)가 도백(道伯)으로 부임하여 재실을 세웠다(建齋閣). 丁未에는 후손 광근(光近)이 군수로 부임하여 재실을 개축하고 추원재기를 지었다(修潤茨而撰追遠齋記). 또 癸亥年에는 후손 용구(用龜)가 도백이 되어 화수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내여 제전을 늘리고(祗謁宗會遂出百金增置祭田次韻記事), 1941년 辛巳에는 원진이 찬한 비문을 序로 하고 참판 긍호가 銘을 추가하여 묘소입구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958년 戊戌에는 종종(宗中)에서 재실(齋閣)을 중건(重建)하였다. 공을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청주의 인물로 기록하였다. 세일제(歲一祭)는 매년 음력 3월 초 하룻날에 행한다.

禮賓卿公(諱 光胤)의 行蹟과 墓所   예빈경 광윤

府君은 高麗(고려) 毅宗(재위1147-1170)朝에 과거에 급제하셔서 朝正大夫 禮賓卿(조정대부 예빈경)을 역임하시고 元(원)나라에서 "金紫光祿大夫守司空左僕射(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를 贈職(증직)받으셨다.墓所(묘소)는 全南 靈光郡 法聖面 新庄里 支藏山下 薪寺洞 壬坐丙向인 바 중간에 失護(실호)되어 오랫동안 吳,姜,金등 민간인들이 冒占(모점)하고 있었다.英祖17년辛酉(1741)에 후손 世龜(세구), 希孟(희맹),日周(일주), 衆彦(중언)등이 묘소를 찾아 내여 墓碑(묘비)에 "朝正大夫行禮賓卿韓光胤之墓(조정대부행예빈경한광윤지묘)" 라는 13字와 뒷면에 羅州陣氏 外子某 官某等等(나주진씨 외자모 관모등등...)의 문자가 확인되므로 다음해인 壬戌年(1742)에 관가에 제소하여 승소판결을 받은후 묘소를 개봉축하고 위토를 마련하였으며 후손 全羅觀察使로 재임한 翼暮가 齋閣을 창건하고 위토를 增置하였다. 후손 桂震(계진)은 본군군수로 와서 표석을 세웠고 후손 用龜(용구)는 전라순찰사로 와서 성묘하고 제수를 더욱 풍성하게 조력하고 花樹會(화수회)를 설립하여 종친간의 우의를 돈독하도록 한 바 있다. 

表石重竪記(표석중수기)

惟我先祖衣冠之藏久失其處崇禎再辛酉南中諸宗人尋得而碑面字劃多缺丙寅七月日後孫啓震以郡宰竪新碑于墓左舊碣不敢動焉

우리 선조의 묘소가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었더니 영조17년(1741)에 호남 지방의 여러 종인들이 처음으로 찾았으나 비면의 자획이 닳아 없어진 곳이 많았다. 영조22년 丙寅(1746) 7월에 후손 계진(啓震)이 군수로 와서, 새로 비를 묘소 좌측에 건립하고 구비(舊碑)는 원형대로 보존키로 하였다. 

禮賓卿府君(諱光胤) 墓碑銘  예빈경 광윤

宗人韓琦命玄喆增馳書於元震曰先祖禮賓卿府君衣履之藏世代旣遠不知其處久爲子孫羞湖南之靈光郡西陳良面支藏山下薪寺洞有一古墓自古傳以爲韓政丞墓辛酉秋湖男宗人德潤重彦希孟世龜宗聖希秀日周往審之墓前有短碣歲久苔蝕字不可辨用沙水磨洗乃見朝正大夫行禮賓卿韓光胤之墓十三字又有陰記六行剗缺尤甚而石裔土沒處尙有羅州陳氏及子某某若干字官銜姓諱配位子名一如譜牒所載府君仕於松京歿藏南土當時事無可徵墓傍居民傳說政丞公謫居于此歿仍藏焉理或然也而鄕俗例稱宰相爲政丞故云然湖南諸宗遣一宗人賚印碣一本來告京裏諸宗壬戌春宗中以喆增定有司往幹修改禁護之事時則郡守亦爲先祖外裔遂以官力改封墓修歲事南中諸宗人又出錢財庀祭田又訟于官掘去十餘民塚冒葬者墳墓失護不知其幾百年今忽得之重修塋域瞻掃有所其爲子孫之幸何如也舊碣剝落己甚後不幾年恐復堙沒而無徵及今宜更竪石以表之墳墓訪得之由亦不可無識撰述之役子其任之元震得書而跪讀感歎之久遂次其語以爲文仍竊帷念有功德在人者其墓必傳始祖太尉公墓亦甞失其處 肅廟己巳復求得之歲脩香火豈非功德之報耶禮賓府君事跡遠不可攷然以其基之旣晦而復顯可徵其功德之在人也天長地久興廢無常又安知旣顯而復晦也石於是乎不可不竪而故則新之又有俟於無窮云爾

崇禎再甲子仲冬日           十七代孫  元震  撰

예빈경(禮賓卿=諱광윤) 묘비명 예빈경 광윤

宗人 한기(韓琦), 명현(命玄),철증(喆增)이 나 원진(元震)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사연인즉 선조 예빈경 부군(禮賓卿 府君)의 산소가  세대가 오래되어 그 소재를 알 길이 없어 언제나 자손들의 수치가 되었던 바 호남 영광군 진량면(陳良面=현재 법성면) 지장산(支藏山)아래 신사동(薪寺洞)에 한 고총이 있으되 옛날부터 한정승 묘라고 전하여 왔다.辛酉年(英祖 17年1741) 가을에 호남 사는 종인 덕윤(德潤), 중언(重彦), 희맹(希孟), 세구(世龜), 종성(宗聖),희수(希秀), 일주(日周)가 가서 찾아본 즉 산소에 비석이 있는데 이끼가 끼여 문자를 알아볼 수가 없다. 모래로 닦고 물로 씻어보니 "朝正大夫行禮賓卿韓光胤之墓(조정대부행예빈경한광윤지묘)"라는 13자가 써 있고 또 후면에 陰刻된 글자가 있으되 刻字가 심하게 마모되어있고 돌 끝 부분이 흙에 묻힌 곳에 羅州陳氏(나주진씨)와 子某某(자모모)라는 약간의 글자와 官職名 姓 諱 配位 子某(관직명 성 휘 배위 자모)라는 문자가 한결 같이 보첩(譜牒)의 기록과 부합되었다. 府君께서 개경에서 관직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호남에 묘소를 모시게 되었으니 그 당시의 일은 고증할 도리가 없다.그러나 墓 아래에 사는 주민들의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정승이 이곳에 귀양당하여 오셨다가 下世하시므로 이곳에 장례를 모시게 된 것이라 하니 事理가 그럴 듯한 일이요,시골에서는 宰相을 통칭 정승이라고 하는 예도 있다.호남 여러 종인들이 사람을 보내 묘갈(墓碣)의 印本을 한 장 가지고 와서 서울 사는 여러 宗中에 통보하였다. 다음해 임술년 봄에 喆增을 유사(有司)로 정하여 묘소의 개수와 수호책(修護策)에 관한 일을 主幹토록 하였는데 때 마침 그 곳 군수가 선조의 후예되는 사람이어서 官力으로 묘소를 개봉축하고 歲事를 수행하게 되었고 또 호남 宗人들이 금전을 거두어 祭田을 마련하였으며 관에 제소하여 모장(冒葬)한 10여기의 민간 묘를 굴거(掘去)하였다.묘소를 실호한 지가 몇 백년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거니와 이제 갑자기 묘역을 重修하여 조상의 게신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니 자손된 도리에 다행하기 이를 데 없는 바이다. 옛비석의 글은 부서지고 떨어짐이 극심하여 불과 수년 내에 또다시 인몰할 우려가 있으니 이제는 표석을 세워야 하고 분묘를 찾은 事由도 기록하여 밝혀두어야 할 것인즉 碑文을 쓰는 일은 그대가 책임지라 하여 나는 이 서신을 받고 꿇어앉아 감격한 끝에 그 서신의 적은 사연대로 이 글을 썼다. 곰곰히 생각 하건데 크게 공덕이 있는 사람은 그 墓所가 반드시 傳하는 法이다. 始祖 太尉公 묘소도 한때 실전되었으나 肅宗 己巳年에 다시 찾아서 향화를 받들 게 되었으니 이 어찌 공덕의 餘光이라 아니할 수 있는가.禮賓卿 府君의 사적은 年代가 멀어서 소상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다시 심득(尋得)한 사실만으로도 그 공덕이 위대하심을 가히 알 만하다. 유구한 세월 속에 흥폐(興廢)가 무상한데 이제 찾았으니 또다시 실호되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터라 이 돌을 반드시 세워야하고 오래되면 또 새 것으로 바꾸어 영원히 이어가기를 바란다.

영조20년 甲子(1744)11월 일  17대손  원진(元震)  지음 

예빈경공 입비전말

이 묘비는 영조17년 辛酉(1741)에 실호(失護) 중이던 예빈경부군(禮賓卿府君)의 묘소를 찾고 난 뒤 3년후 甲子(1744)에 남당(南塘) 원진(元辰)이 이 비문을 찬술(撰述)하였으나 그 당시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다시 2년 후인 丙寅(1746)에 후손 계진(啓辰)이 현지에 군수로 부임해 와서 새로 단갈(短碣)을 산소의 좌측에 건립하였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190여년 후 庚辰(1940년)에 종중의 공의(公議)가 府君의 현달(顯達)하신 사적은 마땅히 신도대비(神道大碑)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앞에 쓴 南塘 先生이 지어놓은 비문을 序로 하고 참판 긍호(肯鎬)의 소찬(所撰)인 銘을 추록하되 인수(寅洙)의 글씨와 익교(翼敎)의 전자(篆字)로 새 비석에 입각(入刻)하여 다음해인 1941년(辛巳) 5월에 묘소 입구에 건립하였다.  

禮賓卿公 追銘(예빈경공 추명) 예빈경 광윤

유래가 아득하여 헌원씨가 기원이라 천을 때 이르러서 은나라를 세웠으니              系出邈遠肇自軒轅 逮之天乙立國于殷
계대가 십육세에 문성대왕 탄생이라 천하가 주의신복 나는 감히 할 수 없어            歷世十六乃誕文聖 天下宗周我罔僕之
동으로 조선와서 예의교육 널리폈네 그후예 삼인중에 한가닥이 상당한씨               東出朝鮮用變夷蠻 維三苗裔有上黨韓
역년이 이천여에 존휘를 란하는분 려조를 보좌하여 벽상공신 되시었고                  歷年二千有諱曰蘭  佐麗統合壁上紀績
존휘를 영하는분 교위벼슬 지내시고 존휘에 상자휴는 별장벼슬 지내시고               有諱曰穎校尉之職 有諱尙休官至別將
존휘를 혁하는분 상의직장 벼슬인데 그아들 희자유는 신호위장군벼슬이라            有諱曰奕尙衣直長 是生希愈虎衛將軍
전열의 얼을받아 부군을 탄생하니 성인의 후예이며 공신의 자손이라                     胚胎前烈篤生府君 聖人之胄功臣之孫
높은덕 큰업적이 전할 일이 많으련만 옛날일 알 수 없어 후손들이 원한일세            竣德殊績宜多可言 世遠難詳後人之寃
묘까지 실전인데 더할말이 무엇인가 그래도 믿는 바는 음덕이 길게 이어                觀於失墓其餘何諭 所可徵者冥蔭綿瓞
자손이 번창하니 그수가 만억이라 큰선비 문장대가 높은훈공 어진정승                  子孫熾昌其麗萬億 儒宗詞盟巍勳碩輔
족보에 글귀마다 역대조상 공적이라 근본은 예의염치 이것을 계승하여                  譜不絶書有光祖武 維其有之是以似之
시경의 말과같이 이대로만 염수하라                                                                   詩不云乎念修在玆

禮賓卿公 追遠齋記  예빈경 광윤

後孫 靈光郡守 光近 撰

齋之名以追遠蓋取曾子歸後之義也奧我先祖禮賓卿府君在麗國高元之世登第秩至朝正追封司空左僕射其偉烈盛蹟必有著于世者而文獻無徵今不可考墳山在於古永光郡卽今靈光郡而亦以世遠失傳久矣逮我英考辛酉後孫世龜等辛得墓碣於本郡陳良面支藏山下翌年任戌諸孫訟于官改封塋置祭田丙寅後孫啓辰以郡宰竪碣而其記事越四年庚午後孫翼暮以道伯始建齋閣墓道儀文於是乎田各備焉不消前守朗州具數頃田以補禋祀之需獨恨夫齋宇狹隘又賓於傾비遂發重建之儀秋伋經歸末潰于成末二朞瞻守本郡及鳩僝事力改建于舊址不逾時而功告訖前唐廳事爲六楹左右夾室各三楹視前制稍高大焉嗚呼今距府君之世大約垂五百年而雲伋綿延冠組相製沙麓之祥帶礪之勳史不編書赫赫照人以至內外派流殆乎滿國中苟肥我先祖湥仁積德何以徵餘慶於後昆歟夫親盡而歲一祭于墓禮也當其歲享之際明發夙夜鷄鳴風雨其能無突然肅然洞洞乎如或見之耶是齊也爲追遠報本而說則觀棟宇之成毁可以卜祚胤之隆衰繼今以往爲我祖先後者其皆修潤墍茨而丹之于以護松柏于以供芬苾營言孝思百世勿替則南國人士之過我齋者咸曰某公有後而後孫追報之誠斯可歸厚矣凡我同祖之人盍亦勉旃

추원재기  예빈경 광윤

재각(齋閣)의 이름을 추원재(追遠齋)로 정함은 증자(曾子)의 귀후(歸厚)의 뜻을 취한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 예빈경(禮賓卿) 부군(府君)께서 고려 고종(高宗)과 원종(元宗) 간에 등제(等第)하시여 지위가 조정 대부(朝正大夫)에 이르시고 또 사공(司空) 좌복사(左僕射)에 추봉(追封)되시었다. 그 위열(偉烈)과 훌륭 한 공적으로는 반드시 세상에 드러났어야 할 것이나 문헌이 무징(無徵)하여 이제 상고할 수 없다. 산소 가 옛날 영광군(永光郡) 즉 지금의 영광군(靈光郡)에 있으나 오랜세월동안 실전되였다. 英祖17年 辛酉(1741)에 후손 세구(世龜)등이 다행히 묘갈석(墓碣石)을 본군 진량면(陳良面=현 법성면)지장산(支藏山) 아래에서 발견하고 다음해 壬戌년에 여러 후손들이 官에 송사(訟事)를 제기하여 봉분을 개축하고 제전 (祭田)을 마련하였다.英祖22年丙寅(1746)에 후손 계진(啓辰)이 군수로 와서 묘갈(墓碣)을 세워 그 전말을 기록하였고 4년이 지난 庚午年(英祖26年1750)에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한 후손 익모(翼慕)가 재각을 창건하여 묘도(墓道) 의문(儀文)이 비로서 대략 갗추어졌다. 不肖(光近)가 전 낭주군수(朗州郡守)로 있을 때 몇 이랑의 위토(位土)를 마련하여 제수(祭需)에 보조하고 다만 재사(齋舍)가 비좁고 쓰러질 날이 가까워짐을 염려하여 중건할 것을 발의하고 가을에 돌아왔다. 그 후 2년이 못되어 본 군의 군수로 도임하여 자금과 힘을 모아 옛 터에 재실을 개축하고 때를 넘기지 않고 준공하니 전당청사(前堂廳舍)가 6楹(5칸), 좌우에 협실(夾室)3영(楹)이라. 앞에서 보니 전 건물보다 약간 높고 크게 보였다. 아! 이제 부군(府君)의 시대는 약 500년이 지났다. 후손이 번성하고 고관훈작(高官勳爵)이 끊임없이 이어 지고 역사에 혁혁히 빛나 내외의 파(派)는 거의 전국에 퍼져 살게 되었으니 진실로 우리 선조의 깊이 쌓은 인덕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후손의 여경(餘慶)이 있겠는가. 무릇 4대가 넘으면 일년에 한 차례 묘제(墓祭)를 올리는 것이 예의이다. 그 해 제향(祭享)에 즈음하여 이른 아침과 깊은 밤의 풍우(風雨)에 어찌 애연하고 숙연한 정이 없겠는가. 이 재사(齋舍)는 멀리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재각이나 재실의 새로 짓고 훼손되는 것을 보면 후손들의 흥쇄(興衰)를 알 수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하여 우리 선조들을 위해 끊임없이 수리하고 단청하고 송백(松栢)을 심고 보호하향기를 바칠지니라. 길이 효사(孝思)하여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면 남국(南國)의 人士로 우리 재사(齋舍)를 지나는 자는 모두 모공(某公)은 후손이 있어 추원보본지성(追遠報本之誠)이 가(可)히 귀후(歸厚)하였다고 전할 것이다. 모든 우리 동조(同祖)의 후손들은 어찌 힘쓰지 아니하리요.

후손 영광군수(靈光郡守) 광근(光近) 지음(撰)

예빈경공(광윤) 묘소와 재실 예빈경 광윤

   추원재;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에 위치한 예빈경의 재실이다

 1941년 세운 신도비로 묘소 앞쪽에 있다

  예빈경공 諱광윤 묘소: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 신사동에 소재

       예빈경공 묘비(舊碑)

 7世 康(강) cybernation_back.gif

문혜공 휘강 유사

문혜공 휘강 호적

문혜공 휘강 사적

한시랑동 기적비문(원문)

문혜공 휘강 신도비명(원문)

한시랑동 기적비문(역문)

문혜공 휘강 신도비명(역문)

모원제와 문혜공 묘소(사진)

문혜공 휘강 묘소

 

문혜공 유사 문혜공 강

1228(고려고종15년戊子)~1303.2.22(충열왕29년癸卯) 壽 76. 처음 이름(初諱)은 경(璟)이다. 고종30년 癸卯(1243) 국자감시(國子監試)에 16세의 나이로 장원급제(壯元) 하였다. 후일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이르고,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거쳐 세자사(世子師)를 역임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원(元)나라 조정에서 중순대부(中順大夫)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 상기도위(上騎都尉)를 증직(贈職)하고, 고양후(高陽侯)에 추봉(追封)하였다.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어질었으며, 재상으로서 조심하여 삼가고 베풀줄 알았으며, 매사를 부드럽게 순리에 따라 행하였다(恭謹用儒衍). 고종,원종,충열왕 3대에 걸쳐 국사에 공헌하였음이 고려사에 전해지고(歷事高宗元宗忠烈三朝有相麗史有傳), 여지승람에 청주인으로 기록되었다(輿地勝覽錄公于淸州人物).
배위는 아선군부인(牙善郡夫人) 함종임씨(咸從任氏)로 父는 예빈주부(禮賓主簿) 전우(全祐)이고, 조부는 감찰어사(監察御史) 극화(克和)이며 증조는 예빈소경(禮賓小卿) 용비(龍譬)이다. 외조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 장헌공(章憲公) 금보(金浦) 정지(鄭芝)이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노인봉 동록에 소재하고, 예빈경공의 묘소로 부터는 20리의 거리이다. 묘 아래 근처에 한시랑제(韓侍郞堤)라는 저수지가 있다. 또 법성포 남쪽에 한시랑 유지도 남아있다. 재실은 모원재(慕遠齋)이고 歲一祭는 음력 3월 2일에 행한다.

文惠公(諱康) 史跡(高麗史 本傳)

韓康淸州人高宗時登第累遷監察御史出守金州(今金海府)前此田賦常不滿額守多坐罷康始至理屯田之廢者得穀二千餘石吏戢民安以最徵爲禮部郞中歷工部侍郞諫議大夫國子大司成翰林學士忠烈朝知密直司事轉判三司事時兩府議國事皆顧望莫有主者始置宰樞所司存以康爲之後以贊成事致仕又加中贊致仕王召康曰寡人在位己久今年還甲尤切愼兢卿宜條陳可行時事康請修宗廟備樂器以嚴時祀禁法司仰買市物掩骼埋胔放生禁屠止遊田之樂絶肥甘之奉於祈寒盛暑置醬粥以賑飢渴卒諡文惠子謝奇譜謝奇官至諫議大夫子渥泳初謝奇以禿魯花(다루하치)挈家入元泳幼長輩ㅇ事仁宗皇帝官至河南摠管以泳貴贈謝奇翰林直學士高陽縣候康僉太常禮儀院事高陽縣伯

문혜공 사적(고려사 본전) 문혜공 강

公의 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는 경(璟)이시다. 고려 高宗15년戊子(1228)에 출생하시고 高宗30년(1243)癸卯에 16세 소년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壯元)으로 발탁되셨다. 관직이 여러 차례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시고 외직(外職)으로 금주군수(지금의 金海)로 부임하셨는데 그 전부터 이 고을에는 전지(田地)에 부과된 세금을 항상 충당하지 못하여 군수가 즉결 처분으로 파면 당한 예가 많았다. 공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군용지(軍用地)로 두었다가 버린 토지를 잘 운용하여 2천여석의 곡물을 수확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도 소정 세액을 충당(充當)하는데 항상 여유가 있어서 이속(吏屬)들도 일손을 거두게 되고 백성들도 가사(家事)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런 선정(善政)의 공적으로 예부랑중(禮部郞中)에 발탁되시고 공부시랑(工部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셨다. 충열왕(재위1275-1309)조에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 전임하시었다. 이 당시에 의정양부(議政兩府)에서 국사(國事)를 의정(議定)하는데 있어 피차가 간망(看望)하는 태도로 서로 미루고 주재(主宰)하는 자가 없었다. 이 까닭에 처음으로 재추소(宰樞所)를 설치하고 공에게 사존직(司存職)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후 다시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또다시 중찬(中贊)으로 승진하시고 연로하심으로 사임하시었다. 충열왕 22년(1296-丙申)에 王이 公에게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王位에 오른지가 오래되어 이제 환갑을 당하니 송구한 심사가 더욱 간절하오. 경(卿)은 내가 할 일을 일일이 밝혀 말씀하여 주오" 하시었다. 公은 하나하나 조목을 들어서 진언(進言)하셨는데 "종묘제사(宗廟祭祀)는 先王을 받들어서 유덕(遺德)에 보답하는 일인 즉 지금 묘사(廟舍)가 퇴폐(頹廢)하여 비가 새고 제사 때 쓰는 樂器(악기)가 산실(散失)되었으니 有司(유사)에게 下命하여 廟舍(묘사)를 수리하고 악기를 비치하여 시사(時祀)를 엄수토록 하실 것이요. 공상(工商)은 기물(器物)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요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인데 지금 정부 각 기관에서 수용하는 물품을 모두 시정(市井)에서 구입하는데 혹은 그 가격을 억지로 깎고 혹은 그 외상값을 보상하지 않아서 상공인들의 괴로움이 많은 즉 이것을 금하시고 잡아온 생물을 놓아주시어 생명을 살려주는 것은 이것이 증수(增壽)하는 방법이니 청하옵건데 도살(屠殺)을 금하고 수렵(狩獵)을 행락(行樂)으로 하는 일을 막으시고 기름지고 맛 좋은 음식을 절약하여 심한 추위와 더위에 토장죽이라도 장만하여 의탁할 곳도 없이 기갈(飢渴)이 심한 백성을 구호하시고 有司(유사)에게 하명하여 임자없는 시체라도 잘 매장하여 줌으로서 음덕(陰德)을 쌓게 하소서" 하였다. 이 때의 왕이 혼암(昏暗)하기 때문에 公(공)께서 이같이 실랄하게 말씀하셨으나 왕은 이대로 시행치 못하였다. 충열왕 29년(1303-癸卯) 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6이요, 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시다. 公은 천성이 인자하시어 재상직(宰相職)에 있을 때도 온공(溫恭)하시고 근검하시어 유학(儒學)의 교풍을 바탕으로 충열왕을 보좌하여 훈업을 세웠고 사기(謝奇)와 보(譜; 일명 謝譜) 두 분의 아들을 두셨다. 사기(謝奇)의 관직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악(渥)과 영(泳)의 두 아들을 두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禿魯花(다루하치: 質子)에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元나라에 들어가니 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였으며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官)에 이르렀다. 泳이 이같이 영달(榮達)함으로 元朝에서 부친인 사기(謝奇)에게는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를 증직(贈職)하고 조부(祖父)인 강(康)에게는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 고양현백(高陽縣伯)을 증직하였다.

文惠韓公神道碑銘  문혜공 강

高麗匡靖大夫都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諡文惠韓公神道碑銘

嗚呼此韓文惠公衣冠之藏也公諱康初諱璟韓氏本箕聖之后代序玄遠至諱蘭佐麗統合三韓諡威襄始居淸州始爲貫於公六代曰直長諱奕上將軍諱希愈禮賓卿諱光胤曾祖祖禰妣通儀郡夫人羅州陳氏戶長懿女宋理宗戊子生公癸卯試國子監壯元旣登第官至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始出守金州理荒廢屯田廩庾盈牣吏戢民安以治最爲禮部郞中歷工部侍郞轉判三司時  忠烈王置宰樞所議國事公實主之以贊成事致仕王召公曰寡人在位己久尤切愼兢卿宜條陳可行事公敷進以修宗廟備樂器嚴時祀禁橫濫掩骼胔放生禁屠止游田絶肥甘施賑恤王皆嘉納大德癸卯二月二十二日卒諡文惠追封高陽縣伯噫公之事行不應止此世遠蹟湮今據譜乘及麗史列傳祛其重複並互抄節所傳厪厪然因此厪傳所不傳可槪也配牙善郡夫人咸從任氏主薄全佑女四子謝奇寶文提學譜典校令謝壽守延俱直史館四女趙瑞平壤君張碩奇廷俱宰臣安戩郞將長房男渥右政丞上黨府院君諡思肅泳高陽候諡正惠浚平章事二房男弘時扶安君三房男沃郞將潭澤季房男敬彦密直事曾玄以下至今數十代甚繁衍只記其顯著非百尺碑所能盡記而惟國朝 神懿 昭惠 章順 恭惠 安順 仁烈六后妃皆以公裔爲姙似聖述實贊邦祿此不可以不書也猗休哉公墓在靈光治東老人峰下向東原亂後失傳  純廟年間搜信蹟薦苾芬其亦冥蔭攸騰也盖大墓之有大碑準格所宜也後孫特進官肯鎬與其宗基興謁余銘甚固辭以事偉文繊而不獲遂叙而銘曰  翼翼文惠間氣孕毓稟賦純正氣義卓犖富有其具高第蚤擢邦國棟樑儒門規矱入贊謨猷出著治績歷事累朝位躋宗秩年至致仕賜對前席爲問治要敷奏明晳救時之道經國之策盖公大本惟德之積德厚流光其理不忒愈遠益昌雲伋不億道學勳庸克世綿絡矧復鴻慶六誕沙麓關睢麟趾淑善其德福履之綏其誰與埒窈窕玆邱堂斧有恤間嘗失護旋卽契蕝水益瑩澈山益崱屴百世仰止豊碑穹屹我銘昭之載篆載勒石可泐兮宜光氣之靡終極

歲舍辛巳嘉排節 嘉善大夫內部協辦原任 圭章閣檢校直閣 楊州 趙重穆 撰

고려광정대부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시문혜한공 신도비명  문혜공 강

嗚呼라 여기가 한문혜공의 산소라. 공의 휘(諱)는 강(康)이요. 初諱는 경(璟)이다. 한씨는 본래 箕聖의 후예로 현원(玄遠)한 대수(代數)를 전하여 오다가 諱란(蘭)에 이르러서 고려조를 도와서 삼한을 통합하였으니 시호를 위양(威襄)이라하며 처음에 청주에 살았으므로 여기가 본관이 되었다. 諱란은 公으로부터 6대가 되신다. 직장 휘 혁(諱 奕)과 상장군 휘 희유(諱 希愈)와 예빈경 휘 광윤(諱 光胤)은 증조,조, 부가 되고 妣(母)는 통의군부인(通儀郡夫人) 나주진씨(羅州陳氏) 호장(戶長) 의(懿)의 딸이니 송(宋) 이종(理宗) 戊子(고려 고종15년1228)에 公을 生하니 癸卯(高宗30년,1243)에 16세의 나이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壯元)으로 등제(等第)후 광정대부에 이르고 벼슬이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등을 역임하였다. 일찌기 금주수령(金州=김해守令)으로 도임하였을 때 荒廢한 둔전(屯田)을 합리적으로 운영하여 창고가 가득하니 관리들의 수검(收歛=세금을거두는일)을 멈추게하고 백성들도 태평하게 되어 최상의 치적(治績)을 쌓으셨다. 이로 인하여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발탁되었다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고 삼사판사(三司判事)로 전임되었을 때 충렬왕이 國事를 논의하는 기관으로 재추부(宰樞府)를 설치하고 公에게 그 실무를 주간(主幹)토록 하였다. 찬성사(贊成事)로서 퇴임할 때 王이 公에게 묻되 과인이 왕위에 있음이 오래되었으므로 더욱 더 政事에 그릇됨이 있을까 염려가 되니 경(卿)은 내가 꼭 하여야 할 사항을 조목조목 진개(陳開)하여 달라하거늘 公이 "종묘(宗廟)를 수리하고 樂器(악기)를 비치하여 시사(時祀)를 엄숙하게 봉행할 것이며 관리의 권력 남용을 금하고 주인없는 시체를 묻어주고 생물(生物)을 놓아 줄 것이며 도살을 금지하고 수렵을 중지시키며 미미(美味)의 음식을 끊고 기아(飢餓)의 백성을 구휼(救恤)하시라" 고 진언하였더니 王은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大德 癸卯(충열왕 29년1303) 2월 22일에 卒하시니 諡는 문혜(文惠)요 고양현백(高陽縣伯)에 추봉(追封)되시었다. 슬프도다 公의 행적이 이것뿐이 아닐 터인데 세대가 오래되여 모든 사적(事蹟)이 인몰(湮沒)하였으므로 이제 족보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의거하여 중복되는 것은 제거하고 여기저기서 필요한 절목(節目)만을 가려내여 겨우 이런 정도만 전하게 되었으나 이것만 보더라도 전하지 못한 事蹟(사적)이 얼마나 많을까를 가히 추측할 수가 있으리라. 配位이신 아선군부인(牙善郡夫人)함종임씨(咸從任氏)는 주부(主簿) 전우(全佑)의 여식이요. 아들이 4명 있으니 사기(謝奇)는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이요. 보(譜)는 전교령(典校令)이요, 사수(謝壽) 수연(守延)은 모두 직사관(直史館)이오, 4녀가 있으니 조서(趙瑞)는 평양군(平壤君)이요. 장석(長碩)과 기정(奇廷)은 재신(宰臣)이요, 안전(安戩)은 랑장(郞將)이다. 장남 謝奇의 아들 악(渥)은 우정승(右正丞)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시사숙(諡 思肅)이요, 영(泳)은 고양후(高陽侯) 諡정혜(正惠)요, 준(浚)은 평장사(平章事)이다, 2남 譜의 아들 홍시(弘時)는 부안군(扶安君)이요, 3남 謝壽의 아들 옥(沃)은 랑장(郞將)이요. 담(潭)과 택(澤)이 있으며 4남 守延의 아들 경언(敬彦)은 밀직사사(密直司事)니 증손이하(曾孫以下)는 지금 數十世에 번연(繁衍)한 子孫 중에 현달(顯達)한 이만 기록하더라도 백척대비(百尺大碑)가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國朝의 신의(神懿), 소혜(昭惠), 章順(장순), 공혜(恭惠), 안순(安順), 인열(仁烈) 6后妃는 모두 公의 후예로서 태임태사(太姙太姒)같은 聖德을 繼述하여 국가의 복록(福祿)을 실찬(實贊)하시니 이 어찌 아니 쓸 수 있으랴. 진실로 아름답도다. 公의 묘소가 영광읍(靈光邑) 동편 노인봉 아래 東向局內인데 혼란통에 실전(失傳)되었다가 순조(純祖)년간에 신적(信蹟)을 얻어 다시 향화를 받들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蔭德이 유구(悠久)하게 뻗친 소치(所致)인지라  대체로 큰 산소에 큰 碑(비)가 있는 것은 당연한 準格(준격)인 것이다. 後孫(후손)되는 특진관 긍호(特進官 肯鎬)가 그 族人 기흥(其興)이와 같이 와서 내게 비명(碑銘)을 쓰라고 부탁하니 일인즉 크고 文章은 졸렬(猝劣)하여 사피(辭避)하다 못해 이 명(銘)을 서술(敍述)한다.

위대하신 문혜공은 靈氣타고 탄생하니 天品이 純正하고 氣宇가 탁월토다                 翼翼文惠間氣孕毓 稟賦純正氣義卓犖
재능이 탁월하여 高等科擧 壯元하니 국가의 동량이요 유림의 師表로다                    富有其具高第蚤擢 邦國棟樑儒門規矱
내직에서 議政이요 외직에도 선정일세 累代왕조 섬기면서 높은자리 歷典하다          入贊謨猷出著治績 歷事累朝位躋宗秩
노년으로 사직하고 임금앞에 마주앉아 치국대요 물을적에 明晳하게 奏達하니          年至致仕賜對前席 爲問治要敷奏明晳
時務를 닦는법과 國家經理 대책이라 公의가진 높은信條 積德累仁 根本이니             救時之道經國之策 盖公大本惟德之積
후한 끝에 경사남는 그이치가 틀림없네 갈수록 번창하여 후손이 천만이라               德厚流光其理不忒 愈遠益昌雲伋不億
道學君子 공훈명상 대를이어 綿綿하고 더욱 더큰 경사는 육왕비를 탄육하니            道學勳庸克世綿絡 矧復鴻慶六誕沙麓
금슬좋고 善化함은 정숙한德 있음이라 복록의 안정됨이 그뉘라서 따를손가              關睢麟趾淑善其德 福履之綏其誰與埒
요조한 이산등에 산소가 있었는데 중년에 실호됐다 도로찾아 奉尋하니                    窈窕玆邱堂斧有恤 間嘗失護旋卽契蕝
물도더욱 맑아지고 산도더욱 높아졌네 백세를 慕仰하여 우뚝섰는 저豊碑에             水益瑩澈山益崱屴 百世仰止豊碑穹屹
銘을지어 밝히고자 이글을 새기노니 이돌이 부서져도 靈氣만은 영원하리                我銘昭之載篆載勒 石可泐兮宜光氣之靡終極

辛巳(1941) 8월 중순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辦) 원임(原任) 규장각검교(奎章閣檢校) 직각(直閣)  楊州  조중목(趙重穆) 지음

 文惠公(諱康) 墓所(문혜공 묘소)  문혜공 강

公의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德興理) 노인봉(老人峯) 아래 酉坐에 배위 아선군부인 함종임씨(配位 牙善郡夫人 咸從任氏)와 合兆이시다. 墓所가 오랫동안 실전 되었다가 영광읍 5리 主山 동편에 동향으로 자리한 큰 무덤이 있는데 옛날부터 인근에서 한시랑묘(韓侍郞墓)라고 구전(口傳)되여 왔고 또 신사동(薪寺洞)의 예빈경府君 산소와는 불과 20리 거리이며 墓아래에 한시랑제(韓侍郞堤)라고 칭하는 제당(堤塘)이 있으며 법성포 남방에 유허(遺墟)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그 洞名을 한시랑동이라고 칭하여 온다. 公께서 일찍이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신 바 있으나 그 외에는 한씨로서 시랑직을 역임한 분이 없다. 그런고로 이 墓가 바로 公의 산소가 아닌가 하여 신사동 묘를 개봉축할 때 宗中에서 후손 철증을 파견하여 봉분을 파고 誌石을 찾아 보았으나 아무 표적도 없었고 官에 제소하여 모장(冒葬)한 자인 서시원등을 문초하여 옛날부터 전하여 오던 시랑묘 표석(侍郞墓 表石)의 소재를 추궁한 결과 묘역 부근의 부서진 비석 돌조각들에서 韓字 한 자만을 발견하였을 뿐이고 분명한 신적(信蹟)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즉 표석도 유실되었고 다른 신표도 없이 함부로 公의 묘소라고 결정할 수가 없어서 이런 기록만을 보존 한 채 後日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에 純祖22년 任午(1822)에 후손인 영광군수 기유 (耆裕)와 무안군수 익상(益相)과 경철(慶喆)이 그 동리에 가서 극력탐색(克力探索)하여 신적(信蹟)을 얻어서 위토와 재실을 세워 제사(歲一祀)를 봉행토록 하였고 6년후 戊子에 법성첨사 도유(法聖僉使 道裕)와 전라수사 응호(全羅水使 應浩)가 表石을 건립하였고 己未年(1919)에 후손 규철(圭喆), 규해(圭海), 영태(永泰)가 石儀를 重修하였으며 丙戌年(1946)에 모원재(慕遠齋)를 중건하고 매년 3월 2일 제사를 행한다.

문혜공(文惠公=諱康) 호적(戶籍) 문혜공 강

이 戶口는 文惠公이 67세 되시던 忠烈王20年甲午年(1294)당시 지금의 호적부와 같은 公簿로서 주소 성함, 본관, 생신, 관직이 소상할 뿐 아니라 부친 예빈경(禮賓卿) 광윤(光胤),조부인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 의장부별장(儀仗府別將) 희유(希愈), 증조 상의직장(尙衣直長) 증금자광록대부(贈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혁( 奕), 어머니 통의군부인(通議郡夫人) 나주진씨(羅州陳氏), 배위인 아선군부인(牙善郡夫人) 함종임씨(咸從任氏), 장남인 조정대부(朝靖大夫)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지제고(知製誥) 사기(謝奇)까지 등재되어 있으며 특히 부,조, 증조까지 소급하여 존휘와 관직을 명백히 신망할 수 있는 사적공부이므로 여기에 첨록하고 시조 이하 직장공 이전까지의 계대가 소명될 사적 기록이 발견되기를 빌면서 이 호구 원문을 게재한다.

至順二年辛未正月 日東部上奉香二里甲午年戶口準戶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致仕韓康古名璟年六十七淸州父追封金紫光祿大夫守司空左僕射朝請大夫禮賓卿光胤故祖檢校神虎衛上將軍行儀仗府別將希愈故曾祖尙衣直長贈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奕故母通儀郡夫人陳氏故羅州外祖戶長陳懿古名世長故妻牙善郡夫人任氏故咸從縣父內侍登仕郞禮賓主薄同正任全祐一男宣授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製誥謝奇故典儀府上奉香二里甲午年戶口良中匡靖大夫僉議中贊致仕韓康乙准爲內敎

韓侍郞洞紀蹟碑文  

程夫子銘顔樂亭有曰水不忍廢地不忍荒盖顔子樂處古未嘗亭後賢不忍其就泯亭而銘而俾寓百世羹墻况祖先杖履攸曁子姓追慕仰止之心豈敢食息忘諸懷也惟此靈光九峀山下韓侍郞洞上黨韓氏先祖遺墟也至今七百餘載沼平臺空鞠爲茂草而樵兒牧笛跼躋乎其傍行路不禁咨嗟後孫之齊恨尙復如何乎哉此所以碑于玆而紀其事也仍竊惟念靈光之以韓侍郞稱洞者三陳良支莊山下禮賓卿公諱光胤之墓畝長老人峰下文惠公諱康之葬並此地而謹按南塘文純公所撰禮賓卿公墓碑曰居民傳說公謫居于此歿仍藏焉文惠公譜註曰法聖浦南有韓侍郞遺址又曰吾韓氏無歷踐侍郞獨公中經工部侍郞且攷慕遠齊所藏古蹟則以爲後孫希孟粹德偶過此處討得韓侍郞洞名心忽感動因緣得兩大墓所在侍郞洞云其祖考精英感誘後仍卽其理然也旣禮賓卿公賦鵬遐邦文惠公之陪隨孝德之不容己然洞號之不曰禮賓而曰侍郞者禮賓卿公先歿文惠公久留故云然耶此不敢臆質也往在  崇禎四癸未後孫弼祚慶裕營立小石全無事實之載刻埋沒極矣與顔樂之廢荒奚異哉今換他石稍移淨處而竪之揭其面曰韓侍郞洞紀績碑書其陰如右於是海山映輝草木動彩千載如一日祖先之靈庶幾陷降懽悅於山光水色之中曰子有後而不棄其基也文純公卽禮賓卿公十七代孫諱元震而今此之役以宗議捐花樹契資爲之用云

癸未三月  日 竪(1943년 3월 세움)

한시랑동 기적비문  문혜공 강

정부자(程夫子)가 안락정(顔樂亭)을 銘하여 이르되"물도 차마 버릴 수 없고 터도 차마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 것은 顔子의 즐겨 살던 곳에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는데 후현(後賢)들이 그 장소의 유서마저 인몰(湮沒) 될까 염려하여 정자를 세우고 銘을 찬술(撰述)하여 영원토록 慕仰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니, 하물며 조상이 기거하시던 장소에 자손들의 추모하는 심정이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여기 영광군 구수산(九峀山) 아래의 韓侍郞洞은 상당한씨(上黨韓氏) 先祖의 옛터이다. 지난 700여년에 늪(沼)도 대(臺)도 빈터가 되고 잡초만 무성하여 초부목동(樵夫牧童)들이 다닐 뿐이어서 오가는 행인들까지도 탄식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의 통한이야 어찌하였으리. 그리하여 이 비석을 세우고 그 사적을 기록하는 바이다. 조용히 생각하여 본 즉 영광에 한시랑이라는 동리가 3개소인데 진량면(현재 법성면) 지장산 아래 예빈경(禮賓卿) 諱 광윤(光胤)의 묘소와 畝長面(현재 묘량면) 노인봉 아래의 문혜공(文惠公) 諱 강(康)의 묘소와 이 동리가 아울러 동일한 명칭을 쓰게 되었다는데, 생각해 본 즉 남당(南塘) 문순공(文純公)께서 撰한 禮賓卿 碑文에는 公께서 이곳에서 귀양살이 하시다가 별세하시니 여기에 장례를 모셨다는 부근 주민들의 전설이 있다는 구절이 있고 문혜공의 족보방주(族譜傍註)에는 법성포 남쪽에 한시랑유지(韓侍郞遺址)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우리 한씨 중에서 시랑직(侍郞職)을 역임한 분이 없고 오직 公께서만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한 바 있으며, 다시 慕遠齋에 소장된 고적조(古蹟條)를 살펴보면 후손 희맹(希孟), 수덕(粹德)이 우연히 이 곳을 지나다가 한시랑동이라는 洞名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심정이 감동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양대의 산소가 시랑동에 있음을 알 게 되었다 하니 이는 祖考의 영령이 후손의 감정을 유발케 한 자연스러운 事理라 하겠다. 앞서 예빈경공께서 원격(遠隔)한 지방에 계시니 문혜공께서 시종한 것은 효도의 의당 있음직한 일이요 그리고 동명을 예빈이라 칭하지 않고 시랑이라 한 것은 예빈경공이 일찍이 별세 하신 후에도 문혜공께서 장기간 거류하신 까닭이 아니었겠는가. 전에 崇禎四癸未(순조 23년,1823)에 후손 필조(弼祚), 경유(慶裕)가 短小한 表石을 세웠으나 사실을 기재한 것이 없고 土沙중에 깊이 매몰되었는지라 서두에 말한 顔樂亭의 폐황(廢荒)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지금 새로운 碑로 바꾸어 정결한 장소에 옮겨 세우고 전면에는 한시랑동 기적비라 새기고 후면에는 이 글을 새긴다. 이제야 바다와 산이 빛나고 초목도 곱게 채색을 발휘하여 천년전의 일이 오늘 일같이 새롭게 되었으니 선조의 영령께서 산광(山光)과 수색(水色)이 영롱함 속에 함강(陷降)하시면서"나에게도 후손이 있어 이基地를 버리지 않도다" 하시며 기뻐하시는 듯하다. 文純公은 즉 예빈경공의 17대손인 諱 원진(元震)이요. 이 역사는 宗中이 합의하여 화수계(花樹契) 자금으로 소요경비가 마련된 것이다.

1943년 癸未 3월 세움

문혜공(강=康) 묘소와 재실  문혜공 강

모원재(측면)

문혜공 신도비(1941년에 세움)

모원재(문헤공의재실)

문혜공묘비;우측의 비는 1828년 건립된것임

문혜공(諱강) 묘소 ;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노인봉 동쪽 기슭에 위치

7세 球(구) cybernation_back.gif

初諱(처음 이름) 瑨(진) 中郞將(중랑장)

7세 連( 연)

璿源譜略及神懿王后五世譜作漣字一本連字作璉字善草隸麗官至禮賓尹始居安邊郡衛益面翼室坊現琴基里舊名琴龜謹按東國通鑑忠烈王三十四年秋丙寅王疾篤遣禮賓尹韓連以報瀋王云
基安邊郡衛益面鋤里風流山鋤里洞雙乳形子原中世失護設壇追祭純祖甲子因邑人韓聖淵及孫哥等犯葬相訟兩世墓兆自然現露遂封築之立神道碑於鋤里洞內建閣以庇之至今日焉
此派世系李朝璿源譜略及神懿王后年譜依據考證大同譜編纂委員會總會決議再定立而以俟後考后孫錫範稿

7세 李舒(이서)

判書, 子 李希 檢校 大護軍  女 金文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