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56_back.gif              上世譜1-2      quartz_red.gif세계도 보기

1세

 

 

 

 

 

 

 

 

 

 

 

 

 

 

 

 

 

 

 

 

 

 

 

 

 

 

2세

 

 

聰禮

 

 

 

 

 

 

 

 

 

 

 

 

총예

 

 

 

 

 

 

 

 

 

 

3세

尙休

 

 

彦恭

 


 

 

 

 

 

 

 

 

상휴

 

 

언공

 

 

 

 

 

 

 

 

 

 

4세

 

 

 

 

 

 

 

 

 

 

 

 

 

 

 

 

 

 

 

 

 

 

 

 

5세

侯抵

 

 

 

○○

容信王后

容懿王后

 

 

 

 

 

 

후저

 

 

 

○○

용신왕후

용의왕후

 

 

 

 

 

 

6세


安中

安仁

 

 

 

 

 

 

 

 

원서

안중

안인

 

 

 

 

 

 

 

 

7세

敬立




 

 

 

 

 

 

 

 

 

 

경립

정산

 

 

 

 

 

 

 

 

 

 

8세

福綏

文弼


光衍

 

 

 

 

 

 

 

 

 

 

복수

문필

광연

 

 

 

 

 

 

 

 

 

 

s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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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世 奭(석)

一本에는 諱가 有益(유익)으로 기록되었으며 관직은 검교용호교위(檢校龍虎校尉), 배위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영상(領相) 익(瀷)의 딸이다.

5世 侯抵(후저)

태재(太宰=중국이나 고려 때의 으뜸 벼슬)의 공에 따라 평산백(平山伯)에 봉해졌다. 일설에는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과 태자첨사(太子詹事=고려때 동궁의 벼슬)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전해진다. 배위는 김(金)씨로 제주(祭酒) 상빈(尙賓)의 딸이다.

6世 靖(정) top

다른 본에는 諱를 정(晸)으로 적은곳도 있다. 시랑(侍郞) 소부소감(少府少監) 을 지내고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추봉(追封)됨. 배위는 교동전씨(喬桐田氏)이며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동정(同正) 화공(和恭)의 딸이다. 생몰년 미상. 고려 의종(재위1147-1170) 때의 문신. 1149년(의종3) 11월에 한정(韓靖)이 만수절사(萬壽節使)로 금나라에 가서 하례하였는데 허순(許純)으로 하여금 방물을 올리게 하였다. 이 당시 고려는 금나라와 친밀한 관계에 있어 양국의 사신이 빈번히 왕래하며 서로 절일에 하례하고 방물을 보냈던 것이다. 1151년(의종5) 8월에 대관(臺官)으로서 간관과 시어사 김양등이 합문에 엎드려 시사(時事)를 논하여 3일간 간언하였으나 3일 동안 회보가 없자 문공원(文公元유필(庾弼김영석(金永錫) 등과 더불어 죄를 청하고 일을 보지 않으니, 의종은 중서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문공원을 비롯한 간관 김자의, 윤인첨,대관 최윤의, 한정 등 14인을 불러 위유(慰諭)하였다. 1151년 내시 윤언문(尹彦文)이 괴석(怪石)을 모아 수창궁 북원(北園)에 가산(假山)을 쌓고, 그 곁에 조그마한 정자를 세우고는 「만수정」이라 이름하고, 황색 비단으로 벽을 입히는 등, 극도의 사치가 사람의 눈을 현혹하게 하니, 왕은 자주 이곳에 들러 그들과 함께 환락을 다하였다. 1152년 왕이 만수정(萬壽亭)에서 잔치를 베풀어, 새벽에 이르러 비로소 파하였다. 잔치를 끝내려고 할 때 가산이 무너지고 암탉이 울었다. 이 때 한정(韓靖)은 시어사로서 어사중승 고영부(高瑩夫), ㆍ최균심(崔均深) 등과 사흘 동안 합문에 엎드려서 윤언문ㆍ한취(韓就)ㆍ이대유(李大有)ㆍ영의(榮儀) 등을 내쫓을 것을 청하였다. 왕이 듣지 않자, 대관이 두문불출하였다.대관을 불러서 유시하였다. 우간의 신숙과 급사중(給事中) 임경(林儆) 등이 다시 소를 올려 간절히 간언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이를 따라 언문 등 4명을 내쫓았다. 한정(韓靖)은 이부시랑(吏部侍郎)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원응(李元膺)과 사이가 좋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왕이 인제원(仁濟院)에 따로 불사(佛寺)를 지을 때 이를 맡았던 이원응이 죽자 복직되어 그 공사를 인계받아 완성하였다. 이 공으로 은(銀)과 비단을 받았다. 1165년 여름 4월 경진일에 왕이 관란사(觀瀾寺)에 행차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부시랑 한정(韓靖)이 인제원(仁濟院) 안에 따로 절을 짓고 복을 비는 곳이라고 칭하니, 내시시랑(內侍侍郞) 김돈중(金敦中), 대제(待制) 김돈시(金敦時)가 관란사를 중수하고, 또한 복을 비는 곳이라 일컬었다. 왕이 한정과 김돈중 형제에게 이르기를, "들으니, 경들이 과인에게 복을 돌려 보낸다니, 짐이 심히 가상히 여겨 장차 가 보려고 한다." 하였다. 한정과 김돈중 등이 절 북쪽 산이 빨갛게 벗겨져 초목이 없음을 보고는, 부근의 백성을 동원하여 송백(松柏)ㆍ삼회(杉檜)와 기화이초를 심고, 단을 쌓아 어실(御室)을 만들었는데, 단청으로 장식하고 축대와 섬돌도 모두 괴석을 썼던 것이다. 이에 이르러 돈중이 절 서쪽 대(臺)에 잔치를 벌이니, 장막과 그릇들과 맛있는 음식이 모두 매우 호화로웠다. 왕이 재상 및 근신과 더불어 흡족히 즐기고, 김돈중ㆍ김돈시ㆍ한정에게 백금(白金)ㆍ나견(羅絹)ㆍ단사(丹絲) 등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벼슬은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소부소감(小府少監)에 이르렀다.

6世 基(기)

직장(直長), 호위낭장(虎衛郞將)을 지냄.

6世 諝(원서)

 공은 고려의 문신으로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추봉(追封)되었다. 묘소는 실호되었으며 배위 역시 전하는 사실이 없다(配位竝不傳). 근안컨대(按) 公之時世는 고증하건데(未可考而) 증손(曾孫) 문절공(文節公)이 충열왕시대(忠烈王時)에 생존(生於以)했으므로 30년을 1세(三十年一世之例)로 추산하면(推之要) 원종시대의 사람이라 생각된다(當爲元宗時人也).

2世 聰禮(총예)

고려 초기의 문신으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을 지내고 내사령에 추증(追贈內史令) 되었다.

3世 彦恭(언공)  top

공은 고려 광종(재위950-976), 성종(재위982-998), 목종(재위998-1010) 때의 문신으로 광록시소경 聰禮(총예)의 아들이다.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광종 때 15세의 나이로 광문원의 서생이 되었고, 이어 승시랑이 되었다가 내승지를 거쳐 내의승지사인이 되었고,성종 3년(984)에 형관시랑이 되고, 이어 병관시랑에 올랐다.990년에 송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금자광록대부 검교병부상서 겸 어사대부를 제수 받고 대장경 481함 2,500권과 송나라 태종이 지어 비장한 <전소요연화심륜>을 가지고 돌아왔다.어사 예관시랑 판예빈성사가 되어 송나라의 제도를 본 떠 중추원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실현되자 중추부사를 거쳐 중추원사가 되었다.전중감, 지예관사를 거쳐 참지정사 상주국이 되고,목종이 즉위하면서 내사시랑 평장사에 제수 되었으며,목종 14년(1001)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공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목종은 본관인 장단을 단주로 승격시켰다.그 때 다시 전폐를 쓰고 추포(발이 굵고 거친 베)를 금하여 백성들의 불편이 커지자 그 폐단을 상소하여 전폐를 다주(茶酒)나 식미(食味) 등의 점포에서만 사용케 하고 그 밖의 교역에서는 토산물을 사용토록 하였다.그 뒤 개국후 감수국사가 되었으며, 별세 후에 내사령에 추증 되었다.현종 18년(1027)에 목종의 묘정에 배향되고,덕종 2년(1033)에 다시 태부(太傅, 太師)가 증직 되었으며, 시호는 貞信이다.아들은 지서경유수이며 정종국구인 祚(조)이다.

4世 祚(조)

공의 고려 초기의 문신이며, 서경유수를 지내고, 증 문하시중에 제수되었으며, 정종대왕의 장인이다
(知西京留守贈門下侍中靖宗國舅). 공의 휘는 祚(조)요, 본관은 단천(지금의 청주)이다. 고려 초기인 현종, 정종 때의 문신이며, 선대로부터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자라 글을 좋아하였으며, 현종 12년(1021)에 사은사로 송나라에 다녀 왔다. 다음해 5월에 송나라 인종이 성혜방, 음양이택서, 건홍력, 석전의 1장을 하사하였다. 그 후 간의대부를 지내고 현종 21년(1030)에 지서경유수를 삼고, 그 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공은 고려 11대 정종왕비인 용신왕후의 부친이며, 따님인 용신왕후가 정종 원년(1035)에 아들을 낳은 후 다음해 7월에 큰병으로 훙(薨)함에 정종 4년(1038)에 다시 공의 둘째 딸로 용의왕후를 삼았는데 애상군 방, 그리고 낙랑후 경과 개성후 훤 등의 3왕자를 낳았다. 아들은 호부시랑 圭(규)이고, 또 다른 아들이 있었으나 휘가 미상이다.

5世 圭(규)

공은 고려 초기의 문신으로 상서(尙書)를 지내고 호부(戶部), 형부(刑部)의 시랑(侍郞)을 지냈다.

6世 安中(안중)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를 지냄.

6世 安仁(안인)  top

공은 고려 숙종(재위1096-1106), 예종(재위1106-1123) 때의 문신으로 예부상서(禮部尙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내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초휘는 교여이며, 字는 子居(자거)이다. 호부시랑 규의 아들이며,정종국구 조의 손자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되었고 예종이 잠저에 있을 때 이영, 이여림 등과 함께 동궁관을 지냈다. 예종조에 들어 우부승선,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 형부상서, 예부상서와 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하였고, 인종이 즉위한 후에는 참지정사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예종 7년(1112)에 동지공거가 되고, 1120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관장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독점하려던 이자겸 일당이 선왕 즉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를 비롯해 문공미, 이영, 정극영 등 50여명을 살해하거나 유배 시켰는데 이때 공이 승주(지금의 순천) 감물도에 유배 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인종 때 이자겸 일당과 공의 일파의 대립은 누대 문벌과 신진 관료 세력과의 대표적인 대립 현상이었다. 훗날 인종은 공의 내외손과 현손들에게 관직으로 포상할 것을 교시로 내렸다. 시호는 문열이며, 힘써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다. 또한, 역서(점치는 일)에 능하여 앞 날을 잘 맞추니 일시에 명류가 되었다. 아들은 기록에 없다.

6世 沖(충)

공은 고려 숙종(재위1096-1106), 예종(재위1106-1123), 인종(재위1123-1147) 때의 문신이다. 부친의 휘가 전해지지 않으며, 정종국구이며 지서경유수인 祚의 손자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에 보직하였는데, 명성이 높아 2정(2鄭; 정항, 정극영) 한충이라 하여 칭송이 컸다. 예종 6년에 우보궐에 제수되고, 2년 후에 비서소감을 거쳐 기거주에 전임되었다. 송나라에서 사신이 왔었는데, 왕이 계단 위에서 이들을 맞았다. 며칠 후 사신이 돌아가자 공이 왕께 아뢰기를 "조사는 원래 상인으로 벼슬이 낮으니 계단 아래에서 절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쫓고 중서사인을 삼았다. 이 때 최홍사가 사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개국사 대장당을 창건하려 하므로 이를 탄핵하다가 서경유수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대방공 보의 사건에 연루되어 공의 사촌 형 한안인이 죽음을 당하자 공도 외지에 유배되었다. 얼마 후 이자겸이 패하자 인종 5년(1127)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서경유수가 되니 백성들은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다 기뻐하였다 한다. 곧 이어 국자제주 한림독학사를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고 仁宗7年己酉(1129)1월에 졸하셨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학업에 충실하여 문장력이 뛰어 났으며, 글씨도 잘 써 공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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