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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謝奇

 

 

 

 

 

 

 

 

 

 

사기

 

 

 

 

 

 

 

 

 

 

9세

 

 

 

 

 

 

 

 

 

 

 

 

 

 

 

 

 

 

 

 

 

 

10세

大淳 

 

 

公義 

 

 

 

 

 

 

 

대순 

 

 

공의 

 

 

 

 

 

 

 

11세

      蕆

鄭樞

洪師禹

脩 

 

 

 

 

 

 

 

정추

홍사우

 

 

 

 

 

 

 

 

12세

无后

淸州人 

南陽人

尙桓 

 

尙質 

 

 

 

 

 

 

 

 

상환 

 

상질 

 

 

 

 

 

13세

 

 

 

李携

閔無疾

 

 

 

尹坤

成扱

 

 

 

이휴

민무질

기 

 

 

강책

 윤곤

성급

14세

 

 

 

한성인

여흥인

明澮 

 

宋秀琳

 

 

 

 

 

 

 

 

명회 

명진 

송수림

 

 

 

 2a

 

 

 

 

 

충성공파

이양공파

 

 

 

 

 8世 謝奇(사기) top

제학공 유사

제학공 사적

제학공 묘소

제학공 신도비명

봉강재와 제학공 묘소

유사 제학공 사기  

등과후 조정대부(朝靖大夫)에 이르고 첨의부좌사의대부(僉議府左司議大夫)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지제고(知制誥)를역임,○元나라에서 동정행중서성(東征行中書省)의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을 지냄 ○충열왕원년乙亥(1275)6월 원나라에 인질로 가는 도루아치(禿魯花)에 선발됨 ○공의 나이 20미만으로 관직을 3등급을 올려 도교서령에 임명하여 1279년 25인의 도루아치와 가솔과 함께 원에 들어감(公以都校署令在選中年未二十超三等職與二十五人己卯擊家入元) ○뒤에 환국하였으며 원조에서 한림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의 직을받고(後日還國元朝贈翰林直學士亞中大夫輕車都尉) 고양현후에 추봉됨(抽封高陽縣候).
○묘소는 광주 광산구 서봉동(棲鳳洞) 어등산(魚登山) 중봉상(中峰上) 자좌(子坐)이다.○임란후 실호되었는데, 오성등이 비갈을 파손하고 범장(任亂後失護吳姓破碣冒葬)한 것을 순조癸亥(1803)년에 영상(領相) 용구(用龜)의 주도로 해익 등을 보내 여러날 동안 탐색하여 깨어진 비석조각을 찾음으로 묘소를 확인하고(遣海益等累日探査尋得碑片) ○1833년 계사년에 묘소의 개봉축등을 의논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하고(只有亞中韓謝四字缺寸癸巳後孫等謀所以修成墓儀事未遑歲修香火悚懼而己) ○광복후 戊子(1948)년에 후손 복리(福履)등이 송사하여 승소하여 묘소를 찾았으며(光復後戊子禮賓尹公後孫瑾燮居靈山振煥居光州福復等告官訟之得決
誠) ○다음해에 개봉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위토를 매입하였으며 재실 봉강재(鳳崗齋)를 건축하였고(翌年己丑改修封築立碑祭田伋建齋閣齋號鳳崗齋) ○세일제(歲一祭)는 음력 3월 3일에 봉행한다.
배위
연안이씨(延安李氏)는 밀직사(密直事) 분희(汾禧)의 딸이고.조부는 대장군(大將軍) 송(), 증조부는 연안군(延安君) 엄() 一云 儼이고, 외조는 대부경의천군(大府卿凝川君)함양박신유(咸陽朴臣蒙生)이다.
추봉고양군부인평강채씨(追封高陽郡夫人平康蔡氏)는 중찬(中贊)낭정공(郞靖公)인규(仁揆)의 딸이고, 조부는 태위평장사정선공정(守太尉平章事靖宣公禎一作진),증조는 태사평장사경평공송년(守太師平章事景平公松年),외조는 재신동주최영(宰臣東州崔英)이다.
추봉고양군부인정씨(
追封高陽郡夫人鄭氏)는 재신(宰臣)인귀(仁貴)의 딸이다.
사위 金之謙  樂安人樂安君 父司宰卿允堅
사위 宋金剛  一名琿匡正元尹礪山人  父班主琰 子宋璿礪良君之 女閔齎誕元敬王后
사위 盧承緖  交河人民部典書 子盧中善判事子魯仲喜都事 女尹安淑贊成良簡公坡平人  父政丞瑤權正中左郞 ○父直修文殿休安東人孫專誕顯德王后

提學公 諱 謝奇 史蹟(제학공 휘 사기 사적)   제학공 사기  

麗史略曰忠烈王元年乙亥六月甲子新定禿魯花超三等職送之都校署令韓謝奇康之子樞密李汾禧之壻年末二十超拜八品○同五年己卯三月丁巳遣帶方公澈率禿魯花入元金方慶子元傳子貞朴恒子元許珙子評洪子藩子順韓康子謝奇薛公儉子之沖李尊庇子瑀金周鼎子深等衣冠子弟凡二十五人皆超三等授職送之○文惠公本傳略曰子謝奇官至諫議大夫子渥泳初謝奇以禿魯花家入元泳幼長贊穀事仁宗皇帝官至河南路摠管以泳貴贈謝奇翰林直學士高陽縣候○洪奎列傳略曰忠烈選良家女將獻帝奎女亦在選中謂韓謝奇曰吾欲剪女髮何如謝奇曰恐禍及公奎不聽  禿魯花(독로화:도루아치=인질을 뜻함)

  고려사에 간략히 적기를 충열왕 원년乙亥(1275) 6월 甲子에 새로 禿魯花(독로화: 도루아치=중국어로 인질을 뜻함)를 선정하는데 3계급을 특진하여 발령한 관직을 주어서 보내기로 하였다.도교서령(都校署令)에 임명된 한사기(韓謝奇)는 강(康)의 아들이요,추밀 이분희(樞密 李汾禧)의 사위니 나이 20미만으로 품계(品階)를 초월(超越)해서 8품에 배명(拜命)하게 되었다. 同 5년기묘(1279) 3월 丁巳에 대방공 철(帶方公 澈)을 파견하여 독로화를 인솔하고 원(元)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흔()과 원전(元傳)의 아들 정(貞)과 박항(朴恒)의 아들 원타(元)와 허공(許珙)의 아들 평(評)과 홍자번(洪子藩)의 아들 순(順)과 한강(韓康)의 아들 사기(謝奇)와 설공 검(薛公儉)의 아들 지충(之沖)과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우(瑀)와 김주정(金周鼎)의 아들 심(深)등으로서 문벌 좋은 집 자제(子弟)들 25인이라 모두 3등급을 올린 관직을 주어서 보냈다. 문혜공(文惠公) 본전(本傳)에 간략히 적었으되 아들 사기(謝奇)는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아들 악(渥)과 영(泳)이 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독로화로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들어가니 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管)에 이르렀다. 영(泳)이 이렇게 영달(榮達)함으로서 아버지 사기(謝奇)에게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로 벼슬을 주었다.
 홍규열전(洪奎列傳)에 간략히 적었으되 충열왕이 양가(良家)의 예쁜 여자를 선발하여 원의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는데 추밀부사 홍규(樞密副使 洪奎)의 딸도 마침 선발되어 대열 속에 있었다. 규(奎)가 한사기(韓謝奇)에게 이르되 "나는 내 딸의 머리를 깍아서 이번 선출을 면하도록 할까 하는데 어떨지요" 하니 사기(謝奇)가 그러면 그 화(禍)가 귀공에게 미칠까 두려우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규가 듣지 아니하였다 한다.

 ○추록 :  가정 이곡(稼亭 李穀)이 찬(撰)한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행장(行狀)에는 아버지 사기(謝奇)는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조정대부 우사의대부 지제고(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고 正惠公 泳의 영달로 인하여 한림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翰林直學士亞中大夫經車都尉)로 여러 차례 증직(贈職)을 받았고 고양후(高陽候)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어머니 채씨(蔡氏)와 정씨(鄭氏)는 모두 고양군부인(高陽郡夫人)으로 추봉 되었으니 公은 정씨의 소생이다. 처음에 본국에서 세도(勢道)집 자제들 중에서 질자(質子:인질)를 뽑아 보내는데 正惠公의 부친이 선출된 인질 중에 있었으므로 가권(家眷)을 인솔하여 원으로 왔다고 한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족보에는 삼사좌사 주(三司左使 澍)의 배 상당군 부인한씨(配上黨郡夫人韓氏)의 조(祖)는 선수한림직학사 아중대부경거도위(宣授翰林直學士 亞中大夫經車都尉)로 고양현후에 추봉되시고 고려조의 관직으로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도첨의(都僉議)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지제고(知製誥)이신 사기(謝奇)라고 기록되여있다.

公의 묘소는 光州邑 西쪽 素志面 棲鳳洞(현 광산구 서봉동)천등산(天登山=현魚登山)子坐이다. 임진왜란 후에 失護되어 산아래 주민 吳姓이 비갈(碑碣)을 깨 버리고 윤장(倫葬)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가 한정승 묘(韓正丞 墓)라는 이야기가 인근에 구전 (口傳)되어 옴을 단서로 순조3년癸亥(1803)에 후손 영의정 용구(用龜)가 해익(海益)등 종인을 현지에 보내고 光州 羅州(광주,나주) 양 군수에게 서신을 보내서 산 아래 주민들과 더불어 묘역 일대의 땅을 파고 믿을 만한 자취를 찾아 보았더니 묘아래에서 부서진 비석 한조각에 우리의 姓인 "韓"字가 분명하고 公의 諱字인 "謝(사)"字는 오른쪽 모서리의 "才"자는 깨여저 떨어지고 왼쪽 편에 "言"과 중간의 "身"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또 그 아래에 "亞中"두 字가 분명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亞中大夫 諱 謝奇(아중대부 휘 사기)"라고 각자된 부분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산아래 거주하는 태중(台重)이라는 사람을 산지기로 정하여 수호하도록 하고 훗날에 다시 改封築(개봉축)하기로 하였다. 그 후 순조33년癸巳(1833)4월에 후손 思臣(사신),군수 洛轍(낙철)이 경향 각처에 통문을 발송하여 墓下에서 종회를 열고 묘소의 개봉축, 비석의 건립,재실과 위토의 설비등을 숙의하였으나 중론이 구구하여 뜻한 바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비분한 속에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광복후 戊子(1948)년에 후손 복리(福履), 진환(振煥),근섭(瑾燮)등 諸宗의 발의로 각처에서 후손들이 분연이 일어나 합심협력하여 다음해 己丑(1949)년에 봉분을 개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위토를 매입하였으며 재실 봉강재(鳳崗齋)를 건축하고 매년 3월 3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朝請大夫寶文閣提學高陽縣候韓公神道碑銘幷序

維光州治西一舍强棲鳳洞魚登山下丑艮龍子坐午向巳破之原卽高麗朝請大夫寶文閣提學高陽縣候韓公謝奇衣舃攸藏壬燹後失其護世傳以謂韓政丞墓始  正廟辛亥後孫大臣用龜遣諸宗人囑光州羅州兩守宰發民丁搜信跡墓下得破碑一片姓韓字分明諱謝字言身完在才邊剝落又有爵秩亞中  字遂信之改修封塋而未及守護至純廟癸巳京鄕諸宗謀所以伐石表阡建閣置田衆論矛盾因循未果齊恨久矣幸玆往年癸巳宗議詢同飾墓竪表刱齋閣立庖庫置位田歲薦一祀之禮於是乎神理人情庶幾有伸而墓儀完備則準格據禮宜有神道大碑後孫基興상麗史列傳及家藏乘牒屬文於不侫曰是役也後孫在根全擔獻賢云謹叙其兆域顯晦之顚末繼撮世系履歷之梗槪而銘曰

광주읍 서편 30여리 지점인 서봉동(棲鳳洞) 어등산 (魚登山) 아래 축간용(丑艮龍)에 자좌오향(子坐午向)사파판국(巳破版局)인 자리가 바로 조정대부(朝請大夫)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고양현후(高陽縣候) 한공사기(韓公謝奇)의 묘소이다. 임진왜란 후에 실전(失傳) 되었으나, 전하여 오는 말에 의하면 여기가 한정승묘(韓政丞墓)라 하므로 정조15년辛亥(1791)에 후손인 대신 용구(用龜)가 여러 종인들을 현지에 파견하고 나주, 광주 두 군수에게 군민 장정들을 징발하여 信蹟을 찾아 보도록 위촉하였더니 묘 아래에서 파손된 碑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姓자인 韓자는 분명하고 몇몇 글자는 깨어졌으나 존호중의 일부인 亞中이란 두자가 있어 이를 신뢰하고 봉분만은 즉시 수리하였으나 미처 수호 대책까지는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후 순조33년癸巳(1833)에 경향제종이 비석을 세울 것과 재실과 위토를 설치코자 상의하였으나 의론이 합치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음은 심히 유감된 일이었다. 다행히도 지나간 계사년(1953)에 각 종중의 의론이 통일되어 묘역을 미화하고 표석을 세우고 재각을 건립하며 산지기를 두고 위토를 마련하여 歲一祀를 행하게 되었으니 이제야 명명지중(冥冥之中)에 계신 영령께서 후손들의 영모지정(永慕之情)에 다소나마 마음 놓을 수 있게 되었으나 묘의(墓儀)를 완비코자 하면 마땅히 격에 맞는 신도대비(神道大碑)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해서 후손 기흥(基興)이 고려사열전과 家藏인 乘牒을 제시하면서 무능한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는데, 이번 일은 후손 재근(在根)이 전체비용을 부담한 것이라 한다. 삼가 그 산소가 실전되었다가 다시 어렵게 찾게 된 전말을 기록하고 이어서 세계(世系) 내력의 개황을 요점만 따서 銘으로 한다.

淸州氏甲三韓國                 청주한씨  문벌로는  삼한국의  甲族이요
系出父師甚夐邈              箕聖에서  系出되니  淵源이    綿遠토다  
歷世二千文獻逸                 
역년이    이천여에  문헌조차  逸失하여  
宋之徵頗不足                 杷宋歷史  다보아도  오히려    부족하리  
譜自諱蘭世謹詳                 
世系가    昭詳하신  그의鼻祖  한란부터  
紀功壁上諡威襄                 
훈명높은  벽상공신  시호가    威襄이라.  
是公七世遠流光                 
公에게는  七世祖라  그유택이  멀리흘러  
圭組蟬聯世莫望                 
공경대부  계승하니  온세상이  선망하네  
諱奕尙衣院直長                 
諱奕하는  어른께서  尙衣院의  直長이요  
是生希愈虎衛將                 
혁의아들  희유께선  神虎衛의  上將이라  
是生光胤守司空                 
希愈의子  광윤께선  金紫光祿  守司空을  
其子曰康文惠公                 
光胤의子  康하는분  시호는    文惠인데  
歷事三朝勳業崇                 
三代王朝  歷事하니  그勳業이  崇大하여  
名傳輿覽作儒宗                 
儒學界의  祖宗이요  輿地勝覽  이름났네  
是爲高曾祖
禰屬                 이분들이  公에게는  高祖曾祖  祖父父親  
蒸蒸厚蔭乘綿絡                 왕성하게  뻗친蔭德  끊임없이  이어오네  
阿孃任氏咸從籍                 어머님은  함종임씨  全佑氏의  따님인데  
全祐父名主簿爵                 
아버님    전우씨는  벼슬품계  주부시고  
郡夫人號榮須極                 
君夫人의  품계받아  영예가    극진한데  
爰誕我公岐且
嶷                 提學公을  誕育하신  그은덕이  더욱크네   
科蚤棲進途闢                 과거에    장원하여  前途를    개척하니  
提學寶文知制誥                 
寶文閣    提學이요  知制誥에  오르셨네  
于時禿魯質于元                 
이때마침  元나라에  보낼볼모  뽑을적에  
使命之人極
甄                 칙명을    받을사람  극히精選  하였도다  
公實與焉才且賢                 
재능있고  현량하신  公도역시  참여되어  
萬里星
軺卄五員                 만리타국  가는使者  二十五人  동행일세  
於是元朝嘉乃績                 
元나라    조정에서  가상하게  받아들여  
中書員外宣酬特                 
中書員의  관직으로  특별하게  宣授했네  
高陽候與亞中秩                 
고양후와  아중대부  높은벼슬  추봉됨은    
贈追封男貴及                 元나라의  고위관료  아들泳의  特待로다  
公之三配延安李                 
公의配位  세분인데  初配는    연안이씨  
其考汾禧密直事                 
밀직사를  역임하신  汾禧씨의  따님이요  
平康蔡氏繼爲封                 
繼配인    평강채씨  良靖公    仁揆의딸  
仁揆考名良請謚                 돌아보니  인규씨는  시호가    양정이요  
其三鄭氏籍無傳                 
三配인    정씨부인  貫籍이    無傳하나  
仁貴其爺亦宰臣                 
그의부친  仁貴씨는  官職이    宰臣이라  
蔡夫人與鄭夫人                 
채부인과  정부인은  
郡夫人誥
並推恩                 郡夫人의  품계로다  
長男曰渥蔡之出                 
장남에    渥하는분  채부인의  소생이니  
上黨啓封諡思肅                 
책봉上黨  부원군에  시호는    思肅이요  
次房曰泳鄭之育                 
차남에    泳하는분  鄭夫人의  소생이니  
正惠易名官直學                 
집현전    직학사요  諡號는    正惠로다  
季房曰浚官平章                 
끝에아들  浚하는분  벼슬이    平章事라  
三女擇宜次第行                 
세따님을  가문가려  차례대로  출가하니  
金之謙妻女之長                 
長金之謙    
次之所適宋金剛                 
次宋金剛  
盧承緖也季관甥                 
次盧承緖  三人이라  
靈芝根固醴源汪                 
영지는    뿌리굳고  醴泉은    水源길어  
內外昆仍熾且昌                 
직손외손  후예들이  더욱더욱  창성하다  
承繼本支麗不億                 
이어오는  本支孫이  그 수가   천억이오  
勳庸道德世喬木                 
공훈대신  도덕군자  代代로    喬木일세  
生六沙麓                 太妊과    太같은  육왕비를  탄육하니   
始終與國同休戚                 
이나라와  더불어서  운명을    같이하네  
支莊棲鳳隔隣
                지장산과  서봉동이  인근洞에  접했으니  
兩塋先後時                 양대산소  선후따라  향화를    받들도다  
陵園無異元陵批                 
陵園과    다름없다  元陵의    비자있어  
維祖維孫一體輝                 
조상이나  후손이나  모두모두  영광일세  
不是尋常培
比                 평범하게  보아넘길  산언덕이  아닌것이  
淵夷谷實永崔嵬                 
위토는    심곡이나  陵園같은  큰산소라

                                               庚子(1960년)5月 上休  德殷 宋在晟 撰

提學公(제학공) 諱 謝奇(사기) 묘소와 재실 제학공 사기

봉강재;광주직할시 광산구 서봉동 제학공 묘소 입구에 1949년에 건립

제학공의 묘소

제학공 신도비;봉강재 앞뜰에 위치

9世 渥(악)   top

quartz_red.gif 사숙공 유사

quartz_red.gif 사숙공 묘비명

quartz_red.gif 사숙공 사적

quartz_red.gif 사숙공 묘소의 내력

quartz_red.gif 사숙공 묘소

quartz_red.gif 사숙공 묘소 석의시 통문

quartz_red.gif 사숙공 표석음기

quartz_red.gif 사숙공 묘지명

quartz_red.gif 사숙공 위토명세

quartz_red.gif 사숙공 유시

 

 

 

사숙공 유사   사숙공 악

字:子希(자희)號:誠齋(성재)諡號:思肅(사숙) 1274(高麗元宗十五年甲戌)생 1342(忠惠王三年壬午)4.13.졸 향년69
元大德癸卯(1303)至左右衛大護軍密直事左司議尋轉鷹揚軍大護軍 癸丑(1313)悟上旨貶泗川監務後復起追拜同知密直司事 辛酉(1321)麗王東還賜錄功券 明年(1322)加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判典理司事 至元己卯(1339)至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上黨府院君 配享忠惠廟庭 天性溫雅精敏有儒者風臨官處思安詳謹愼登相位憂國如家常救民弊而濟時務每事必三思而行之麗史有傳與地勝覽錄公于淸州人物 
배위 ○卞韓國大夫人原州元氏(변한국대부인원주원씨)父同知密直司事卿(동지밀직사 경의 여식) 祖中贊文純公傳(조부 문순공중찬 부) 曾祖尙書左僕射瑨(증조 상서좌복야 진) 外祖知僉議僖順公開寧洪祿道 ○宋氏 父正尹諱缺字(식별불가)生4男 
子 大淳  公義  仲禮  公衍  方信  公瑞  方道(丁申譜俱不見二男公瑞方道兩派見於戊辰譜末編有文科二字謹按舊碣悉改前錄之) 
女 洪澍: 僉議商議三司左使南陽君南陽人 父判三司南陽府院君諡莊簡 子興代言恩三司右尹懲密直司事唐城君諡匡定贇判書可乳沙門大師 
權恒: 知密直司事安東人 父福安府院君謙 女尹永禮版圖判書贈左贊成坡平人 父鈴平君陟 孫女世祖大王妃貞熹王后

思肅公 諱:渥(사숙공 휘 악)史蹟(高麗史列傳)   사숙공 악

麗史列傳曰韓渥忠宣王時拜右代言忠肅立授選部典書知密直司事元詔王入朝渥從之時瀋王暠覬覦王位讒搆百端渥以奇謀脫王于禍功在一等賜鐵券圖形壁上封上黨府院君賜宣力佐理功臣號累遷贊成事忠惠初進中贊及卒諡思肅後配享忠惠廟庭性謹愼有器局每事必三思而後行稍解蒙漢語子大淳公義仲禮公衍方信大淳官至知都僉議司事忠定末貶爲機張監務公義封淸城君諡平簡中禮官至政堂文學封繼城君公衍覺星大禪師方信官至贊成事封西原君

고려사열전에 한악은 충선왕(재위1309~1314)때에 벼슬이 우대언(右大言)에 배명되었고 충숙왕(재위1314~1331, 1333~1340) 때에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승진되었다. 충숙왕이 元(중국)황제의 입조(入朝)하라는 부름을 받고 원나라에 들어가는데 公이 이를 수행 하게 되었다. 그때 심(瀋)왕 고(暠)가 부당한 허욕에서 분수에 맞지 않는 왕위를 넘겨다 보고 여러 가지 허구의 사실을 꾸며 헐뜯고 비방하여 왕을 괴롭히는지라 公이 탁월한 지혜와 기발한 책모로 간계를 막아내고 왕을 위기에서 탈출케 한 공훈으로 일등공신의 훈패를 하사받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上黨府院君(상당부원군)에 책봉되고 선력좌리공신(宣力左 理功臣)號를 하사받았다. 벼슬이 여러차례 승진하여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충혜왕(재위1331-1333, 1340-1345)초기에 중찬(中贊)이 되시었고 돌아가신 후에는 사숙(思肅)의 시호를 내리고 충혜왕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公은 천성이 근엄하고 신중하며 대인으로서의 기국(器局)을 갖추어 매사를 반드시 세번 생각해 본 후에야 시행하였고 몽고어,중국어에 능통하였다 한다. 아들은 大淳, 公義, 中禮, 公衍, 方信이니, 대순은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역임하였으나 충정왕 말기에는 기장감무(機張監務)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공의는 청성군(淸城君)에 책봉되고 시호는 평간(平簡)이요, 중례는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계성군(繼城君)에 책봉되고, 공연은 각성대선사(覺星大禪師)이며, 방신은 벼슬이 찬성사(贊成事)로 서원군(西原君)에 책봉되었다

★참고사항
思肅公께서는 7男을 두셨는데 고려사열전에는 5男만이 전하여 있고
6男 공서(公瑞); 登科 不仕, 7남 방도(方道); 推忠協贊功臣 匡靖大夫 西海道副元師 諡忠靖公은 기록되지 않았다.

사숙공 묘소  사숙공 악

長湍府五里細谷山酉坐距松林廢縣七十里有表石端宗甲戌玄孫右相確五代孫少尹明澮校理繼禧等改修立短碣後世失護孝宗三年壬辰後孫碩中因求山見舊碣而尋得改封歲祀純祖四年甲子後孫光燮興裕等諸宗倡儀備立石儀改封塋域時誌石露呈字號生卒及有配宋氏生男皆幼云之信蹟得見追載譜板光燮撰守護誌吏判晩裕撰碑銘領相用龜書 

公의 묘소는 장단군 동도면 세천, 속칭 가내곡(長湍郡 東道面 細川) 유좌묘향(酉坐卯向)에 손득축파(巽得丑破) 로 자리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표석이 있었는데 단종2년甲戌(1454)에 현손(玄孫) 우의정(右議政)확(確)등이 단갈(短碣)을 다시 세웠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오랫동안 실호되어 오다가 효종3년壬辰(1652) 에 후손 석중(碩中)이 묘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각처의 山地를 둘러보다가 墓碣을 발견하게 되어 잃었던 산소를 다시 찾게 되어 改封築 하였다. 그러나 석물도 구비하지 못하고 관리와 수호가 소홀하더니 순조4년甲子(1804)에 후손 광섭(光燮), 흥유(興裕)가 여러 宗人들과 合力하여 새로 비를 세우고 상석과 망주(望柱)를 갖추어 건립하고 영역(塋域)을 개봉축하였다. 묘역을 개수(改修)하던 당시에 지석(誌石)이 출토되었는데 석면(石面)에 돌비늘이 거칠게 일어나고 때가 묻었을 뿐 아니라 일하던 연장에 찍히고 긁혀서 파손된 곳이 많았으나 다행히 귀중한 증거가 될 만한 문자가 남아있었다. 즉, 誌文에 "公諱渥字子布自號誠齋至正二年五月十三日卒年六十九(공휘악자자포자호성제지정이년오월십삼일졸연육십구)"라는 문자와 하단에 "有後娶正尹宋某女生四男皆幼(유후취정윤송모여생사남개유)"라는 문자가 분명하므로 諱,字,號는 사숙공을 지칭함은 물론이거니와 卒及,享年은 公이 고려 원종15년 甲戌(1274)에 태어나시고 충혜왕 3년壬午(1342)에 돌아가심을 명시하였고 또 후배위송씨(後配位宋氏)는 정윤宋某(송모)의 딸인데 4男을 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전후 족보에서 아직까지 보지 못한 신적(信蹟)을 오백년 후에 밝힌 것을 흔쾌히 생각하며 그 전말을 譜版에 수록한다

思肅公 表石陰記(사숙공 표석음기)  사숙공 악

장자長子 지도첨의대순 知都僉議大淳 次子 청성군공의淸城君公義 차자次子 계성군중례繼城君中禮 차자次子 대선사각성大禪師覺星공연(公衍) 차자次子 정당문학방신政堂文學方信

景泰五年甲戌二月 日(단종 2년 1454)

5代孫 우의정右議政 확,確, 부사府使 서룡,瑞龍, 현사縣事 려,黎, 봉교奉敎 서봉,瑞鳳, 승丞 서구瑞龜 6代孫 소윤少尹 명회明澮, 록사錄事 명진,明溍, 교리校理 계희,繼禧, 사직司直 계선,繼善, 대호군大護軍 종손終孫 等 입석立石

思肅公 位土明細(사숙공 위토명세) ,사숙공 악

土地所在地

地番

地目

地積

土地所在地

地番

地目

地積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849

255坪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175

13町 9畝

854

260坪

136

1町 1反 1畝

855

155坪

174

6町 5反畝

857

260坪

장단군 장도면 하리

10

8町 5反 9畝

134

 山

1町 4反 6畝

12

5町 2反畝

135

4町 3反 6畝

14

1町 6反 9畝

思肅公墓碑銘(사숙공 묘비명)  사숙공 악

高麗宣力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上黨府院君諡思肅韓公墓碑銘

惟我先祖麗朝右政丞上黨府院君思肅公諱渥字子布號誠齋韓氏貫淸州始祖太尉諱蘭曾祖禮賓卿諱光胤祖中贊修文殿太學士文惠公諱康考寶文閣提學諱謝奇外祖中贊良靖公蔡仁揆公以宋咸淳甲戌生出名臣家登朝歷顯仕若右代言密直司左承旨選部典書知密直司事其著也至治辛酉從忠肅王入元瀋王暠覬覦王位誣搆百端公立不易方以安衆心與同志大臣竭誠保護以奇計脫王于禍功在一等錄鐵券圖形壁上封宣力佐理勳累遷贊成事進中贊當己卯繼序之際奸謀復肆公不離側率衆定策以克廓平國亂庚辰拜都僉議右政丞公歷事四朝盡瘁一節晩以府院君謝事家居至正壬午四月十三日卒享年六十有九後配享忠惠廟庭墓在長湍細谷酉坐原公之精忠偉烈旣以銘鼎彛而耀竹帛矣宜多遺風懿蹟之可垂範於來許者而麗史有傳紀載殊疎略今上壬戌因修墓得石誌叙事實處尤斷缺難徵此後裔之所共歎惜者也其曰性勤愼有器局每事必三思而行稍解蒙漢語此其見公本傳者也其曰號爲積善門天性溫雅精敏目染典訓有儒者風臨官處事安詳謹愼不立崖岸好謀而成及登相位憂國如家常救民弊而濟時務近世論相者無出公右云此其得之遺誌者也槩公之執覊靮備經難危則寗武子之所以衛王患也運籌策潜弭禍難則散宜生之所以盡臣道也其大節之有足以軒天地者如此則傳多所漏誌有未詳又何足恨哉配卞韓國大夫人原州元氏父同知密直卿祖中贊文純公溥墓合窆七男長大淳知都僉議次公義尙書平簡公次仲禮政堂文學次公衍覺星大禪師次方信贊成事西原君次公瑞次方道諡忠靖二女適三司左使洪澍知密直司事權恒誌有繼配正尹宋某女生幾男是則譜牒之所未載也平簡西原兩派甚繁昌而五誕  國母啓佑休簇  聖子神孫纘御丕基而本支克衍百世且名公巨卿輩出蔚焉揚廷佐翊我邦家噫公功烈之盛不惟在於當時而逮于我  朝者亦無窮矣軒冕之舃赫餘慶至今未艾豈非德之積於身者愈厚而慶之流於後者愈遠也歟墓嘗失護而舊有二短表俱闕刻文諸宗將樹碑圖所以久傳而屬筆於晩裕不敢辭謹叙如右且俾同祖公者各思所以仰述而無忝焉爾銘曰

우리 선조 고려조의 우정승(右政丞)이시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이신 思肅公의 諱는 악(渥)이요 字는 자포(子布)요 號는 성재(誠齋)니 청주한씨이시다. 시조는 태위공(太威公) 한란(韓蘭)이시고 증조는 예빈경(禮賓卿) 諱광윤(光胤)이시고 祖는 중찬(中贊)수문전(修文殿)태학사(太學士)문혜공(文惠公) 諱강(康)이시고,考는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諱사기(謝奇)이시며,外祖는 중찬(中贊) 량정공(良靖公) 채인규(蔡仁揆)이시다,公께서 宋나라의 咸淳(도종의 연호)甲戌年(고려 원종15년 1274)에 태어나시니 명문출신으로 일찌기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顯官을 역임하시니 우대언(右代言),밀직사좌승지(密直司左承旨),선부전서(選部典書),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등의 顯赫한 관직이었다. 至治(원,영종의 연호)辛酉年(고려 충숙왕8년 1321)에 왕을 수행하여 元나라에 가셨는데 심왕(瀋王) 고(暠)가 분수 에 넘치는 욕망으로 왕위를 넘보고 허위사실을 만들어 왕을 괴롭히므로 公께서 그 장소에 꼭 지켜 서서 일행을 안심시키고 동행한 대신들과 더불어 성심성의로 보호하고 기발한 계략으로 왕에 미치는 위급한 화를 막아냄으로 인하여 일등공신으로 철권(鐵拳;훈패)에 기록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으며,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에 서훈(敍勳)되시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贊成事(찬성사)로 다시 中贊(중찬)으로 승진 되셨다. 己卯年(충숙왕7년1339)에 王位의 계서(繼序=충숙왕,충혜왕 교체기)가 있을 때 또 다시 奸媒輩=간신배의 소란이 있으므로 公께서 잠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중신들을 거느리고 계략을 세워 국난을 극복 하셨고 庚辰年(충혜왕1년 1340)에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에 拜命되시었다. 公은 4대 왕조를 섬기면서 한결 같이 충성을 다하시고 만년에 府院君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사저에 계시다가 至正壬午(충혜왕3년1342)4월13일에 향년 69세로 졸하시었다. 후에 충혜왕의 사당(忠惠王廟)에 배향되시고 묘는 장단 세곡 유좌에 모시었다. 公의 精忠偉烈하심은 종묘에 비치된 솟(鼎彛)에 새겨있고 죽백(竹帛)에 기록이 소명(昭明)되어 있을 것이요 남기신 풍도와 훌륭한 공적이 후세에 본이 될 만한 것이 많을 것이나 고려사에도 전기가 있기는 하나 그 기재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였다. 純祖2年壬戌(1802)에 묘소를 개사초(改莎草)하다가 誌石이 발견되었는데 사적을 기록한 부분이 심히 마모되고 단절되어 고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자손된 우리가 다 같이 애석해하는 바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公의 품성은 근면하고 신중하며 기국(器局)은 고매하여 모든일을 반드시 세번 생각한 후에 행하였으며몽고어 한어에도 통해(通解)하였다고 한다. 誌石에는 號를 적선문(積善門)이라하고 천성이 溫雅精敏하며 人道의 교훈에 감화되어 유학의 교풍이 있으며 관직에 있어서의 처사는 편안하고 자상하며 조심스럽고 신중하여 모나거나 불화가 없이 좋은 계략을 모색하여 원만히 처리하였다. 벼슬이 재상 지위에 있으매 국정을 내 집 일 같이 걱정하여 항상 민폐를 덜고 時務를 바로잡아 다스렸으므로 근래에 공보다 훌륭한 재상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요컨데 공께서 진두지휘의 책임을 지고 위급에 대비하는데는 녕무자(寗武子)의 주환(主患)을 방위하던 故事와 방불하고 여러모로 智謀를 짜서 침착하게 화난(禍難)을 방지하는데는 산의생(散宜生)이 신하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한 故事 바로 그것이었다. 大義를 위한 큰 절개가 능히 천지를 흔들만 한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傳記에도 누락된 것이 많고 지석에도 소상하게 알길이 없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부인은 卞韓國大夫人 原州元氏이시니 부친은 동지밀직(同知密直) 경(卿)이요 祖는 中贊 文純公 溥(박또는보)이며, 묘는 합장으로 모셨다.  일곱 아들을 두셨는데○장남 대순(大淳)은 지도첨의(知都僉議)요,○둘째는 공의(公義)니 상서평간공(尙書平簡公)이요,○셋째는 중례(中禮)니 政堂文學이요,○넷째는 공연(公衍)이니 각성대선사(覺星大禪師)요,○다섯째는 방신(方信)이니 찬성사 태학사 서원군(贊成事 太學士 西原君)이요,○여섯째는 공서(公瑞)요,○일곱째 방도(方道)는 시충정(諡忠靖)이다.○또한 두 따님이 계시니 장녀는 삼사좌사 홍주(三司左使 洪澍)에게,○차녀는 지밀직사사 권항(知密直司事 權恒)에게 출가하였다.   지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繼配가 있었는데 정윤(正尹) 송ㅇ(宋謀)의 따님으로서 소생의 아들이 몇 명 있다고 하였으나 보첩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平簡公, 西原君의 兩派가 더욱 번창하여 다섯 분 왕비를 탄육하여 경사무궁한 앞 길을 인도하시니 성자와 신손이 왕업을 계승하시고 本孫 支孫이 대대로 번연(蕃衍)하여 유명한 대관이 배출되어 울언양정(蔚焉揚廷)하여 좌익방가(佐翊邦家)하니 참으로 놀랍도다. 公의 위대한 공훈은 그 당시로 그치지 않고 조선조에 까지 무궁하게 흘러 관록의 혁혁한 여경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이것은 곧 큰 積德의 여음이 먼 훗날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묘소가 중간에 실호되어 비석이 두 개나 있었으나 모두 글자가 훼손되어  제종들이 다시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하려고 나에게 비문을 쓰라고 함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이 글을 쓰니 자손된 우리들은 그 유지를 받들어 욕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銘하여曰

   先祖思肅公墓所重尋守護志                                                                                 子元順帝至正2年壬午  至當甲子四百六十三年

公卒於元順帝至正二年壬午四月十三日以八月二十一日葬于長湍府北十五里東道面細谷山酉坐巽得丑破之原未幾當革命之際守護甚疎墓碑遺失壬午後一百十三年皇明景泰五年甲戌二月玄孫右議政確(後拜左相國舅襄節公)府使瑞龍(後資憲贈吏判)縣事黎奉敎瑞鳳丞瑞龜五代孫少尹明澮(後拜領相國舅忠成公)錄事明(後封西原君夷襄公)校理繼禧(後左贊成封西平君文靖公)司直繼善(後戶叅)大護軍終孫(淸城君安襄公)等改竪新碣伊後閱歷島夷七年兵禍畿甸蕩折因爲失護石衛一無存者甲戌後一百五十五年萬曆三十六年戊申夏後孫孝純爲松都留守有書生孫凞祖曁其父順良來言其近長湍地偶見古碣斷缺不全卽高麗侍中韓渥之墓石陰有記云孝純就而審之則此石埋沒於閭閣礎砌之間果是壬午初立表石己酉春改竪於墓前與甲戌碑並立古碣左右兩旁刻其顚末而時當昏朝國事多難不遑私門之事依前失傳矣其後四十三年我孝宗三年壬辰後孫碩中因求山見墓碣而尋得後一百五十二年甲子秋後孫光燮大裕晩裕興裕用龜用鐸等諸宗合力新備墓碣床石望柱改封塋域刊傳顚末於譜板以備千百代昭證

公이 원(元)순제(順帝)至正二年,고려 충혜왕 3년壬午(1342) 4월 13일에 서거하시니 동년 8월 21일 장단부 북방 십오리 지점의 동도면(東道面) 세곡산(細谷山) 유좌손득축파국(酉坐巽得丑破局)에 예장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고려에서 조선으로 혁명이 되는 시기를 당하여 묘소의 관리가 소홀했던 연유로 인하여 묘비까지도 유실하게 되었다.장례 후 113년이 되는 경태(景泰)5년,조선 단종2년甲戌(1454)2월에 현손 右議政확(確), 府使서룡(瑞龍), 縣事려(黎),봉교(泰敎)서봉(瑞鳳), 丞서구(瑞龜), 五代孫 少尹명회(明澮),녹사(錄事)명진(明),敎理계희(繼禧),司直계선(繼善),大護軍종손(終孫)등이 새로 墓碣을 고쳐 세웠으나 그 후 또다시 임진왜란의 7년 병화가 경기 일대를 휩쓸어 산소를 잃어버리고 석물까지도 전부 유실되었다.  묘갈을 세운 甲戌年부터 155년 후인 萬曆36年,선조41년戊申 (1608)여름에 후손孝純이 송도=개성유수(松都留守)로 있었는데 손희조(孫熙祖)라는 선비가 그 부친되는 順良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근처 長湍땅에서 우연히 옛 비석이 발견 되었는대 깨어지고 부셔져서 그 형태가 완전하지는 못하나 고려시중한악지묘(高麗侍中韓渥之墓)라는 刻字가 있고 뒷면에도 기록된 陰記가 있다 하므로 孝純이 그 장소에 달려가 자세히 살펴본 즉 이 비석이 민가의 주초(柱礎)와 섬돌 사이에 매몰되어 있는데 과연 壬午年에 처음 세운 비석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己酉年(광해1년 1609) 봄에 다시 묘 앞에 세우되 甲戌年에 세웠던 비석과 이 고갈(故碣)을 나란히 함께 세우고 양 편에 이 사실을 새겨 두었다. 그러나 그 때는 光海亂政時가 되어서 國事가 혼란에 빠져 私家의 일을 돌 볼 여가가 없음으로 인하여 또 다시 실전되었다가 그후 43년만인 孝宗3년壬辰(1652)에 후손 석중(碩中)이 묘자리를 구하려고 산을 둘러보다가 묘갈을 발견하게 되어 이 산소를 찾았고 그 후 152년 되는 純祖4년甲子(1804)가을에 후손 광섭(光燮),대유(大裕),흥유(興裕),용구(用龜),용탁(用鐸)등이 여러 종인과 합력하여 새로운 묘갈과 床石, 망주석(望柱石) 등을 갖추어 세우고 묘소도 개봉축하였으며 이와같이 여러 차례 실전하였다가 찾은 사실을 譜冊에 등재하여 이후 천만대라도 명백한 고증이 되게 하는바이다.

16대손 광섭(光燮) 敬識

思肅公墓所  石儀時通文(석의시통문)  사숙공 악

惟我 先祖麗朝右政丞上黨府院君思肅公豊功偉烈輝映史策賜以鐵券血食廟庭非但勝國之忠臣入 昭代以後雲仍益昌沙麓之祥維嶽之陞聯綿屢世國朝五后母儀一國前後十公位三台其餘元勳碩德名臣巨卿相望莫非餘陰所爲後者崇奉報本固當自別而今其衣履之藏塋域太半崩短碣幾盡漫旣無諸般石物又無一片床石竊想古昔相位墳山必無若是疎而中間失護必爲冒葬者之破碎滅跡伊後因循尙此儀衛之未備目今所見殆同平人無子孫之山月前權哥凌侮ㅇ葬之變(案山倫葬相訟提移)亦未必不由於此當世之勳業若是其陞盛身後之門여若是其煊爀而今其葬地之燕沒至於此極勢將日就無徵幾何不爲鄕民之조조환葬失傳如前也哉宗末等不勝痛追聚宗相議將自今年營創石物及墓閣位田而所入財力京鄕子孫一齊出力然後可以成事故分定出物數爻逐제後錄玆以發告幸望 僉宗侍刻盡誠意一依宗中定例及期優助無不數停之患幸甚

思肅公 諱渥 墓誌銘(사숙공 휘 악 묘지명)  사숙공 악

  麗朝都僉議右政丞上黨府院君思肅公墓誌銘(只有지銘2字此1行以是撰誌人姓名而只有3字)知製○○安(此1行以是書지人姓名而只有2字)大夫(第1行上款剝落3분1) 重臣德○○尊號曰積善門有三子皆承父業登科第顯名長曰謝奇官(第2行上款剝落3分1) 平康郡夫人蔡氏匡靖大夫中贊良靖公仁揆女也公之二祖旣遺積善○(第3行上款剝落3分1) 重光寺○殿直至元庚寅○散員自是至大德癸卯四轉而至左右○○○(第4行上款剝落3分1) 遷奉○大夫左右衛大護軍密直司左承旨尋轉鷹揚軍大護軍○(第5行上款剝落3分1) 丑○上旨貶川監務後復起進拜同知密直司事至治辛酉遷僉(第6行上款剝落3分1下2分元無字ㅇ)(第7行上款剝落3分1)國宗○在京師之邸者○謀移王位誣(此下空而上之)(第8行上款剝落3分1) 我○○順理入不易方以安衆心遂與同志大臣(此下空而上之)(第9行上款剝落3分1) 朝感悟以(此下空而上之)(第10行上款剝落3分1) 匡靖大夫僉議贊成事旣遺公還國許征東省○○王東還賜錄功券○志無忌進拜重大匡(第11行上款剝落4分1) 事明年加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判典理司事至元己卯先國王○世今○○憂王位(第12行上款剝落4分1) 欲遂○謀公不離○側率衆定策○○踣斃王被(此下空而上之)(第13行上款剝落5分1) 三重大匡僉議右政丞上黨府院君旣二年以府院君謝事家居至正二年四月十三日感疾卒私第秊六十九(第14行上款剝落5分1) 思肅○八月二十一日葬于細谷山公諱渥字子布自號誠齋淸州人也公天性溫雅精敏自幼長於儒門目染(第15行上款剝落5分1) 有儒者風臨官處事安詳勤愼不立崖○謀而成○登相立憂國如家常救民弊而濟時務近世論相者(第16行上款剝落6分1) 密直司事元卿女也○五男二女長曰大淳正順大夫判通○○事次曰公義正順大夫判宗簿寺事全州牧使次曰仲禮(第17行上款剝落6分1) 館○知製敎次曰覺星削髮爲曺溪大師次曰方信中正大夫左司議大夫右文館直提學知製敎女適匡靖(第18行上款剝落6分1) 事洪澍後娶正尹宋(諱字未詳以嚴字亦以ㅇ)女生四男皆幼銘曰(此下空而上之)(第19行上款剝落6分1) 服勞四代社稷○身慶流孝嗣仁睿長近○奸雄詐謀再套○誠掃除犴吠丹券靑○○于後世(第20行上款剝落6分1) 民思復起○○수遺我銘○○筆○傀至正二年月(次下無字)(惟我存先祖思肅公山所曾前失護以後石衛一無所存)

甲子16世孫光燮17世孫牧使大裕兵判晩裕殿令克裕校理興裕正言耆裕承旨致應奉喆裕18世孫禮判用龜吏用鐸正言用儀19世孫別檢象履縣監元履注書兢履等發文京鄕隨力出物新修墓碣床石望柱以8月21日立石10月初7日改封塋域始役時古呈露於墓前而石紋軟處己又爲役丁妄太半刻落猶可明驗者 公諱渥字子布自號誠齋至正2年卒年69云大以此追算則 公生於宋度宗咸淳10年甲戌卒於元順帝壬午矣末段有後娶正尹宋某女生4男皆幼云 父之字號生卒及有繼配擧多男前後前牒所未傳者而獲睹眞蹟於500年之後實爲子孫之幸○刻顚末庸示諸宗追附譜冊以爲傳信於百世後孫光燮謹書禮錢例納秩監兵使50兩留守府尹40兩牧府使20兩郡縣10兩京鄕文蔭武1兩士人5錢而興裕致應以有司禮納特厚用龜以完伯禮錢外別助優厚用鐸以心留禮錢外擔當伐石船運大裕鼎運耆裕樂裕翼鎭始裕用謙元履以文陰邑宰禮納而光迪以武從優再納啓豊亦例納各派士人亦多優納者而文靖公後孫光億別助60兩爲諸道最宗約自此以後特禮錢別助所納買置位田墓閣事完議 墓在長湍北15里東道面加及谷酉坐巽得水丑破

10世 大淳(대순)  top

遺事
생년미상.1355(恭慜王4年乙未)7.1.卒 관작은 推忠協贊功臣匡靖大夫知都僉議司事에 이르렀고 배위는 天安全氏로 同知密直進賢館大提學 信의 女息이다.
고려사에는 공에 대하여 충정왕 원년 (1349)에 동지밀직사사(忠定王元年己丑韓大淳同知密直司事), 충정왕 2년(1350) 5월에 판밀직사사(二年庚寅五月韓大淳判密直司事), 충정왕 3년(1351)에 지도첨의사사가 되었고(三年辛卯韓大淳知都僉議事), 공민세가에는(恭愍世家略曰), "기장감무로 공이 좌천되었고(貶韓大淳爲機張監務), 공민왕 4년(1355) 7월 갑신 초하루에 전지도첨의사사 한대순 졸하다(四年乙未七月甲申朔 前知都僉議司事韓大淳卒)"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의 장례시의 만장(挽章)이 전하는데 아래와 같다.

11世 蕆(천) top

quartz_red.gif 서재공 유사

quartz_red.gif 고려사의 서재공 기록

서재공 유사  서재공 천

號는 서재(恕齎) 관직은 고려조에 등과하여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배위는 광주김씨(光州金氏)이고 대제학(大提學) 진(稹)의 딸이다.
후손에 관하여는 4교 까지는 무후로 기록되어 왔으며 1920년 경신5교에 손록을 기록하였으나 1924년 서재공의 후손을 인정하지 않아 이를 삭제하고 경신보를 폐기하고 갑자보를 다시 출간한 바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謹按太尉公以后傳宗至11世諱無后前後4次大譜及各派譜皆有註明則宗派之后今爲500餘年矣去庚申年居京韓榮浩南原韓圭喆以5校刊出誤譜永爲廢止5校甲子大譜更爲刊出槪錄于此以爲后世之和
6교 정묘보와 7교 인터넷 족보에는 갑자5교의 관례에 따라 서재공의 후손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의 여러 기록과 같이 제주도에 공의 유허지가 존재하고 유허비명 또한 전하여 오며 경신보에 입록되었던 후손들도 현재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koreandb.net의 기록에 의하면, 공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우정승 악(渥)의 손자, 도첨의사(都僉議事) 대순(大淳)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 14)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부(古賦)로 민안인(閔安仁) 등 55인, 십운시(十韻詩)로 임한(林翰) 등 41인을 뽑았으며, 1371년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를 거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으로 찬성사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이성계에 의하여 유배되었으나 뒤에 풀려나와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 태조로부터 전조대신(前朝大臣)71인을 포상하라는 명에 의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어 원종공신전 15결과 노비 2명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권희(權禧) 등과 함께 판삼사사로 치사하였다.
또 다를 기록에 의하면 공양왕 3년(1391) 판개성부사를 역임하고 공양왕 4년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나 동년(1392) 7월 공양왕이 원주로 축출되자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 강회계(姜淮季) 등과 함께 이성계의 제거를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우성범과 강회계는 바로 참형을 당하고, 한천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정의현 가시리(加時里-지금의 표선면 가시리)에 은거하면서 부근 자제들을 가르쳤다. 고종 10년(1873) 제주에 귀양왔던 최익현(崔益鉉) 선생은 그 유허지를 돌아보고 유허비명(遺墟碑銘)을 남겼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탐라의 땅 가시리에.....(중략)..... 공(公)은 여말에 태어나 학행이 뛰어난 절의의 인물로서 국사(國事)를 볼 때에는 문교를 폈고, 나라의 죄인이 되어서도 백성에게 인륜을 심어 주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 20년 신해 2월에 경상도 도순문사로 삼았고, 공양왕 3년 신미에는 판개성부사를 배하였는데 4년 임신 7월 공양왕이 원주에 방치되자 단양군 우성범, 진원군 강회계는 참하고 대제학 한천은 탐라에 유배된 것이 실록이니 백세에 징표함이 족하다. .....(중략)...오호라, 주(周)의 신복(臣僕)이 되지 아니한 기자(箕子)는 동으로 와서 팔조지교(八條之敎)를 배풀어 우리 나라를 문명되게 하였는데 이성(二姓)을 섬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공은 남으로 건너와 향약을 세우고 선비를 가르치니 이 섬에 점점 학문이 일어났다. .....(중략) .....나 익현이 이 곳을 지나다가 남 모르게 감격한 바가 있어 이 글을 적어 유허비명으로 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가시리 상동에 서재공을 모시는 사당(祠堂)이 세워져 있다. 이 곳에 서재공의 사당이 세워져 후손들이 이를 지켜오고 있는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참고문헌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張寬開國原從功臣錄券.

출처 : http://www.bille.pe.kr/yube3.htm, www.koreandb.net/,  www.ijejutoday.com

고려사의 서재공 기록 서재공 천

藝文館大提學韓公諱蕆遺事(예문관대제학 한천 유사)

서재공(恕齎公)에 관하여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高麗史曰). 공민왕 20년(1371) 2월에 한천을 경상도 도순문사로 임명했다(恭愍王二十年辛亥二月以韓蕆爲慶尙道都巡問使). 공양왕 3년(1391)에 한천을 판개성부사에 임명했다(恭讓王三年辛未以韓蕆判開城府事). 공양왕 4년(1392) 7월에 예문관 대제학 한천을 유배 보냈다(四年壬申七月流藝文館大提學韓蕆). 또 려사제강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麗史提綱曰). 공양왕 4년(1392) 7월에 공양왕이 원주에서 왕위를 이성계에게 양위하였다(恭讓王壬申七月王遜于原州). 이태조는 단양군 우성범과 진원군 강회계를 참하고. 예문관 대제학 한천등을 유배 보냈다(斬丹陽君禹成範晉原君姜淮季流大提學韓蕆等于外). 고려사를 살펴보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우성범, 강회계는 살해 당했고 서재공은 외곽에 유배되었다. 이렇듯 두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과 지조가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 마치 해와 달처럼 환하다.

11世 정추(鄭樞)

도첨의공(都僉議公) 대순(大淳)의 사위로 字는 공권(公權)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며 청원군(淸原君)에 봉군되었다. 과거에 등과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내고 有文章節行圖齎集行世淸州人이다. 父는 直提學追封守侍中淸河府院君誧이고 子에 鄭捻은 登第壯元 朝鮮朝政堂文學西原君文愍初奉使不還하고 復齎集이 있으며, 次는 鄭拯으로 檢校漢城尹一作同知捻制이며 次는 鄭擢으로 文科右議政淸城府院君 諡翼景이고 春谷集이 있다. 또한 次는 鄭持인데 文持平이고, 女는 陽城人李贇으로 牧使를 지냈고 父는 侍中春富이다. 次女는 順興人安純文으로 贊成事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諡靖肅이며 父는 興寧府院君景恭이다.

11세 洪師禹(홍사우)   top

도첨의공(都僉議公) 대순(大淳)의 사위로 순문사를 지내고, 부친은 언박(彦博)으로 정승(政丞)에 올라 남양후(南陽候)에 봉해지고 諡號는 문정(文靖)이다.○子에 長은 홍이(洪彛)로 친종호군(親從護軍) 一云 관찰사(觀察使)이고, 次는 홍륜(洪倫)인데 공민왕지훙유죄(恭愍王之薨有罪)로 피주(被誅)되었다.

 10世 公義(공의)   top

평간공 유사

평간공 묘지명

평간공 공의 유사  평간공 공의

字는 宜之(의지) 號는 栢堂(백당)이다. 1307년(忠烈王33 丁未)에 출생, 충정왕조에 등제하여, 삼중대광보조공신(三中大匡補祚功臣)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청성군(淸城君)에 봉군되었다. 1365년(恭慜王14 乙巳) 10월 상서(尙書)로 세상을 떠나니 享年이 59세이고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성품은 자상근검(慈詳勤儉)하며 모든일을 행함에 예법을 따랐다. 충정왕3년(1351辛卯)에 충정왕이 손위(遜位) 하는 날 백마산 아래에 나아가 음식을 올려 충정을 다 하였다(奏食白馬山下人以爲忠). 충정, 공민 양조에 형부상서를 지냈으며 청주읍지에 청주인물로 기록되었다. 고려 충열왕33년 丁未(1307)에 공이 개성 태평관 서쪽 양온동(良醞洞) 집에서 태어나니 강감찬,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같은 동리이다. 이곳을 낙성동(落成洞=강감찬이 卒할 때 별이 떨어졌다는데서 緣由함) 혹은 하마원(下馬園=중국의 사신이 下馬하는 곳이다)이라고 한다. 충혜왕때 공이 전주목(全州牧)으로 가서 혜정(惠政)을 하였다(輿地勝覽에 記錄됨). 공민왕6년 丁酉(1357)에 진하성절사(賀聖節使)로 元에 다녀왔다.
○배위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밀직사우대언(密直司右代言) 사만(斯萬)의 딸이고, 조부는 판통예원사(判通禮院事) 수(綏), 증조는 호부상서(戶部尙書) 번(蕃), 외조는 찬성사(贊成事) 장경공(章敬公) 청주 정해(鄭楷)이다.
○묘소는 장단 주을동(注乙洞) 계좌(癸坐)에 상하조(上下兆)로 사숙공(思肅公)의 묘소와 70리 거리에 있는데 갑신년에 장단군 진동면 서곡리로 이장하였으며 계유년(1993) 청명절에 묘비를 새로 세웠다. 묘비의 비문은 한산군(韓山君)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작품이다.

高麗國重大匡淸城君贈諡平簡公 諱 公義 墓誌銘 평간공 공의

奉翊大夫藝文館大提學 李穡 撰(봉익대부예문관대제학 이색 지음)         

공민왕14년(1365 乙巳)에 평간공(平簡公)이 비로서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에 세정하례(歲正賀禮)를 하기 위하여 원나라 수도로 사절을 보내려고 재신(宰臣)들이 입대(入對)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원나라 승상이 궁전 뜰에서 개갑(鎧甲=갑옷)으로 천하를 호령하니 조근회동(朝覲會同)이 다른 때와 비할 바가 아니어서 신등은 실로 적격한 사절을 선정하기 곤란하오니 죽음을 무릅쓰고 청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즉시 傳旨를 내리기를 "한모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하고 공을 불러들여 친히 보고 유시하기를 “정유년(공민왕6년 1357)에 성절(聖節)을 하례하러 갔을 때 무난하게 일을 잘 처리하고 왔으므로 내가 그대를 가상히 여겨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네가 또 가되 공경히 할찌어다.” 하니 공이 再拜하며 아뢰기를 “신과같이 불초한 자가 樞府의 자리만 지키고 다른 재능이 없어 성은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찌 감히 사명을 피하오리까?”하고  사절로 가니 과연 왕의 뜻에 부합한 바 있었다. 얼마 후 封君되어 집으로 돌아가(史書에는 공이 신돈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재기를 바라던 중 별세한 것으로 되어있음) 다시 기용되기를 기다렸더니, 아!, 슬프다,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公의 성은 한씨이니 청주인이다. 원조(遠祖) 란(蘭)은 개국의 공이 커서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고 그 후 이름이 있는 분은 康이니 원종 때에 성균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충렬왕을 도와서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로 국가의 고시를 관장하였으며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하니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문혜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를 낳았고 간의공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악(渥)을 낳으니 시호는 사숙(思肅)이며 충숙왕이 원나라에 참소 당하여 욕보고 있는 것을 기발한 계책으로 왕을 위기에서 구하였고 또, 충혜왕을 도와서 두 번이나 정승이 되어 태묘(太廟)에 배향되었다. 사숙공이 동지밀직전리판서(同知密直典理判書) 원경(元卿)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장남 대순(大淳)은 벼슬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였고, 중례(中禮)와 방신(方信)은 다 政堂文學이고 公은 차서에 있어 그 둘째였다. 형은 아우를 우애하고 동생들은 형에게 공손하여 사람들이 모두 형제애를 흠모하였고, 또 다른 형제는 불법을 배워 각성(覺星)이라 이르니 조계종의 학자이다. 공의 이름은 공의(公義)요, 자는 의지(宜之), 향년 59세이다. 처음에는 門蔭으로 녹남부사(錄南部事)가 되었더니 충혜왕이 알아보고 특진하여 護軍에 제수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호군(大護軍)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다. 그 때에도 안정되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굳은 심기로 인해 세상일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전주목(全州牧)으로 나가 백성에게 惠政을 베푼 바 있고 충목왕 때에 소부(小府), 위위(衛尉), 선공(繕工)의 세 判事를 역임하였고 충정왕 때에는 代言에 발탁되었는데, 왕이 손위(遜位=왕위를 공민왕에게 물려 줌) 하던 날 백마산(白馬山) 아래로 달려가 음식물을 바치고 사사로 사람에게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모름지기 시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今上(공민왕)이 공의 충성심을 알고 그 재능을 시험한 것이 오래전이더니 관제를 개정하면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고 곧 호부상서(戶部尙書), 다음해 형부(形部)로 옮겼는데 토지에 대한 송사가 법대로 처결되지 않는다고 여러 사람들이 떠들다가 공이 들어가서 일에 따라 적절히 처결하니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조정에서 결재할 때 가능하지 않은 것은 반복해서라도 그것을 고친 후 서명하였다. 부인 경(慶)씨는 右大言 사만(斯萬)의 따님이요, 찬성사(贊成事) 정해(鄭瑎)의 외손인데 남편에게 화순하고 자녀들이 본 받는 어머니였다. 아들 셋이 있는데 脩는 학문을 좋아하고 옛 것에 능하여 과거급제를 거쳐 관직에 나가 현재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있으며, 다음 理도 역시 과거급제하여 현직 개성판관(開城判官)이요. 그 다음 齊는 별장으로서 과거를 보려고 학업을 닦고있고 딸 3명은 모두 일찍 죽었는데 종부령(宗簿令) 김사겸(金士謙)과 삼사우윤(三司右尹) 이창로(李彰路)와 군부판서(軍簿判書) 염흥방(廉興邦)은 그의 사위들이다. 손자가 넷인데 우복(右復)은 별장(別將)이요, 다음이 선복(善復)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손녀는 5명이고 외손자는 김우(金禑)는 권무(權務)이며, 손녀2명이 있다. 장차 12월 甲申日에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산기슭에 장사 지내려 하는데 脩와 興邦이 와서 墓銘을 내게 구하니 공의 아들과 사위는 모두 나의 벗들이다. 벗의 아버님 묘에  銘하는 것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공께서 자상근검(慈詳勤儉)하셨고 예법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蘊하였으나 發치 아니하여 경세제국(經世濟국)의 기량을 갖추었으되 하루도 국정을 맡지 못함도 역시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언행을 바로하고 자식을 잘 가르쳤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아름다운 시호를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후세에 전하기에 족하며 유감이 없다. 銘에

문혜공의 손자요 사숙공의 아들로서                                                                      文惠之孫 思肅之子
어질고 후한 형제들이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었도다                                          振振弟兄 克世其美
공이 총릉을 섬겨 시종 한결같으매                                                                        公事聰陵 旣有終始
금상은 그의 충성을 묻지 않고 먼저 재능을 시험하였다                                            不問其忠 其能可使
두 번 원에 가서 조관하고 돌아오니 마음에 들게 하였다고 칭찬하였다                       再覲大庭 還必稱旨
이에 여러 사람이 때가 왔다고 하였으나 공은 물러나고 말았도다                              衆曰時哉 公則退矣
이때의 높은 공도 이보다 더 할리 없었건만                                                              維時巍巍 莫或尙此
필경 이에 그치고 말았으니 누가 하늘의 이치를 징험할 것인가                                  而止於斯 孰徵其理
내 여기에 시를 지어 오는 세상에 이것을 물으리라                                                   我庸詩之
訉來世

11世 脩(수)   top

문경공 유사

문경공 문집 서문

문경공 묘지명(원문)

문경공 문집 중간 서문

문경공 묘지명(역문)

한씨4자명설

문경공 유사(고려사 열전)

주경설발

문경공 사제문

 

문경공 수 유사

字는 맹운(孟雲) 號는 유항(柳巷)이다.  1333년(忠惠王3年癸酉)8월22일 출생하여 1347년(충목왕3 丁亥)15세의 나이로 文科에 급제하였다.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에 오르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청성군(淸城君)에 봉군되었으며,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三朝에 歷事하였다. 신돈이 득세할 때 공민왕에게 신돈이 위험한 인물임을 아뢰어 치란후 왕이 감복하였다(辛旽得於王公密啓旽非正人恐致亂後王服). 그의 학문행의가 후세에 문집이 간행되고 금석지각 역시 다수 전한다. 1384년(禑王10 甲子) 3월28일 졸하니 享年이 52세이고, 諡號는 문경(文敬)이다. 與地勝覽에 淸州의 人物로 기록되었다. 배위는 정녕택주안동권씨(靜寧宅主安東權氏 ?~1420:세종2년 庚子 )로 父는 시중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적(權適)이고, 外祖는 익산군(益山君) 남양인 홍운수(洪云遂)이다. 묘소는 장단군(현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細谷 子坐에 雙兆이고 表石은(長湍郡細谷子坐雙兆有表石), 목은 이색이 묘지명을 지었으며(牧隱李穡撰誌), 癸酉年 淸明節에 墓碑를 다시 세웠다.양촌 권근 찬 문집서문(陽村權近撰文集序)과 후손 서평군 준겸이 전라감사일때 다시 발간한 유고(後孫西平君浚謙以湖伯重刊遺稿), 후손 남당 원진이 지은 주경설 발문(後孫元震撰主敬說跋)등이 개성부내(開城府內),양주송산(楊州松山),여주봉잠서원(驪州鳳岑書院)에 있다.

文敬公諱:脩 墓誌銘  문경공 수

輸忠贊化功臣 匡靖大夫 判厚德府事 右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淸城君 贈諡文敬 柳巷韓先生 墓誌銘幷序

韓山君 李穡 撰          

 子年十六七喜從詩僧遊至妙蓮寺儒釋雜坐啜茶聯句文敬公年纔十二三每有的對衆皆驚嘆雖老於文墨者推讓不敢齒子固心異之歲丁亥吾先君知貢擧文敬果中高第時年十五歲也落第者服其才皆曰韓生非僥倖也先是以門蔭再爲眞殿直別將以故不求仕討論墳典從益齋先生讀左傳史漢作字眞草皆入妙歲己丑聰陵(忠定)襲位補德寧府注簿召置政房爲必闍赤歲辛卯遜于華公從之居玄陵召還不卽用歲癸巳始授典儀注簿又爲必闍赤明年遷典理佐郞知製誥又明年再遷通直郞成均直講奉善大夫成均司藝兼藝文應敎知製誥歲丙申改官制爲中散大夫秘書少監知製誥明年遷兵部侍郞翰林待制兼史館編修官知製誥秋陞直學士又明年進中大夫國子祭酒知製誥歲辛丑國家避沙賊于安東(按史恭愍十年辛丑十一月王避紅賊亂南狩)歲壬寅再轉典儀典校二令階中正明年秋遷京加奉順大夫判司僕寺事右文館直提學冬拜正順大夫密直司右副代言寶文閣直提學知製誥知工部事(一作典工寺事)盖用公知銓選也明年進右代言又進左代言歲乙巳春辛旽得幸於王其跡甚秘公知之密告曰旽非正人恐致亂願上思之非臣誰敢言上方愛辛旽夏判書禮儀秋進軍簿盖疎之也冬十月丁父憂終三年制上以前言猶不用辛亥秋旽敗上曰韓脩有先見之明可急召來授榮祿大夫吏部尙書修文殿學士居數日上念銓選重事也非聰敏精密不足以授其器柄吾思惟韓脩其人也於是以正議大夫拜密直司右承宣寶文閣學士知製誥知民部事知銓選冬進左承宣兼判衛尉寺事充春秋館修撰官知摠部事知銓選歲乙卯夏進拜奉翊大夫密直提學藝文館提學同知書筵事秋陞簽書同知春秋館事明年正月改副使俄進同知夏五月同知貢擧取今判書鄭摠等三十三人時稱得士冬進知司歲戊午封上黨君階大匡館職改進賢館大提學賜輸忠贊化功臣之號己未冬以書光巖碑(恭愍王爲其妃魯國公主立碑)功復簽書明年春封淸城君階重大匡歲壬戌扈從南京明年秋錄拜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功臣號如故歲甲子三月(或作二月)二十八日以病卒于第上悼甚遣朋酒誄書以致祭諡曰文敬國人皆歎悼曰斯人也年纔五十二而遽亡天道奚爲至此耶卜日葬于臨津縣瑞谷南麓先塋禮也韓氏上黨大家曰蘭三韓功臣也曰謝奇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製誥於公爲曾祖曰渥宣力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黨府院君諡思肅佐忠惠王位冢宰功在社稷配食宗廟於公爲祖思肅生子五人皆爲名宰相其諱公義者由密直封淸城君諡平簡娶密直司左代言兼監察執義慶公諱斯萬女於公爲考妣元統癸酉八月二十二日生公諱脩字孟雲娶檢校門下侍中吉昌府院君權公諱適之女益山君洪公諱云遂之外孫也生四男六女南長曰佑復改尙桓前三司右尹次曰善復改尙質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平壤尹次曰尙敬今爲工曹摠郞兼尙瑞少尹知製誥次曰尙德今爲宗簿寺丞孫男女若干人右尹娶門下評理尹承順之女生二女幼黜陟娶門下侍中李成林之女生一女適前宗簿寺丞姜策再娶知淸風郡事宋臣義之女生女幼摠郞娶前版圖判書吳俊良之女生一女幼寺丞娶前代言李貴生之女女長適三司右尹安景儉生五女一男次適成均直講李作生二男一女皆幼次適大護軍權邦緯次適前護軍任仲善生四男次適懿德府丞朴登次適中郞將田甫長聰敏好讀書以病廢業黜陟庚申科第三名摠郞壬戌科第三名季寺丞乙丑科第九名以國制三子登科廩其母終身今權夫人封爲靜寧宅主享其榮養公之含笑地下可知己公之仙去今己八年而聲音容貌在吾心目何日而忘之耶黜陟公請銘幽堂子以病未果者久矣日遠而請愈勤嗚呼吾以文敬之請甞銘其考平簡公矣今又銘文敬其亦可悲也己銘曰

문경공 묘지명  문경공 수

한산군 이색 지음       

내 나이 16~17세 때 시승(詩僧)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여 묘연사(妙蓮寺)에서 유생(儒生)과 승려가 한자리에 어울려 차를 마시며 시구를 지을 때 文敬의 나이 12~13세로 늘 같이 대구(對句)를 하니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다 놀라 문묵(文墨)으로 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에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더니 丁亥年(忠穆王3年1347元順帝至正7年)에 내 부친께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을 때 文敬이 과거에 급제하니 이 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낙제자들도 그의 재능에 감복하여 모두 말하되 한생은 실력으로 급제한 것이지 요행으로 붙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선조와 가문의 음덕으로 진전직별장(眞殿直別將)을 거듭하고는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經典을 토론하고 익재선생(益齋先生)을 따라 좌전사한(左傳史漢)을 읽고 글씨도 진초(眞草)가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己丑年(1349)에 聰陵(忠定王)이 왕위를 이어받자 德寧府注簿(덕녕부주부)에 보임하여 정방필도적(政房必闍赤)을 삼았다. 辛卯年(忠定王3年1351)에 강화도에 遜避할 때 공이 함께 가 있더니 玄陵(공민왕)이 소환하여 곧 임용치 아니하였다. 癸巳年(恭慜王2年1353)에 처음으로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고 또 闍赤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전리좌랑 지제고(典理佐郞 知製誥)로 옮겼고 다음해에 다시 통직랑성균직강 봉선대부 성균사예(通直郞成均直講 奉善大夫 成均司藝)로 옮겨 예문응교 지제고(藝文應敎 知製誥)를 맡았으며, 丙申年(恭慜王5年1356)에 관제를 바꾸어 중산대부 비서소감지제고(中散大夫秘書少監知製誥)가 되고 다음해에 병부시랑한림대제겸 사관편수관지제고(兵部侍郞翰林待制兼 史館編修官知製誥)로 자리를 옮겼고 가을에 直學士로 승진 임명되고 다음해에 진중대부 국자제주지제고(進中大夫 國子祭酒知製誥)가 되고 辛丑年(恭慜王10年1361.11)에 국가(왕)가 安東으로 少賊(홍건적)을 피해서 갔다. 壬寅年(恭慜王11年1362)에 전의전교이령(典儀典校二令)에 재전임되고 位階가 中正이 되었고 다음해(1363) 가을에 개경으로 돌아와 봉순대부 판사복사사 우문관직제학(奉順大夫 判司僕寺事 右文館直提學)이 된 후 겨울에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諸學) 지제고(知製誥)지공부사(知工部事또는 典工寺事)가 되셨으니 공은 늘 지전선(知銓選)에 임용되었다. 다음해에 右代言으로 다시 左代言으로 승진하였다. 乙巳年(恭慜王14年1365)봄에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를 얻고 있으나 그 행적이 심히 비밀스러움을 공이 알고 왕에게 조용히 고하기를 "신돈은 정상인이 아닌것 같아서 정란의 염려가 있으니 왕께서는 이점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러한 얘기를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왕은 신돈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할 때였으므로 공을 여름에 판서예의(判書禮儀)에 가을에 군부(軍簿)에 임명하니 이는 공에 대한 왕의 대접이 소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제를 마쳤으나 전에 신돈에 대한 직언 때문에 왕이 섭섭히 여겨 임용치 아니하였다. 辛亥年(恭慜王20年1371) 가을에 신돈이 축출되자 왕이 이르기를 "한수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다. 속히 불러 들이라" 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이부상서(吏部尙書)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를 제수하고 수일 후에 왕이 "전선(銓選)은 중대사로 총민정밀(聰敏精密)치 않으면 그 중책을 맡길 수가 없으니 내가 생각컨데 한수가 그 일에 적임이다 "하고 정의대부(正議大夫)로 승진시켜 밀직사(密直司)우승선(右承宣)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지제고(知製誥)지민부사(知民部事)지전선(知銓選)을 삼고 겨울에 좌승선(左承宣)겸 판위위사사(判衛尉寺事)충춘추관수찬관(充春秋館修撰官)지총부사지전선(知摠部事知銓選)으로 승진하고 乙卯年(禑王1年1375) 여름에 봉익대부(奉翊大夫)밀직제학(密直提學)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동지서연사(同知書筵事)로 승진하고 가을에 첨서동지춘추관사(簽書同知春秋館事)로 승진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副司가 되고 同知에 올랐으며 5월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금 判書로 있는 정총(鄭摠)등의 33인을 뽑으니 옳은 선비를 바로 뽑았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겨울에 지사(知司)로 승진, 戊午年(禑王4年1378)에 上黨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대광관직(大匡官職)이 되었다가 다시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 되어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己未年(禑王5年1379) 겨울에 광엄비(光巖碑=恭愍王妃 즉, 魯國公主의 비석)의 글씨를 썼고 다음해(1380)봄에 淸城君에 봉해지고 重大匡이 되었고 壬戌年(禑王8年1382)에 왕을 호종하여 南京에 갔었고 다음해 가을에 그 공을 기려 광정대부(匡靖大夫)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功臣號는 전과 같았다. 甲子年(禑王10年1384) 3월(혹은 2월이라고도 함) 2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왕이 슬퍼하여 술과 애도의글(朋酒誄書)을 보내어 이를 치제(致祭)하고 諡를 文敬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애도하기를 이 사람의 나이 이제 겨우 52세 인데 이렇게 빨리 거두어 가니 천도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였다. 날을 골라 임진현서곡남록(臨津縣瑞谷南麓)선영(先瑩)에 장례를 치루었다. 한씨는 청주의 大家이니 蘭은 三韓공신이고 증조는 謝奇로 첨의부좌사의대부(僉議府左司議大夫) 보문각제학 (寶文閣提學)지제고(知製誥)이며 祖父는 渥으로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시호는 思肅이며 충혜왕을 도와 벼슬이 재상에 이르러 功이 사직에 미쳐 宗廟配食(종묘에서 제사를 모심)을 하였으며 思肅이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명재상이었다. 또한 부친은 諱를 공의(公義)라 하는 분이며, 密直으로 청성군(淸城君)에 봉하고 諡를 평간(平簡)이라 했고 밀직사좌대언(密直司左代言)兼 감찰집의경공(監察執義慶公) 사만(斯萬)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으니 이 분들이 곧 공의 부모님이시다.元統 癸酉(忠肅王1年1333元順帝元統1年) 8월 22일이 공의 생일이고 諱는 수(脩)요, 字는 맹운(孟雲)이며 검교문하시중(檢敎門下侍中)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적(權公諱適)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으니 익산군(益山君) 홍운수(洪公諱云遂)의 외손이시다. 4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우복(佑復)이라 했다가 尙桓으로 개명하여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지냈고 둘째 선복(善復)은 尙質이라 개명하였으며 서북면도관찰출척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평양윤(平壤尹)이고 다음 尙敬은 지금 공조총랑(工曹摠郞)겸 상서소윤지제고(尙瑞少尹知製誥)이며 다음 尙德은 지금 종부사승(宗簿寺丞)으로 있으며 손자 손녀가 약간 명 있다. 삼사우윤(三司右尹)상환(尙桓)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의 딸과 결혼하여 2녀를 낳으니 어리고, 출척사(黜陟使) 상질(尙質)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낳아 전 종부사승(宗簿寺丞) 강책(姜策)에게 출가시키고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송신의(宋臣義)의 딸과 재혼하여 딸을 낳으니 또한 어리고 총랑(摠郞) 상경(尙敬)은 전 판도판서(版圖判書) 오준량(吳俊良)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으니 아직 어리다. 종부사승(宗簿寺丞) 상덕(尙德)은 전 대언(代言) 이귀생(李貴生)의 딸과 혼인하였다. 장녀는 삼사우윤(三司右尹)안경검(安景儉)에게 출가하여 1남 5녀를 두었고, 차녀는 성균직강(成均直講)이작(李作)에게 출가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다음은 대호군(大護軍) 권방위(權邦緯)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전 호군(護軍)임중선(任仲善)에 출가하여 4남을 두었으며, 다음은 의덕부승(懿德府丞) 박등(朴登)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중랑장(中郞將)전보장(田甫長)에게 출가하니 총민하여 독서를 즐겼으나 신병으로 과업을 그만 두었다. 출척사(黜陟使)상질(尙質)은 庚申年(禑王6年1380)과거(科擧) 3명에 합격하였고, 총랑(摠郞)상경(尙敬)은 임술과(壬戌科,禑王8年1382) 3명에 합격하였으며, 끝의 사승(寺丞)상덕(尙德)은 을축과(乙丑科,禑王11年1385) 9명에 합격하니 나라의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모친은 종신토록 나라에서 녹을 주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 權夫人이 정녕택주(靜寧宅主)로 봉해져서 그 영예를 누리고 있으니 公도 지하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난지 8년이 지났으나 그 목소리와 모습이 아직도 내 눈앞에 삼삼하니 어느 날 이를 잊으리요. 尙質이 공의 묘비명을 나에게 지어 달라고 하였으나 내가 병으로 오랫동안 짓지 못하였더니 다시 청하여 왔다. 내가 文敬의 청으로 그의 부친 평간공(平簡公)의 銘을 지었는데 지금 또 文敬의 명을 짓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銘에

文敬公柳巷先生 諱:脩 遺事(고려사열전)  문경공 수

韓脩字孟雲年十五中第善草隸忠定王命爲政房必及王遜于江華脩從之由是名重一時恭愍王召復爲必赤累遷代言典銓選辛旽方得幸於王其跡甚秘脩知之密啓旽非正人恐致亂願上思之非臣誰敢言王方惑旽拜脩禮儀判書蓋疎之也旽敗王曰脩有先見之明授吏部尙書修文殿學士尋復拜右承宣知銓選辛禑立拜密直題學陞同知密直尋以韓安之族流于外召還封上黨君賜輸忠贊化功臣號封淸城君以判厚德府事卒人皆惜之諡文敬官葬事學識行義爲世所重柳巷集行于世子尙桓尙質尙敬尙德

고려사 열전에 이르기를 한수의 자는 맹운으로 15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초서나 예서를 잘 썼으며, 충정왕이 정방필도적으로 삼았다. 왕이 강화에 손위후 피신하였을때 수행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공민왕 즉위 후에도 불러 필도적을 삼았다가 여러 번 자리를 옮긴 후 대언이 되었다가 銓選(전선;국가고시의 시험관)이 되었다. 신돈이 왕의 사랑을 얻고 있었으나 그 행적이 심히 비밀하고 의심스러워 이를 공께서 이를 알고 왕에게 진언하기를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아님으로 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이 점 유의하셔야 할것입니다, 신이 아니면 감히 누가 이런 말을 올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왕이 한참 신돈에게 혹하여 있던 때라 공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예의판서로 보냈으니 이는 소원(疎遠)함이라. 그 뒤 신돈이 패하고 나니 왕이 한수는 선견지명이 있다 하고 이부상서수문전학사(吏部尙書修文殿學士)를 제수하고 다시 우승선지전선(右承宣知銓選)으로 옮겼다. 우왕(辛禑:위화도회군후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하여 폐위시킴)이 등극하고는 밀직제학(密直題學)이 되고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승진하였다가 한안(韓安=서원군 휘방신의 아들로 문경공과는 4촌간임. 자제위 홍륜의 공민왕 시해에 연루자로 몰리어 주살당함)의 족이라 하여 외직으로 보냈다가 다시 소환하여 상당군(上黨君)에 봉하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호를 내리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였다.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로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諡號는 문경(文敬)이라 하고 관에서 장례를 보살폈으며 학식이 깊고 행실이 올 바르셔서 세상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문집으로 류항집이 있고 아들은 상환, 상질, 상경, 상덕이 있다.

文敬公 賜祭文  문경공 수

 遣 密直司知申事右文館提學春秋館修撰 廉廷秀 致祭     

  王若曰死生之理通乎陰陽是人物之常道君臣之義篤於終始爲國家之恒規所事之師儒宜特加於恩禮故輸忠贊化功臣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韓脩學傳廉洛筆繼鍾王早承先考之知久荷代言之職入告于后必陳經世之謨愼簡乃僚受傳子之命玆以幼沖之年獲聞敎誨之言何其天不弔以降災子靡堪於多難中罹變故雖廢斥以投閑終謂登庸必都愈而致理胡不幸而短命乃莫相於我家興言及玆痛悼無己今遣密直司知申事右文館提學知製誥充春秋館修撰官知典理司事廉廷秀賜酒往奠嗚呼氣有聚散卿隨物化而不疑人無老成子念邦悴而有尙期貞魄應此寵章故玆敎示想宜知悉

 遣 密直司知申事右文館提學春秋館修撰 廉廷秀 致祭     

王은 말하노라. 生과 死의 이치는 음양과 통하나니 이것은 사람의 정상적인 길이요. 왕과 신하의의 義는 처음과 끝이 견고하니 국가의 일정한 규칙이다. 하물며 친히 섬긴 스승이요, 巨儒니 특별히 사례를 가해야 할 것이다. 故 輸忠贊化功臣 匡靖大夫判厚德府事 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 韓脩는 학문은 廉洛의 전통을 이어 받았고 筆法은 王羲之를 이었다. 일찍이 先考(공민왕)의 명을 받아서 곧 代言의 직책을 맡았으니 임금께 고하면 반드시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을 말하였으므로 신중히 동료 중에서 선택하여 나의 스승으로 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가르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재앙을 내리니 나는 많은 고난을 이길 수 없었다. 중간에 변고를 만나 폐척되어 한가한 땅에 있었지만 마침내는 다시 등용되어 반드시 都愈의 정치를 이루리라 했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우리 집안을 돕지 못하는구나. 말이 여기에 미치니 마음이 아프고 슬픔이 한이 없다. 이제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우문관제학지제교(右文館提學知製敎)충춘추관수찬관(充春秋館修撰官)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염정수(廉廷秀)를 술을 주어 보내 奠하게 하노라. 아!, 기를 모으고 흩어짐에 卿은 物化를 따라 선뜻갔지만 老成한 사람이 없으니 나는 나라가 병들 것을 생각하니 슬프도다. 지금도 곧은 넋이 나의 마음의 글월을 받아줄 줄 믿는다.이와 같이 교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모두 알지어다.

柳巷先生 韓文敬公 諱:脩 文集序  문경공 수

近世名卿有若柳巷韓文敬公志行之高見識之明爲一時士林之模楷而書法絶倫爲一世之所重也遇知玄陵(恭愍王)久居喉舌嘉謀啓沃裨益弘多及其待人接物必施以誠不妄毁譽所與從遊牧隱平齋諸公又皆搢紳之選漸濡磨礱相觀而善亦可謂極矣公之典銓選也子以後進忝爲僚佐嘗一日同直闕下子方食觀書公笑曰我知君不主敬口有食目有觀心主一乎子聞之悚然自後雖不能勉亦不敢忘公之一言爲吾終身之益凡公所以規正於人者皆此類也公於詩早有聲爲益齋稼亭所稱賞晩乃益進謹守三尺有問之者必竭兩端陶隱輩始得盛名凡有著述必詣公就正有所去取莫不忻然而服充然而歸以子不敏往往亦幸得蒙不鄙而領之者矣公有四子皆克肖相繼捷高科者三人箕裘相業福祿未艾由公敎誨之力也甞典貢擧所取多達官聞人世皆服其鑑裁之精嗚呼公言行才識皆可爲士君子之師範詩特其緖餘爾晩年閒居又與牧隱同里閈杖履相邀昑哦往復二老風流高致讀其詩可以想見也柳巷其里名因以自號平生著述自以不滿而不收捐館之後諸子裒集逸藁得若干首眞所謂泰山之毫芒也然觀其簡潔冲澹高出意表如聞玉聲淸越以長多乎哉不多也仲子政堂尙質與兄弟謀將壽諸楸以子事公久托以序不獲辭爲略敍公言行大槩以冠編首俾後之觀公詩者知其可法不但於詩而己

근세의 名卿으로 류항 한문경공은 행실이 높고 식견이 밝아 사람들의 모범이 되셨고 필법이 탁월하여 세상이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으며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좋은 정책을 주관하였으며 사람이나 모든 일을 대할 때 성심을 다하고 함부로 헐뜯거나 칭찬하지 않으며 더불어 친교하는 목은(牧隱), 평재(平齋) 등이 모두 서로 강론하고 연구하여 의좋게 지냈다. 공이 전선(銓選)을 맡고 있고 내가 후진으로 료좌(寮佐)가 되어 있을때 어느 날 대궐 안에서 숙직하는데 내가 밥을 먹으며 책을 보고 있었더니 공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공경하는 공부가 부족함을 알겠다.입에는 밥이 들어있고  눈으로는 책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통일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말을 듣고 송구하여 그 다음부터는 감히 잊어 버리지 않았다. 公의 한마디 말이 내 평생의 이익이 되었으니 공이 사람을 규제하는 것이 이처럼 하였다. 公은 일찍이 詩로 이름이 나서 익재(益齋)와 가정(稼亭)선생의 칭찬을 받았으며 만년에는 더욱 정진하여 법도를 지키고 묻는 자에게 반드시 본말을 다가르쳐 주었다. 도은(陶隱)이 비로서 성명(盛名)을 얻게 되었을 때도 저술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公에게 물어보고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흔쾌히 복종하고 만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公이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다 어질고 현명하여 과거 급제가 3명이나 배출되니 公의 복록이며, 일찍이 시관의 직을 맡아 선발한 선비 가운데 달관과 명사가 많으니 세상 사람 모두가 그 식견에 탄복하였다. 아! 공의 언행과 재능이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하며 詩는 그 일부에 불과하다. 만년에 한가 할 때에는 牧隱(이색)과 마음을 함께 하여 지팡이를 짚고  서로 만나서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하였으니 두 어른의 풍류와 기개는 그 시를 읽으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柳巷은 그 마을 이름인데 이 것을 號로 정하였다. 평시의 저술은 스스로 만족하지 않아 돌아보고 모으지 않았는데 돌아가신 뒤에 여러 아들이 산재된 문고들을 모아서 겨우 몇 수를 얻었으나 참으로 태산의 털 끝보다 적은 양이다. 그러나 그 간결함과 부드럽고 담박함을 보면 번잡한 마음을 벗어나 옥소리를 듣는 것처럼 청아하고 여운이 깃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절대 흔하지 않은 일이다. 둘째 아들 상질(尙質)이 형제 간에 상의하고 장차 목판에 새기려 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公을 섬겼다 해서 서문(序文)을 부탁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公의 언행의 대강을 서술해서 책 머리에 부침과 동시에 후일 공의 시를 보는 자로 하여금 본 받을 만한 것이 비단 詩뿐만이 아님을 알 게 하려 함이다.

                            太祖7年 戊寅(1398洪武31年)夏 後學 陽村 權近 序

柳巷先生 韓文敬公 諱:脩 文集重刊序

柳巷集同門下觀察使成公始刊錦山郡者字畫太細覽者病之壬辰之亂盡爲灰燼是集之行于世者蓋寡己亥年間吾叔父今咸鏡伯公觀察湖南偶得一帙思欲廣布是時浚謙方忝按嶺南叔父乃以厥本遺之俾令讎校再圖刊行浚謙重先祖之遺藁感叔父之至意謹受而卒業正訛而補赽繕寫旣完未及入梓而罷歸今年春又受湖南之命駐節完山始得鳩匠斲功字體書樣視舊本頗勝遂藏諸本府以壽其傳仍竊伏念吾先祖文章學行昭載信史銀鉤玉索輝映金石是集也不過收拾咳唾之餘耳其行與否若無預於數者然而自麗季至于今數百年間先祖之門生後裔不知其幾人也始焉唱之者成公也中焉繼之者叔父也終焉成之者浚謙也而適當三人俱按湖南之然則是集之行亦有機會而先祖之靈必且默佑於冥冥之中矣吁其異哉

萬曆紀元龍集壬寅八月上丁  八代孫嘉善大夫全羅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全州府尹 浚謙謹識

宣祖35年壬寅(1602)8월상丁일8대손가선대부전라도관찰사병마수군절도사전주부윤준겸근식

韓氏四子名字說(한씨4자명자설)  문경공 수

 韓簽書公旣名其四子且字之以古者易子而敎俾友人韓山李穡說其義穡不敢辭曰尙桓書云尙桓勉其知所勇也人於學也勇莫先焉中庸雖以智仁勇爲三達德而勇居其末然所以致知人之極以成天地位育之功者勇也知非勇不能擇仁非勇不能守故以强哉矯美之尙桓之字以伯桓可不思其義乎曰尙質勉其知所本也語云文勝質則史質勝文則野質者文之本也文勝久矣愷悌之美忠信之焉泯而不彰雖有美質淪胥而莫能自拔於流俗文之弊極矣於是而惟文之是尙則或失其本而趨乎末故救之之術雖偏焉莫如重質之爲愈也尙質之字以仲質可不思其義乎曰尙敬勉其中有主也禮曰母不敬禮義三百威儀三千冠之以敬卽堯典先書欽之義也學道者由敬以誠正出治者有敬以治平夫婦之相敬史又書之田野間亦不可無敬也況於朝廷乎況於鄕黨乎況於屋漏乎事天享帝以致四靈皆不外此尙敬之字以叔敬可不思其義乎曰尙德勉中不失也書曰克明德人之得乎天具衆理應萬事本然之善也氣質或拘之物慾或弊之於是乎失之矣得之於天失之於己故曰虛位然其本然之軆未嘗亡焉發見於俄項之間守之固擴之充則在我者非自外至也生而具之者德也失而復之者德也尙德之字以季德可不思其義乎夫勇以一其志質以爲之本敬以爲之主德以守其天韓氏兄弟期無忝乎爾祖矣尙勉旃尙勉旃(東文選)

 韓簽書(문경공)公이 그 네 아들의 이름을 짓고 또 字를 지었다. 옛 사람들은 아들을 서로 바꾸어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친구인 韓山 李穡(한산 이색)으로 하여금 그 의의를 설명하라 하였다. 이색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尙桓(상환)에 대하여는 書經(서경)에 이르기를 씩씩함을 숭상한다 하였으니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을 알 게 한 것이다.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용기가 앞서야 한다. 中庸에는 知仁勇 이 세가지를 통용할 수 있는 것은 德이라 하여 용기를  끝에 두었으나 지혜와 仁을 극치에 도달하게 하며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유지하며 모든 사물을 육성하는 힘은 용기이다. 지혜는 용기가 아니고는 선택하지 못할 것이요, 仁도 용기가 아니면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굳세고 씩씩함이라는 말로 이를 찬미하였다. 尙桓에게 伯桓이라고 字를 지은 것에 대해 그 의의를 생각하라.

尙質(상질)에 대하여는 그 근본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논어에 이르기를 문체가 바탕을 이기면 너무 화려하고 바탕이 문체를 이기면 너무 속된다 라고 하였다. 바탕은 꾸밈새의 근본이다. 그런데 꾸밈새가 지나친지가 오래되었다. 온화한 미와 충성스럽고 미더운 진실함이 없어지고 드러나지 않아 비록 좋은 바탕이 있을지라도 다같이 타락하고 유행하는 세속에서 헤어나는 사람이 없으니 꾸밈새의 폐해가 극단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오로지 꾸밈새만을 숭상하여 그 근본을 잃어 버리고 지엽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 잡는 방법은 비록 한쪽으로 치우친 듯 하더라도 바탕을 중히 여기는 것이 낫다. 尙質의 字를 仲疾(중질)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라.

尙敬(상경)에 대하여는 그 마음 속에 주장하는 것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禮記에 이르기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300가지 예의와 3,000가지 위의(威儀)에 대하여 공경이라는 말을 첫머리에 두었으니 곧 요전(堯典)에서 먼저 공경한다. 欽이라는 말을 쓴 것과 같은 뜻이다. 道를 배우는 사람은 공경에서 출발하여 뜻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로 하는데 이르며 정치하는 사람은 공경에서 출발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이다. 부부간에 서로 공경한 좌전의 사실을 역사에도 기록하였으니 농사 짓는 들판에서도 공경이 없어서는 안될 것인데 하물며 조정과 사회에서는 이를 말이겠는가. 하늘을 섬겨 제사를 지내며 모든 신을 감동케 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尙敬의 字를 仲敬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라.

尙德(상덕)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힘써 잃지 않기를 강조하였다. 書經에 이르기를 능히 덕을 밝히라 하였다. 사람이 하늘의 뜻을 타고 나서 이치를 가지고 모든 일에 대응하는 것은 본래부터 타고난 善이다. 기질(氣質)이 구속하고, 물욕이 가려 여기에서 그것을 잃게 된다. 하늘에서 타고나서 자기가 잃어 버리는 이것을 빈자리(虛位)라 한다. 그러나 근본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다시 나타난다. 이것을 굳게 지키고 확충시키면 곧 나에게 있는 것이며,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이 덕이요,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이 덕이다. 尙德의 字를 季德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라.

대저 용기로 그 본뜻을 전일하게 하며 바탕으로 근본을 삼으며 공경으로 주장을 삼고 덕으로 그 하늘에서 타고난 것을 지키면 한씨 형제는 그 선조에 대하여 욕됨이 없을 것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동문선(東文選)

 

主敬說跋(주경설발)  문경공 수

昔我先祖 柳巷先生이 在麗季하야 以文章德行으로 爲世模範이라 其學이 以敬爲主하야 嘗與 陽村 權公으로 同直闕下할새 權公이 方食觀書어늘 先生이 曰 知吾不主敬이라 口有食 目有觀이면 心이  主一乎아 權公이 悚然而服하야 以爲終身之師하다 蓋當是時하야 程朱之說이 猶未大行於東方而先生之言敬이 乃與之默合此하니 其於心學之功이 非有自得之深이면 首詎如是哉아 先生이 旣沒에 得諡文敬하니 亦見當時公議之所許矣라 然이나 先生之學이 蓋亦有所本矣라 吾韓氏出於箕子而箕子又 契之世也라 契은 爲虞司徒라 欽舜之命則曰敬敷五敎라하고 箕子又承之而敘九疇則曰敬用五事하야 大彛倫之敘하니 本乎五敎라 修己之目이 盡於五事而皆以一敬字로 包之則敬之爲聖學之本이요 萬善之主而聖哲이 相傳하야 必以是爲宗者槩可見也라 契之學이 傳之箕子하고 箕子又以其學으로 來治東方하니 東方之有道學之傳이 自箕子始라 然이나 箕氏之世에 文獻이 無徵이라 自羅以後로 始可考信於史而寥寥數千載之間에 人不知有此學하야 無有能依俙說得敬字事러니 至我先生하야 始獨言之하니 豈亦非先生之爲箕子之世故耶아 噫라 先生이 去箕子三千餘歲之遠而乃能傳箕子所傳於虞司徒者則今去先生이 數百世之近而顧乃不可以因先生之學이 以求其所傳於箕子者耶아 此在後人之克念耳이라 元震은 不肖晩學이라 學無所得하니 固不敢與議於先學之傳而於先生說也에 感慕而與箕子則有之라 故로 敢表出而識之하야 旣以自勖하고 且以竣後人於無窮云이라.

十二代孫 元震 撰(12대손 원진 지음)

12世 尙桓(상환)  

字는 伯桓(백환), 初諱는 우복(佑復),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부윤(漢城府尹), 상의(商議) 의정부사 (議政府事)를 지냄. 배위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父는 문하평리(文下評理)를 지내고 諡號는 충간(忠簡)인 승순(承順)이다.

13世 이휴(李携)

한성인(漢城人) 판한성윤(判漢城尹)을 역임하였다.  영의정 정인지의 장인이다.

13世 민무질(閔無疾)

?~1410 여흥인(麗興人)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둘째아들,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어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지고, 1403년(태종 3) 예문관총제(藝文館摠制)로서 송판(宋板)의 시전(詩傳)을 자본(字本)으로 하여 동활자를 주조하였다. 의정부지사(議政府知事) ·좌군총제(左軍摠制) ·우군총제(右軍摠制) 등을 지냈다. 태종 이방원의 왕권강화를 위한 외척견제책의 일환으로, 종친간의 이간을 꾀하였다는 죄명으로  탄핵되어 장단(長湍)에 유배, 사사되었다.

12世 尙質(상질)  top

문열공 유사1

문열공 묘지

문열공 유사2

문열공 묘표

화상찬

문열공(文烈公=諱尙質) 약사

창화동의 전설

 

문열공 유사  문열공 상질

1350(충정왕2년 庚寅)~1400(조선 정종2년 庚辰) 1.10. 字는 중질(仲質) 號는 죽소(竹所)이다. 초명은 선복(善復), 고려 우왕6년 庚申(1380) 문과에 급제, 형조판서, 우상시(右常侍),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 공양왕2년 庚午(1390)에는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90년 12월, 서북면 도관찰 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로 나아갔으며, 1392년 7월 주문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돌아왔다. 태조2년 癸酉(1393) 9월 양광도 관찰출척사를 거쳐 동6년 丁丑(1397)에는 경상도 관찰출척사, 예문춘추관 태학사를 역임. 정종1년 己卯(1399) 좌상시, 예문관제학, 동 2년(1400) 1月 10日 예문,춘추관 대제학 재임 중 졸하였다.  諡號는 문열(文烈)이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장단군 진동면 서곡리 112번지 창화동 남록에 있으며 고분벽화는 1992년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되었다. 배위는 초배, 창화부인(昌化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충열공(忠烈公) 성림(成林)의 딸이며 묘소는 공의 묘소 위 건좌(乾坐) 손향(巽向)이고, 후배, 창화부인(昌化夫人) 청주송씨(淸州宋氏)는 청풍도사(淸風都事) 신의(臣議)의 딸이고 묘소는 공의 묘와 합조(合兆)이다.

文烈公 諱:尙質(문열공 휘상질) 遺事    문열공 상질

資憲大夫都評議司事藝文春秋館大提學 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藝文館弘文館大提學諡文列韓公(諱尙質)遺事

高麗史曰恭讓王三年辛未閏四月戊寅刑曹判書韓尙質等上疏以謂今臺省以言貶外請授京官以開言路己卯以韓尙質爲左常侍五月遣藝文館提學韓尙質如京師賀千秋節且奏曰彛初誣妄臣不敢先辨乞遣一官前來究問仍許臣赴京面奏十二月以韓尙質爲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攷事撮要略曰洪武壬申我  太祖卽位遣密直司事韓尙質如京師更國號○族譜曰韓尙質字仲質號竹所登第官至都評議司事 贈左贊成諡文烈我 太祖開國之初南巡至鷄龍山觀新邑地駐蹕于淸州公自燕京奉  皇帝賜國號朝鮮聖旨詣行在  上重帝命備禮延之設宴慰勞賞賚甚厚承政院日記韓尙質淸州人高麗宰相脩之子登庚申第性聰敏歷揚中外皆有聲續國初奉命請國號受朝鮮之名恭靖大王二年庚辰正月以前藝文春秋館大提學卒訃聞  命攸司禮葬諡文烈子起

자헌대부도평의사사예문춘추관대제학 증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예문관홍문관대제학시문열한공(휘상질)유사

고려사에 말하기를 공양왕3년 辛未(1391)윤4월 戊寅에 형조판서 한상질 등이 상소를 올려 謂今臺省以言貶外請授京官以開言路. 정종1년 己卯(1399)에 한상질을 좌상시로 삼고 그 해 5월에 예문관제학 한상질을 명나라에 보내 천추절을 하례하였다. 또 주청하기를 폐初誣妄臣不敢先辨乞遣一官前來究問仍許臣赴京面奏. 12월에 한상질을 서북면도관찰출척사겸 병마도절제사를 삼았다. ○考事撮要(고사촬요)에 略曰 조선 태조1년 壬申(1392,明太祖洪武25年)에 태조가 즉위하여 밀직사사 한상질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국호를 고쳐 오게 하였다 ○족보에는 한상질의 字는 仲質이요, 號는 竹所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도평의사사에 이르고 좌찬성을 증직받았으며 시호는 문열공에 봉해졌다. 태조가 개국하여 처음 남쪽지방을 순행하여 계룡산에 이르러 새 도읍지의 터를 보고 청주에 머물고 있을때 公이 연경으로부터 황제가 정해준 조선(朝鮮) 국호의 성지(聖旨)를 받들고 왕께 돌아오니 왕이 황제의 명(皇命)을 중하게 여겨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잔치를 벌여 위로하고 상을 후히 주었다.○정원일기에 말하기를 한상질은 청주인이며 고려의 재상 수(脩의) 아들이요, 庚申年 과거에 급제하니 성품이 총민하고 내외직을 역임할 때 다 명성을 얻었고 개국 초에 왕명을 받들어 국호를 명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왔으며 정종2년 庚辰(1400) 정월에 전예문춘추관대제학으로서 졸하여 부고가 왕에게 들리매 유사(攸司)에 명하여 예장하고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아들은 기(起)이다

畵像贊 幷序  문열공 상질

政堂韓公在我  國初入奏  天子請更國號得朝鮮之美稱者也今觀畵像敬作贊曰  惟玉之質惟竹之節質稟乎天德進于學緣髮黃髥丹心紫윤惠及斯民功在於國英敏之聲卓偉之烈當與朝鮮之美號同垂於罔極也

陽村 權近 撰

화상을 보고 글을 짓다. 

정당문학 한공(한상질)은 국초에 천자에게 들어가 국호를 변경할 것을 청하여 조선이라는 좋은 칭호를 얻은 사람이다. 지금 그의 화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경건히 글을 짓는다. 옥처럼 깨끗하고 대처럼 곧은 절개 하늘에서 타고난 바탕이요. 학문으로 닦은 덕이로다. 푸른 머리로 재상이 되었으며 조정에 충심을 바쳤도다. 은혜는 백성에 미쳤고 공적은 나라에 남아 있도다. 영민한 그의 명성과 거룩한 그의 공적은 조선이란 좋은 칭호와 함께 영원히 남아 있으리.

양촌 권근 지음

昌化洞의 傳說(창화동의 전설)  문열공 상질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처음에 중서령인 창화공(昌化公) 이자연(李子淵)이 卒하매 임진현(臨津縣) 경내(境內) 소순(所順)에 안장하고 그 곁에 땅을 골라 수발할 사찰을 세워 이름을 자효사(慈孝寺)라하고 사계절의 享祀를 이 사찰에서 전담케 하여 왔으나 그뒤 수백 년이 지나니 거의 황폐할 지경이 되었다. 고려조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벽상공신(壁上功臣)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권준(權準)의 字는 平仲이니 그는 일찌기 이를 애석히 여겨 말하기를 이 사찰이 버려진지 오래되어 내가 보수하는 것이니 나도 창화가 되리라 내가 죽거든 이름을 창화로 바꾸고 여기에 안장하여 줄 것을 바라노라. 공민왕 원년 壬辰(1352) 7월에 권공이 卒하시니 왕이 애통해하며 조정의 조회를 물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를 보살피고 창화(昌和)라는 시호를 내려 8월 丙辰에 자효사 서편 언덕에 안장하였다(權公墓誌抄). 이후 30년도 못되어 또 다시 사찰이 쇠락하니 서북면도관찰출척사 한상질이 이곳을 지나다 발견하여 중수하고 말하기를 李,權 兩公의 존영을 이 사찰에서 수발한지 벌써 오래 되었고 이제 쇠락한 고로 수축하노라, 나도 반드시 사후에 내 이름을 기록하고 이 곳에 안장해서 봉발하면 나의 후신이 반드시 昌化의 三代相이 될 것이다 하셨다. 정종2년 庚辰(1400)정월에 예문관대제학으로 돌아가시니 왕이 슬퍼하사 시호(諡號)를 문열(文烈)이라하고 자헌대부 도평의사사 증좌찬성 예문관춘추관 태학사의 호를 하사하고 다시 昌化公의 別號를 내리고 부인은 창화부인에 봉하시며 洞名도 창화동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禮官을 보내 慈孝寺(자효사; 五里東便先塋之南昌化洞)의 언덕에 안장을 보살피니 대개 공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고금의 傳說에 이르되 문열공의 묘 앞에 神道碑銘이 있는데 아래와 같이 써있다.

孰資于親   不獲於君   不肯仕業   猶忘似眞   公遇太祖   允世其臣匪孝曷忠   匪愛曷恩   旣貴且富   盛莫與論   滿無不溢   高無不危公則異是 克守克持   惟心烈烈   萬世不變   刻銘于右   用詔無窮

※ 探得傳文古老傳說而記述以俟後日博考

文烈公 諱:尙質 墓誌銘(문열공 묘지명)  문열공 상질

資憲大夫都評議司事藝文館大提學贈左贊成諡文烈公(諱:尙質)竹所先生墓誌銘

上黨之韓出自箕子太尉蘭佐高麗太祖策三韓功臣自後有龍虎校尉穎別將尙休直長奕上將軍希愈禮賓卿光胤文惠公康寶文閣提學謝奇思肅公渥平簡公公義文敬公脩至公爲十二世公諱尙質字仲質號竹所登第文武名揚中外有聲續國朝奉命請國號受朝鮮之名建文二年庚辰正月以藝文春秋館大提學卒贈諡文烈禮葬長湍先塋之南昌化洞公畵像贊曰  惟師之節質稟于天德進于學緣髮黃髥丹心紫闥惠及斯民社稷而道德之聲卓偉之烈當與朝鮮之美號同垂於罔極也前夫人慶州李氏忠烈成林之女后夫人淸州宋氏都事臣議之女生子起監察孫明澮上黨府院君忠成公二女擢  王后子堡琅城君次孫明溍西原君子堰大司憲淸平君內外子孫輩出神聖不能列擧此爲記

十二世孫 金川郡守 塾 謹識

자헌대부도평의사사예문관대제학증좌찬성시문열공(휘:상질)죽소선생묘지명

상당(청주)한씨는 기자(箕子)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의 후손이니 고려초기 태위에 오르신 한란은 태조 왕건을 보좌하여 三韓을 통합하신 삼한공신이시다. 그로부터 용호군교위(龍虎軍校尉)를 지내신 영, 별장을 지내신 상휴,직장 혁, 상장군 희유,예빈경 광윤,문혜공 강,보문각 제학을 역임하신 사기, 사숙공 악, 평간공 공의, 문경공 수를 거쳐 공에 이르기 까지 12세(世)가 된다. 公의 이름은 상질(尙質)이요,字는 중질(仲質)이며 號는 죽소(竹所)이니 문무양시 에 급제하여 이름이 세상에 알려 졌으며, 태조 등극후 봉명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朝鮮이라는 국호를 봉배하여 돌아오셨고 정종2년 庚辰(1400) 1月10日에 예문춘추관의 대제학으로 재임 중 서거하시니 諡號를 文烈이라 하사하고 장단 선영 남쪽 창화동에 예장하였다.  문열공의 초상에 대하여 양촌 권근은 찬하기를 스승다운 기질은 타고나신 재질이며 학문과 덕을 닦아 높은 지위에서 군왕에 충성하사 혜택이 백성에 미치고 도덕과 위대한 공은 이 나라의 아름다운 이름과 함께 무궁하리라. 부인은 창화부인 경주이씨니 忠烈公 成林의 따님이요, 後配 창화부인 청주송씨는 都事 신의(臣議)의 따님으로 감찰공인 起를 낳으셨다. 손자인 명회는 상당부원군 충성공으로 두 따님이 왕비가 되셨으며 아드님은 낭성군 보(堡)이다. 둘째 손자 명진은 서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이양공(夷襄公)으로 아들은 청평군 대사헌 언(堰)이며 그외 내외자손이 많으나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어 이에 그친다.

12세손 금천군수 숙 삼가 지음

 문열공(文烈公=諱尙質)묘표  문열공 상질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할 때 많은 공적을 남기시고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오심과 동시에 나라를 튼튼히 하는데 위업을 세우신 公은 예문 춘추관 대제학으로 계시다 정종 2년(1400)에 卒하시니 왕이 유사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고 시호를 文烈公이라 하였다. 문열공과 부인 창화부인 경주이씨와 창화부인 청주송씨의 묘가 장단군 진동면 서곡리 산112번지 창화동 남록에 있으나 해방이후 국토가 분단되어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이기에 후손들이 성묘할 수 없음을 한탄해 오다가 1977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추원비(追遠碑)를 세우고 설단(設壇)하여 음력 10월 2일에 향사하여 왔다. 다행히 민통선 출입이 완화되어 1980년에 일제 때부터 해방 후 6,25때 까지 문열공의 묘를 관리해오던 장경의씨와  문열공파 회장 相玉외 수명이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문열공의 묘를 찾게 되었으나 황망하기 그지 없었다. 상하묘가 모두 도굴되고 봉분의 일부가 깎이고 흩어져 고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잡초와 잡목이 무성하여 위치 분간조차 어려웠으나 다행히 공의 12세손인 금천 군수 숙(塾)이 세워 두었던 비석과 문관석, 원숭이 동물상 등이 발견되었고 하묘의 고분 벽화 일부가 노출되어 있어서 전해져 오는 데로 부장묘(副葬墓)라는 것을 의심치 않게 하였으나 너무나 황폐한 모습에 모두 통탄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후 묘지 정화 작업과 함께 음력 10월 11일을 시향일로 정하고 후손들이 향사하여 왔다. 묘는 갑신보나 기유보 그리고 경신, 갑자보에는 간단하게 장단서곡 남록이나 창화동 남록으로 되어있고 계미파보나 1981년판 문열공 파보에는 장단군 진동면 서곡리 창화동 乾坐 三合兆로 되어 있어 후자는 위쪽의 묘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되었으며 하묘의 고분벽화 노출은 일제시대부터 벽화의 존재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부장묘로 전하여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소문이 퍼져 급기야 문화재 관리국에서 알게 되어 발굴확인 요청이 있었고 확인이 되면 문화재나 국보급이라는 것이었다.1991년 2월 1일 문열공파의 종회 의결을 거치고 중앙 종친회의 협조를 얻어 삼합조니 부장묘니 하는 것을 믿고 승낙하여 임원 수명이 입회한 가운데 동년 4월 10일 아래쪽 묘의 발굴작업을 시작하였다. 뜻밖에도 석실에서 유해가 나오고 어마어마한 고분 벽화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삼합조니 부장묘니 하는 말을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이 죄를 무엇으로 씻을 수 있으리? 석실의 구조는 석실 내부의 길이가 2m82cm, 넓이 1m18cm, 높이 1m35cm였으며,고려 양식인 橫口式이며 중앙에는 문열공 좌상을, 좌우에는 각각 5명의 인물 입상과 입구의 낮은 벽엔 시종으로 보이는 인물 입상을 배치하고 冠帽(관모)위엔 12지신상, 천장엔 북두칠성과 三台星(삼태성)의 星宿圖(성숙도)가 묘사 조각되어 있고 앞가리개가 특이하며 색체나 조각등 모두가 선명하여 문화재급 이상이라 하였다.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없고 약 3개월 동안의 고증 작업과 1개월 여에 걸친 묘사 작업을 마치고 동년 8월 28일 문열공과 창화부인 청주송씨로 보이는 유골은 정중하게 안치하고 봉분을 마쳤다. 따라서 상묘는 창화부인 경주이씨로 보이나 확인을 위하여 위쪽 묘의 발굴도 아니할 수가 없어 하묘 발굴 작업과 함께 병행하여 실시하여 보니 석실의 길이 1m42cm, 넓이 91cm, 높이 82cm의 작은 석실에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불교식 화장 유해로 보이는 유해가 있어 정중하게 안치를 하였다. 아래쪽 묘의 고분벽화는 1992년 문화재로 지정되니 문열공의 고귀한 인품 길이 빛나고 후손들의 긍지 더욱 자랑스럽다.

1993년   월     일    문열공(文烈公) 19세손 대현(大炫) 근식(謹識)

문열공(文烈公=諱尙質) 약사  문열공 상질

공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의 문신이다. 諱는 상질(尙質)이요 처음 이름은 선복(善復)이고, 字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이다. 판후덕부사 문경공 수(脩)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길창부원군 권적(權適)의 따님이시다. 그리고 평간공 공의의 손자이다. 일찌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공민왕23년 甲寅(1374)에 대군시학(大君侍學)을 거쳐 우왕6년 庚申(1380)에 좌랑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요직을 거쳐 형조판서에 오르고 우상시(右常侍),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공양왕2년 庚午(1390) 천추사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 이초(李初)등의 무망(誣忘)을 변명하고 돌아와 12월에 서북면 도관찰 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써 주문사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결정 받고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백관이 다 모여 도당에서 국호를 의논하였는데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과 단군, 기자, 위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조선이라는 2개의 칭호를 가지고 명나라 황제에게 품의한 결과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국호로 선정하였다. 명나라는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칭호를 새 왕조의 국호로 선정하였으나 우리측에서 생각하는 "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국호를 제정하기 이전인 1392년(태조 1년) 8월에 이미 단군을 동방의 첫 수몀군주(受命君主)로서 국가에서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를 지내도록 조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공은 이 공으로 전지(田地) 50결을 하사 받았다. 태조2년 癸酉(1393) 9월 양광도 관찰출척사가 되고 태조6년 丁丑(1397)에 경상도 관찰출척사를 거쳐 이 해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었으나 정종2년(1400) 1월 10일에 졸하니 예장하고 시호를 문열이라 내리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配位 창화군부인 경주 이씨는 충열공 성림의 따님이시고, 창화군부인 청주 송씨는 도사공 신의의 따님이다.아들은 감찰공 기(起)이고, 손자는 충성공 명회(明澮)와 이양공 명진(明溍)이다. 공은 정종 2년 1월 10일에 돌아가시니 서곡리 남록에 안장하였다. 위쪽 묘는 창화군부인 경주 이씨의 묘이고, 아래의 묘는 창화군부인 청주 송씨의 묘인데 12지신상의 고려 고분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약 290년 전에 금천군수인 숙(塾)이 세운 단갈비가 많이 훼손되어 종의에 따라 다시 세우기로 하고 1997년 4월 5일에 묘비를 다시 세웠다. 상석도 큰 것으로 교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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