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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謝奇

 

 

 

 

 

 

 

 

 

 

 

 

 

 

 

사기

제학공(提學公)

 

 

 

 

 

 

 

 

 

 

9세

 

 

 

 

 

 

 

 

 

 

 

 

 

사숙공(思肅公)

 

 

 

 

 

 

 

 

 

 

10세

公義 

 

 

 

 

 

 

 

 

 

 

 

공의 

평간공(平簡公)

 

 

 

 

 

 

 

 

 

 

11세

脩 

 

 

 

 

 

 

 

 

 

 

 

 

문경공(文敬公)

 

 

 

 

 

 

 

 

 

 

12세

尙敬 

 

 

 

 

 

 

 

 

 

 

 

상경 

문간공(文簡公)

 

 

 

 

 

 

 

 

 

 

13세

 

 

李士寬

崔進明

 

 

 

 

 

 

 

 

 

 

청산군(淸山君)

이사관

최진명

 

 

 

 

 

 

 

 

 

14세

繼胤

繼美

繼禧

 

 

 

 

 

 

繼善

繼純

柳均

愼先庚

李永瑞

 

 

 

 

 

 

 

 

 

 

 

계윤

계미

계희

 문정공(文靖公)

 

 

 

 

계선

계순

유균

신선경

이영서

 

 

 

 

 

 

 

 

 

 

 

15세

검참공파

문양공파

斯文

士武

士信

士介

士粹

士俊

李永禧

참판공파

양평공파

 

 

 

 

 

 

 

 

 

 

 

 

 

 

 

 

사문

사무

사신

사개

사수

사준

이영희

 

 

 

 

 

 

 

 

 

 

 

 

 

 

 

 

 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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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註

無註

 

 

 

 

 

 

 

 

 

 

 

 

 

 

 

 

 

 

 

 

12世 尙敬(상경)  top

문간공 유사(1)

송 충청도 도관찰사 한상경 시서

문간공 유사(2)

陽村先生이 지은 文簡公에 대한 글

신재기

文簡公이 남기신 글

신재설

국조명신 언행록

화상찬(1)

문간사 정비

화상찬(2)

묘정비문

사 제문

문간공 신도비문

 

문간공 묘소와 사우

字叔敬號信齋恭慜王9年庚子生洪武壬戌文科○壬申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歷都承旨京畿忠淸黃海江原四道觀察使戶工曹判書右相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世子師西原府院君世宗5年癸卯卒壽六十四諡文簡天資敏精律己儉約能詩詞善八法歷事太祖定宗太宗世宗四朝淸名雅操見重一世輿地勝覽錄公于淸州人物
配位馬韓國大夫人海州吳氏父版圖判書吳俊良祖瓚曾祖贊成文溫公漢卿外祖親從護軍淳昌薛鳳四月十七日卒
墓所楊州豊壤金掘里今南楊州市榛接邑金谷里南向原丑坐上下兆

字는 숙경(叔敬) 號는 신재(信齋) 1360년(공민왕9)출생 1382년(우왕8)문과급제 1392년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 예의좌랑,우정언,전리정랑,예문응교,공부총랑,종부령등을 역임, 공양왕4년(1392) 밀직사 우부대언 추충익대개국공신,중추원도승지,첨서중추원사,도평의사사,충청도관찰사,서원군,경기좌도 관찰사. 정종2년(1400)참지의정부사,풍해, 강원관찰사,공조판서,지의정부사겸 사헌부대사헌,호조판서,참찬,의정부사,이조판서. 태종15년(1415)서원부원군,의정부우의정. 동16년(1416)영의정. 세종5년(1423.3.7.)별세,향년64세. 諡號는 문간(文簡) 공은 타고난 자질이 정민검약하고 지조가 있으며 청아하고 시와 글에 능하였으며 법보다 선을 우선으로 하였다. 태조,정종,태종,세종 4대 왕조에 관직에 있으면서 깨끗한 명성과 단아한 지조로 일세의 으뜸이었으며 청주의 인물로 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부인은
마한국대부인 해주오씨로 판도판서 오준량(吳俊良)의 딸이며 조부는 경() 증조는 문온공 찬성 한경(漢卿) 외조는 호군 순창(淳昌) 설봉( 薛鳳)이며 기일은 4월 17일이다.
묘소는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남향원 축좌에 부군의 묘소는 위 해주오씨는 아래 위치한 상하조이다.

文簡公 諱:尙敬 遺事(1)  문간공 상경

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 世子師西原府院君 贈諡文簡公 遺事

承政院日記曰 世宗大王五年癸卯三月戊子(初七日)雨雹○西原府院君韓尙敬卒尙敬字叔敬淸州人文敬公脩之子也仕高麗拜司膳署令擢壬戌文科第三人拜禮儀佐郞遷右正言歷典理正郞藝文應敎工部摠郞宗簿令歲壬申陞密直司右副代言 我 太祖開國與推戴之議奉寶璽以獻 賜翊戴開國功臣之號遷中樞院都承旨陞推忠翊戴開國功臣簽書中樞院事都評議使司事出爲忠淸道都觀察使封西原君又爲京畿左道都觀察使建文二年 太宗卽位謂尙敬曰予承丕緖罔知攸濟心實以爲難焉尙敬對曰古人有言曰后克艱厥后殿下克心其難實我東方之福也然非知之艱行之惟艱 太宗嘉納之拜知議政府事 欽差兵部主事端木智來 命尙敬爲接伴使數旬禮待逾謹智曰晏平仲善與人交久而敬之公其人也出爲豊海江原兩道都觀察使入爲工曹判書遷知議政府事兼司憲府大司憲 太宗皇帝巡幸北方遣尙敬欽問 起居遷戶曹判書三功臣獻壽尙敬稱觴以進 太宗曰予卽位之初卿告予以后克艱厥后非知之艱行之惟艱予今不忘矣尙敬對曰上旣不忘臣之言請更啓一言 太宗曰何對曰靡不有初鮮克有終又稱善歷贊議政府事吏曹判書乙未陞西原府院君議政府右議政丙申拜領議政復封府院君尙敬素患風疾庚子遭母喪哀戚盡禮由是病益重 上軫念遣代言命啖肉使內醫治療 問賜不絶至是卒年六十四訃 聞上震悼卽遣中使弔慰輟朝三日官葬事且 命致賻諡文簡勤學好問曰文一德不懈曰簡尙敬自少不喜遊戱識量精敏行己端恭及長就仕淸潔自持久掌銓選所擧惟公居家克儉衣服飮食取潔而己事母定省晨昏親臨甘旨雖官高衰老未廢焉自號曰信齋遭喪旣襄事病益篤語人曰吾有疾久矣惟恐先亡以傷老親之心今人子之事畢矣死且無憾子惠○同月己丑王旨昌寧府院君成石璘西原府院君韓尙敬致賻依完山府院君李天佑例各賜米豆共七十石紙一百五十卷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世宗5年癸卯(1423)3月7日(戊子)에 우박이 내리다. 서원 부원군 한상경이 졸하다. 상경의 자는 숙경(叔敬)이며 청주인으로 문경공 수(脩)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출사하여 사선서령(司膳署令)을 지냈고 禑王8年壬戌(1382)문과에 3인으로 급제하여 예의좌랑이 되었다가 우정언(右正言)으로 옮겼으며 전리정랑 예문응교 공부총랑 종부령등을 역임하고 恭讓王4年壬申(1392)에 밀직사 우부대언에 올라 태조 개국시에 추대의 논의에 참여하여 보새(寶璽=옥새)를 받들어 올렸다. 익대개국공신의 호를 받았고 중추원 도승지에 올라 추충익대 개국공신이 되고 첨서중추원사,도평의사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에 나갔으며, 서원군에 봉하여 졌고 경기좌도 관찰사가 되었다. 定宗2年庚辰(1400)에 태종이 즉위하여 상경에게 이르기를 "내가 대통을 이었으나 나라의 일을 유제(攸濟)할바를 모르겠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라 하시니 상경이 대답하기를 고인의 말에 왕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진정한 왕이 된다고 했으니 이제 전하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조선의 복입니다. 그러나 非知之艱이요, 行之惟艱이라 하였더니 태종이 가납하여 참지의정부사로 삼았다. 흠차병부주사 단목지가 명에서 사신으로 왔을 때 상경을 접반사로 명하여 여러旬(10日)을 예로 대하였더니 단목지가 이르기를 안평중(晏平仲)은 선으로 사람들과 교류하였기에 오래도록 공경을 받더니 공이야말로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풍해, 강원관찰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지의정부사겸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명나라 태종이 북방을 순행할 때 공을 보내 기거를 흠문하였고 호조판서로 전임하였다. 3공신이 헌수할 때 상경이 축하의 잔을 올리니 태종이 말하기를 내가 즉위 초에 경이 나에게 말하기를 왕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진정한 왕이 되고 非知之艱이요 行之惟艱이라고 했는데 내가 아직도 이 말을 잊지 않고 있다 하니 상경이 왕께서 신의 그 말을 잊지 않고 계신다고 하니 다시 한마디만 아뢰겠다고 하니 왕께서 무슨 말이냐고 하자 처음은 쉬우나 끝은 어려운 법이라고 하니 다시 칭찬하셨다. 참찬,의정부사,이조판서를 역임하고 太宗15年乙未(1415)에 서원부원군 의정부우의정에 승진되고 太宗16年丙申(1416)에 영의정이 되어 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상경이 평소에 풍질을 앓고 있었는데 世宗2年庚子(1420)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하며 예를 다했던 탓으로 병이 더욱 악화되어 왕이 염려하여 대언을 보내 문병하고 醫員을 보내 치료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향년 64세에 별세(世宗5年癸卯1423.3.7.)하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지체없이 사신을 보내 조위하고 3일간 조회를 폐하였으며 장사를 관에서 보살폈으며 부의를 내리고 시호를 문간이라 하였다. 문간의 文은 勤學好問(근학호문)의 뜻이고, 簡은 一德不懈(일덕불해)의 뜻이다. 상경이 어려서부터 놀기를 즐겨하지 않고 지식을 쌓는데 정성을 다하고 행동이 공손하고 단정하더니 자라 벼슬길에 오른 뒤에는 청렴함을 지켜 오래도록 銓選(전선)을 관장하였으되 공정을 잃지 아니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검소하고 의복과 음식은 깨끗한 것이면 족하였다. 어머니 섬김에 있어 조석문안을 미루지 않고 친히 어머니의 음식 맛을 보았으며 나이 늙고 벼슬이 비록 높아져도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 부르기를 信齋라 하였다. 상을 당하여 장사를 다 끝내고 본인의 병이 깊어지자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병이 오래되어 노친보다 먼저 죽어 모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를 할까 걱정했는데 이제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아들은 惠이다. 같은 달 기축일에 왕이 명하기를 창녕부원군 성석린과 서원부원군 한상경의 賻儀는 완산부원군 이천우의 예에 따라 각기 쌀과 콩 공히 70석과 종이 150권을 내리라 하였다.

文簡公(諱尙敬) 遺事(2)  문간공 상경

字叔敬脩之第三子我太祖朝人 高麗恭愍王九年庚子生辛禑八年壬戌(時公年二十三)擢乙科第三人我世宗癸卯卒享年六十四(享年七十餘似未知所據)仕至領議政號信齋○與地勝覽曰韓尙敬脩之子開國功臣封西原君諡文簡○登科錄曰尙敬字叔敬洪武十五年(壬戌)登乙科第三人永樂十三年乙未右議政十四年丙申領議政西原府院君諡文簡二十一年癸卯三月初七日辛未病卒于第享年七十餘號信齋○徐居正撰諱韓繼禧神道碑曰尙敬右政丞諡文簡○李山海撰韓汝弼墓碣文曰尙敬入國朝官至領議政西原府院君諡文簡○申用漑撰韓斯文神道碑曰尙敬佐太祖開國誓功山河官至領議政西原府院君諡三人文簡○宋寅撰韓紀神道碑曰尙敬翊我太祖爲開國功臣官至領議政府事諡文簡○許筬撰韓汝弼墓誌曰尙敬入我朝策開國勳領議政西原府院君○鄭斗卿撰韓嶔墓誌曰尙敬佐太祖策開國功臣官至領議政封西原府院君號信齋亦以文章顯○家譜曰尙敬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西原府院君諡文簡公夫人判書吳俊良之女封馬韓國大夫人○又曰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西原府院君 贈諡文簡公天姿精敏儉約操履淸雅能詩詞善入法歷事四朝淸名雅操見重一世○有畵像奉安于後孫府使韓석家

상경의 자는 숙경이요, 脩의 셋째 아들이니 조선 태조때 사람이다. 恭慜王9年庚子(1360)生으로 禑王8年壬戌(1382)에 23세의 나이로 을과 제3인에 발탁되다. 世宗5년癸卯(1423)에 돌아가시니 향년 64세라.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고 호는 信齋(신재)이다. ○여지승람에는 상경은 수의 자니 개국공신으로 서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문간이다.○등과록에는 상경의 자는 숙경이요, 禑王8年壬戌(1382明太祖洪武15年)에 을과 제3인으로 입격하고 太宗15年乙未(1415明太宗永樂13年)에 우의정이 되고 太宗16年丙申(1416明太宗永樂14年)에 영의정에 승진되고 서원부원군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문간이라 하였다. 世宗5年癸卯(1423明太宗永樂21年)3월7일(辛未)에 병환으로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이 70여요,호는 신재라 하였다.서거정이 지은 문정공 신도비문에는 상경은 우정승이고 시호는 문간이라 하였 다.이산해가 지은 한여필 묘갈문에는 상경은 조선조에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서원부원군에 시호는 문간이라 하였다.신용개가 지은 한사문 신도비문에는 상경은 이태조의 개국을 보좌하여 산하를 덮을만한 공훈을 세우고 관위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원부원군에 책봉되었고 시호는 문간이라 쓰다.송인이 지은 한기 신도비문에는 상경은 이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이 되었고, 벼슬이 영의정부사에 이르고, 시호는 문간이라 썻다.허성이 지은 한여필 묘지명에는 상경은 조선에 와서 개국훈공으로 영의정, 서원부원군에 책봉되었다고 썻다.정두경 지은 한금 묘지명에는 상경은 태조를 보좌하여 개국공신에 책봉되고, 관위가 영의정에 달하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호는 신재이고 또한 문장이 뛰어나다고 썼다.족보에는 상경은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서원부원군 시호는 문간이요,부인은 판서 오준량의 여식으로 마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고 써 있다.또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서원부원군 증시문간공이며 타고난 자질이 정민검약하고 지조가 있으며 청아하고 시와 글에 능하였으며 법보다 선을 우선으로 하였다. 태조,정종,태종,세종 4대 왕조에 사사하면서 깨끗한 명성과 단아한 지조로 일세의 으뜸이라 썼다.○존영이 남아있어 후손 부사 한석의 집에 봉안되어 있다.(현재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에 봉안되어 있다)

文簡公諱:尙敬 遺事 (3)(기타 문헌에 남겨진 유사)

洪武二十七年 我太祖大王三年甲戌四月二十六日 以前朝賜姓 今不可用 復本姓權氏 都承旨韓尙敬 次奉承傳 施行(南崗世蹟家藏)
태조
3년甲戌(1394明太祖洪武27年)4월 26일에 고려 때 사성한 것을 이제는 쓰는 것이 옳지 않으니 본성인 권씨로 복성하라 하니 도승지 한상경이 그 전지를 받들어 시행하였다.(남강세적가장)

韓尙敬 字叔敬 竹所弟 號信齋 禑朝科 入本朝 開國功臣 官領議政 西原府院君 諡文簡 王氏子孫 將盡被誅 公救免之以報前朝之恩(朝鮮人號簿)
한상경은 자가 숙경이며, 죽소(문열공 한상질)의 동생, 호는 신재, 고려 우왕때 등과하여 조선에 들어서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간이며, 왕씨 자손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자 공이 구하고 사면케 하여 고려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조선인호부)

信齋記(신재기)  문간공 상경                                                                                                                                陽村 權近 著  

同僚知韓公號信齋朝使端木先生隸其扁且之甚悉待以示予仍徵記知吾宗宅相也親善旣久又爲同僚義不可以不文辭夫人性卽天之命也天之命元亨而利貞於穆而不己者誠也其賦於人則爲五常之性而有仁義禮智信之名聖人性焉純乎天也學者必勉焉然後能實其性之德所以能勉而實之者信之爲也非由外非假强爲本具於性分之中但患夫人蔽於慾而不力爾盖天之誠卽是四德之實其在於人亦爲實心仁者惻隱之理而實其惻隱者信也義禮與智莫不皆然誠不離乎元亨利貞信豈外於仁義禮智哉以我實心施於事物無所爲而非眞也無所感而不應也大而天地幽而鬼神徵而昆皆可以信感而動之也而況於人乎夫天地萬物本一理也以在我之實心觸在彼之實理合無間捷於影響書稱至誠感神易言信及豚魚蓋爲此也凡學者修己之方人君爲治之要尤莫切於此故孔子敎人則曰謹而信又曰主忠信言治國則曰敬事而信曾思孟相授著書亦莫不拳拳致意焉洙泗響變詐日興寥寥漢唐知者鮮矣至宋程子乃曰循物無違又曰以實之謂能發前聖未發之蘊甚有功於學者然非指在性之本體乃就切於學者之事指其接物之用而言之者也嘗因是而論之物各有理人同此心無非實也火之就燥水之就濕物之實理也謂水潤下謂火炎上人之實心也欲用火則必以燥而燎之欲導水則必自卑而疏之然後施工易而事可成所謂循物無違者然也設有人問火吾語之曰熱問水則吾語之曰冷是竭吾實心而語之也人於是執火而手熱飮水而齒冷則以吾言爲實而非妄矣苟不以實心吾之謂火曰冷謂水曰熱人必謂我爲妄矣所謂以實之謂者然也事君親交朋友日用動靜之間應事接物之際無所往而不出於實心則其爲信也大矣動天地感鬼神亦可馴致矣今公以是額齋而自勉可謂知本矣宜處事精詳動作合義以見是於國人獲知於君上也若夫稽諸往古之施諸事功之懿者端木先生之言盡之矣予奚客贅(東文選)

동료(同僚)인 첨지(叅知) 韓公의 號가 신재(信齋)니 명나라의 사신 단목(端木)선생이 그 편액(扁額)을 예서(隸書)하고 또 자상하게 서문을 썼다. 이것을 나에게 보이면서 기(記)를 청하니 첨지(叅知)는 우리 가문의 외손이 되는 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친숙한 사이요, 또한 같은 직장의 동료이니 의리상 졸문(拙文)이라 하여 피할 수 없는 처지이다. 대체 인성(人性)은 천명으로 받은 것이니 천명(天命)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정(貞)하여 한 없이 화평하고 아름답고 맑은 것은 공평무사하고 순일(純一)한 성(誠)이니 성(誠)은 즉 천도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부여되면 오상지성(五常之性)으로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聖人은 타고난 본성이니 이것이 바로 순일(純一)한 천성이요. 학자(學者)는 노력이 있는 연후에야 그 본성의 덕을 충실할 수 있나니 힘써서 충실히 할 수 있는 것은 信이라야만 되는 것이요 소삭(銷鑠=태워 녹임)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요 가면(假面)이나 강제로 되는 것도 아니다. 본래가 성분(性分) 중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로되 단지 사람들이 물욕에 가로막혀서 힘쓰지 못하는 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대저 천연의 誠은 四德(元亨利貞)의 實이니 사람에 있어서는 이게 바로 實心인 것이다. 仁이라 하는 것은 측은(惻隱)의 단(端)이요 측은(惻隱)의 實은 핵심이 바로 信인 것이다. 義․禮․智 모두가 그런 것이니 誠이 元亨利貞에서 떠나지 아니 하거늘 信이 어찌 仁義禮智를 외면할 수가 있으랴. 나의 實을 가지고 모든 事物에 운용한다면 하는 일마다 진실 아닌 것이 없을 것이요 감정에 부응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광대한 天地 幽冥의 귀신징소(鬼神徵小)한 곤충(昆虫) 모두가 다 信의 감응으로 동작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는가. 대저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이치는 하나인 것이니 나에게 있는 實心으로서 상대방의 실리에 접촉하여 빈틈없이 묘합(竗合)하는 것이 심히 빠른지라 書傳에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에는 귀신도 감응한다고 칭한 것과 주역에는 信이 감정에 鈍한 돼지나 물고기에 까지 파급된다고 말한 것이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여러 학자들의 수신(修身)하는 방법이나 군왕이 치민하는 요결이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는 까닭에 공자께서 사람을 교훈할 때는 근신(謹信)하라 그리고 진실(眞實)하라 하시고 또 충신(忠信)을 위주로 할 것이며 治國하는 데는 공경하여 섬기고 信實하게 하라 하셨으니 曾子와 子思 孟子가 서로 전수한 것이 자상하고 조심성 있게 밝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맹자의 교가 쇠퇴하자 이단이 성행하고 적막한 漢唐시대에 와서도 이것을 아는자가 희소하더니 北宋때의 程子께서 物理의 循環이 違差가 없다 하고 또 實의 참뜻을 말씀하여 前聖의 開發치 못한 심오한 경지를 개발하니 후학을 위하여 크게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품성의 본체를 지적하지 못하고 학자들의 이론에만 급급하여 사물에 적응하여 接用하는데 대한 말씀뿐이었다. 이에 따라서 말씀한다면 만물이 각기 이치가 있는 것이니 사람도 이와 같이 심정이 있는 것이 實이 아닌 것이 없다. 불이 乾燥한 곳으로 번지는 것과, 물이 陰濕한 곳으로 흐르는 것은 모두 물질의 實理인 것이니 물이 濕潤을 따라 흘러가고 불이 불꽃을 따라 올라 간다는 것이 사람에 있어서의 實心인 것이다. 불을 쓰고자 할 때는 건조한 것을 태워야 하고 물을 쓰고자 할 때는 낮은 곳으로 소통한 후에야 시공하기도 용이하고 사업성취도 되는 것이니 위에 말한 “物理의 循環이 違差가 없다(循物無違)”는 것이 이를 지적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이 어떠한 것이요 하고 물으면 나는 뜨거운 것이라 대답할 것이요 물에 대하여 물으면 나는 찬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니 이것은 내 진심으로 말한 것이오 그사람이 다시 불을 잡으니 손이 뜨겁고 물을 마시니 이가 차더라 하면 나는 그것이 진실이요 허망이 아니라 하겠다. 진실로 실을 말하지 않고 불을 차다고 하고 물을 뜨겁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를 허망하다고 할 것이니 위에 말한 “이실지위(以實之謂)” 즉 실의 참 뜻을 이른 것이라 함은 이것을 지적한 말이다. 군주와 부모를 섬기고 朋友와 교제하는 등 활동하고 휴식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사단에 응수하고 제반 사물에 접촉하는데 있어 대처하기를 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한대의 信이 되는 것이니 천지를 움직이고 鬼神을 감읍케 하는 것도 자연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제 公이 이 信字로서 書齋의 扁額으로 하고 스스로 實信에 勤勉하니 능히 그 본성을 알만 하도다. 그 處事가 精詳하고 動作이 合義하여 이것을 온 국민에게 보일 수 있고 君上께서도 알아주시게 되었다. 지난날의 행적을 고찰한다던가 여러 가지 훈업의 미덕을 칭송하는 등 제반사기는 端木先生의 서문에 모두 언급되어 있으니 내가 무엇을 重言할바 있으리오.(東文選)

信齋說(신재설)   문간공 상경                                                                                                                   글쓴이; 李詹(이첨)

天播五行土旺於四季人具五常信根於四端土與信無專氣無定位而歲功之成人道之行必有於此易曰天行健 君子以自彊不息行健故四時日月錯行代明從古至今無一息之或差不息故自其存養以至應接物我之間無一念之或遠凡天下之物皆實理之所爲故必得是理然後物遂其性矣一草一木苟不得其實理則非信也天下之理具於吾心一動一靜苟不出於實心則亦非信也且吾所以感物物之所以感我皆信也故言忠信則蠻貊可行信在言前不言自喩苟爲善而所存皆實則可以至於聖神體信達順之極天地自位萬物自育四靈畢至矣有虞氏未施信於民而民信之及乎忠信廢而人心疑然後盟誼生春秋五伯假仁義謂之假則非信也是以聖人以仁易食君子以信易生其所以惓惓於信者恐後人之行詐以至欺天也仲尼元氣也運化流行無毫髮之間斷敎人必以忠信其及門私淑之輩曰克復曰誠意曰誠身曰思誠曾思孟之學其傳有所由矣上黨韓公秉心允塞取友直諒事上使下必誠意交孚欲其不忘乎信用扁其齋其存志也篤其講學也精其礪行也至矣文不予鄙累徵之予辱在雅故敢爲之說(東文選)

하늘이 五行을 널리 전파하여 땅이 사계절을 따라 왕성하듯이 사람이 五常을 갖추는데는 믿음이 四端의 근본이 되었으니 土와 信이 專氣가 아니고 일정한 위치도 아니어 세공(歲功)을 이루는데나 人道의 소행이 반드시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라 주역에 이르되 天道의 운행은 꾸준한 것이니 군자는 스스로 쉼없이 정진하여여 한다. 運行이 꾸준한 까닭에 사계절과 달이 바뀌고 날이 바뀜에 지금까지 일순의 차도 없는 것이요, 쉬지 않고 정진하는 까닭에 스스로 본심을 바로하고 정신을 수양하여 나와 만물이 서로 응접하는 사이가 조그마한 생각의 차이도 없는 것이다. 대체로 천하 만물이 빈틈없는 진리로 되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이 이치에 꼭 맞는 연후라야 만물도 그 性을 온전히 갖게 되는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그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信이 아니요,천하의 이치가 나의 중심에 갖추어 있으니 動하고 靜하는 것 하나가 實에서 나온게 아니라면 그 또한 信이 아닌 것이다. 또는 내가 저 物에 감응하거나 그 物이 나에게 감응되는 것도 모두가 信인 것이다. 그러기에 忠과 信이면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옳게 일할 수 있을 것이요. 말하기 전에 信을 감지케 되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니 진실로 仁과 善에서 그 존양을 성실히 하면 성인과 같이 信을 體用하여 순리에 통달하는 극치에 이를 수 있으리라. 천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 만물이 자연스레 자라고 四靈이 어김없이 출현하는 것이니 虞임금은 백성들에게 信이 미치지 못한 데가 있어도 백성들은 다 服信하였다. 忠과 信이 없게 되고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 사라지고 부터는 믿음에 대하여 상호간에 서약하는 제도가 생겼고 춘추시대의 五伯(오백)도 진정한 仁義가 아니였기에 믿음을 잃었던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仁이라면 내 생명을 이어 줄 끼니와도 바꿀 수 있으며 군자는 信이라면 둘도 없는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니 성인군자가 이 信에 대하여 이토록 정성드리고 조심하는 것은 후인들이 詐術(사술)을 써서 하늘을 속일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만물화생의 근본인 원기를 지닌 성인이시다. 그 원기가 운행하는데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忠과信을 반드시 가르쳐야하고 수학하는 자에게는 曰克己니 사욕을 누르고 예절을 쫓을 것 曰誠意니 참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질 것 曰誠身이니 性行이 바르게 몸을 가질 것 曰思誠이니 사고방식을 신중하게 정성을 다할 것 등을 교도하였으니 曾子 子思 孟子의 학문 정통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상당 한공은 마음가짐이 돈독하며 친구와 교제하는데 정직하고 성실하며 웃 사람을 받들고 아랫 사람을 어거하는데 성의와 의리를 다 하였다. 信을 지켜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 書齋扁額(서재편액)에 信字를 썼으니 그 심지가 독실하고 그 강학이 정근하고 그 실행이 至處(지처)하였다. 글 솜씨의 비루함을 가리지 않고 여러차례 청하니 하챦은 나로써 그 아량을 받아 들여 감히 이 해설을 쓴다.(동문선)

文簡公 諱:尙敬 畵像贊(화상찬)1 문간공 상경                                                          吏曹參判 東州 李敏求 撰(이조참판 동주 이민구 지음)

公出華宗自其考柳巷先生文學逮 國家初元策開國勳歷四朝位首揆以卒子姓 熾蔚爲鼎族有遺像二幀在宗孫允治所其一端委垂紳有儀形百之容爲朝家審像之本其一山巾散服有退食自適之容爲私門燕居之本傳至今幾三百祀不能無故汚穿剝諸孫相與合謀召善工修完補綴而又命畵手移榻二本生以備異日無窮之慮夫祭之日必有見于其位周旋出戶必有聞乎歎息之聲況儀形在位永世無射常若警咳之臨下者在子孫追遠之誠不容少懈而民德之歸安得不厚也謹書贊曰

공은 명망있는 가문의 출신이니 그 선고인 류항선생으로 부터 대를 이어온 학자이시다. 조선의 건국에 공훈이 있어 개국공신에 책봉되었고 네분의 임금을 모시고 위계는 수상까지 지내고 서거하였으며 자손이 번창하여 명성 높은 거족을 이루었다. 남기신 초상화 두 폭이 종손 윤치의 집에 있으니 그 중 하나는 단정한 예복으로 儀式과 법도를 갖춘 대관으로서 엄숙한 모습이니 왕실에서 법식을 심사하여 이루어진 畵本이요, 또 하나는 산중은사의 두건과 평상복으로 유유자적한 모습이니 사저에 한거할 적에 이루어진 화본이다. 전해 온지가 300년이나되어 변질됨이 없지 않아서 여러 자손들이 상의하여 능숙한 工人을 불러 훼손을 보완하고 또 畵工에게 명하여 거친 면직 바탕에서 생사초로 화면을 옮겨 후일 영원토록 전하는데 염려 없도록 대비하였다. 제사일에는 위전에서 뵐 수 있을 것이요, 무심히 오고 가는 그 문전에서 탄식의 성음이 들릴 것이니 늘 항차 엄숙한 모습이 그 위좌에 계셔 영구히 변함없이 담소하시는 성음으로  강림하시는 듯 하시니 자손이 추원하는 성의가 조금도 해이할 수가 없을 것이요 민덕의 귀취가 어찌 후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삼가 贊을 쓰니,

惟天眷佑 邦命祈基 乃卑宗臣 名臣以期    하나님이 보우하사 나라의 기틀을 마련할 때에 중신에게 사명주어 지덕 높은 명신이라
顯允韓公 實稟先懿 羽儀四朝
都三事    명망 높은 韓相公은 天稟(천품) 좋고 미덕있어 위의당당 네왕조에 3사 모두 歷典하니
疏勳澹爵
自聞政 申盟開府 鏤功彛鼎    공신이며 澹爵(담작)으로 선정으로 소문 높아 開府에 바친 공은 彛鼎(이정)에 새겼도다
遺像尙新 風流日遠 歷世數百 丹靑重煥    遺像은 아직 선명하나 春風秋雨 옛날이니 수백세를 지난 후엔 거듭 거듭 丹靑하라
公孫多孝 母墜厥緖 承其典形 永華來許    공의 후손 효성 있어 그 遺像을 보존하리 그 법식을 계승하여 영원토록 전하리라.

(影幀一本奉案于楊州墓下影堂=영정일본은 양주의 묘소아래 영당에 봉안되어 있다.)

文簡公 畵像贊(화상찬)2 문간공 상경                                                        領議政 白軒 李景奭 撰(영의정 백헌 이경석 지음)

天開聖祚 手扶日 經濟治平 道尊德宿     천의 받아 나신 성군 태양을 잡았도다 제세안민 좋은 정치 도덕관념 높아지네
詩禮學業 厥亦有源 柳巷之庭 牧隱之門     詩와 禮로 익힌 학업 이 또한 淵源있으니 류항선생 가문이요 목은선생 문인이라
措諸事爲 仁洽義敦 勝國餘裔 一言以全     조처하는 모든 일이 어질고 의로우니 고려조의 후예이나 무난하게 보전하였네
端委廊廟 贊元是專 眷隆累朝 位冠三事     의와 예를 갖춘 廟堂에서 왕업익찬 일념이니 누대왕조 신임 받아 三司의 長 역임하고
茂伐殊勳 世莫與比 凌烟舊像 久而猶新     특수한 그 공훈은 따를 사람 없으리라 凌烟閣에 옛날 화상 오랠수록 더 새로워
朝衣燕服 一則半身 燁然電眼 凜乎風神     조례복과 평상복에 그 하나는 반신이라 電燭(전촉)같은 안광이요 늠름한 풍채로다
美髥欲動 玄髮未銀 雲仍謹守 世有其人     고운 수염 날리는 듯 백발 아닌 검은 머리 자손들이 수호하니 대대로 끊임없이
丹心未畵 厥像尙傳 端莊簡重 仰之宛然     丹心만은 못그리나 초상만은 永傳하네 단장하고 간중하신 그 모습이 완연하니
曷不肅敬 永垂千年
工重模 臨寫于眞     엄숙하게 받들어서 천년만년 전하리라 화공 불러 본을 뜨고 眞像에서 모사하다

 

 

文簡公 諱:尙敬 畵像贊 跋

後孫 文純公 元震(원진) 撰

 선조 문간공 화상찬은 백헌 이상공이 撰한 것이다. 우리 시조 태위공 이후로 대대로 고려조를 섬겨 왔었는데 그 후예가 다(盡)하려 함에 이르러 선조께서 획전(獲全)하였으니 오백년 식록(食祿)의 은(恩)을 추보(追報)함은 태위공의 훈덕과 서로 종시(終始)한다 이를 것이요 자손이 번창한데다가 사록(沙麓)의 경사까지 중흥하였으며 우리나라 억만년의 기초가 여기 있으니 하늘의 보시(報施)가 거짓이 아니라 그 왕하(王賀)를 어찌 다 말하리요

文簡公 諱:尙敬 影幀

 

文簡公 諱:尙敬 賜祭文(문간공 사제문)  문간공 상경

癸卯 三月十六日 丁酉

王若曰良臣開國之勳古今莫重人主報功之典存沒何殊惟卿性行端方識慮精達儒雅推其世濟淸勤服其家傳體備四時稟陰陽中正之氣心潛萬理察否泰往來之機念前朝衰叔之時寔 聖祖經綸之際衆皆推戴而戮力卿亦協贊而與謀奉厥璽符獻于邸第及 膺圖籙俾代咽喉遭逢 列聖之奬知踐歷華聯於中外監司四道黜陟幽明師長諸曹功施乃懋宜其振肅府之風紀調劑殷鼎之和羹等帶礪之山河垂功名於竹帛也嗟予不弔罔知攸爲庶憑元老之詢諮無替厥子之構穫惟卿以四朝之龜鑑享暮境之桑楡丁萱堂母夫人之喪咸稱孝親之道及鯉庭左納言之過足爲有子之榮何七旬之未盈致寡人之興悼慨英靈之己逝宜恤典之斯頒肆酬旣往之勞丕示惟新之渥於戱雲臺圖像忠賢每恨於凋零周禮司勳喪制益勤於終始

 1423년(세종5 癸卯) 3월 16일 丁酉

  왕이 이르기를 개국의 공은 고금을 막론하고 막중하거늘 임금으로써 그 공을 보답하는데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가 무엇이 다르리요 경은 성행이 端方하고 생각이 깨끗하고 통달하여 유아함은 세상의 제도함을 알았고 청렴하고 근면함은 가통을 전함에 충분하였다 몸으로는 사철의 한서를 갖추어 음양중정의 기운을 받고 마음으론 만리를 알아서 否泰往來의 기틀 살피고 먼저 시대의 성쇠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聖祖(이태조)가 건국할 때 여러사람이 추대하는데 경이 협찬하여 옥새를 사저에 바치고 도록에 응하고 인후와 열서의 권장함으로 中外의 華職을 거쳐 4도감사로 명암을 분명히하고 諸曹의 책임을 맡아 공을 세우는데 힘쓰고 柏府의 風紀를 엄숙하게 떨치고 殷鼎의 和羹을 고르게 맛을 내고 帶勵의 산하와 같이 공명이 竹帛에 드리웠다. 슬프다 내가 弔喪을 못하여 어찌할까 오직 경은 4조의 귀감으로 모경의 상유를 누리게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여는 세인이 효자라 칭찬하였고 鯉庭左納言之過를 일컬음은 족히 아들을 둔 영화가 되려니와 어찌하여 칠순도 채우지 못하고 과인에게 슬픔을 주는가 영령이 이미 떠남을 슬퍼하여 휼전의 사반으로 지나간 수고를 보답하여 새로운 우악함을 보겠노라. 아름답다, 운대의 도상이여, 충현이 매양 조령됨이 한이로다. 주례의 사훈으로 상제를 시종하여 끝까지 보살피겠노라

送忠淸道都觀察使 韓尙敬 詩序(송 충청도 도관찰사 한상경 시서) 문간공 상경

洪武丙子夏簽書中樞院事韓公爲忠淸道都觀察使將行請言於予是猶借聽於聾求道於盲也然而交道之舊親戚之情亦豈可以無言哉故敢以瞽說以告之夫民之病有三而治之之術不同生於攝養之乖者可醫之以劑得於稟賦之偏者必治之以學問成於政令之失者非得天材之美而學問之正者不能得以治之也是三者皆所當急然其二繫於一人之利害其一關乎一國之治亂輕重緩急亦較然矣庸醫不能以治其病末學不足以治其氣雖有其材苟無其學其所設施必不能皆中如察病而不以其劑藥而不以其方甚者寒而益之以冷溫而附之以熱能不謬乎王氏之衰貧殘之政病于吾民者極矣惟我 殿下歷試之日立紀網正經界吾民之病十己去其八九及卽寶位發政施仁民所疾苦渙然盡痛者定而瘡者復羸者起而瘠者肥矣然猶病其施未溥而濟未衆也選良吏以治之遣大臣以監之欲使幽遠之地無一夫不獲其所仁之至而義之盡也惟公天性慈詳學問正大其操行也端而恪其處事也精而敏典章奏而出納惟允管樞機而裁決必當其材與學可謂兼備矣故我殿下擇於近臣而有是命盖托耳目以廣視聽而察民病非外之也以萬民之利病關于一國之治亂者乃付公而治之可不敬哉傳曰如保赤子心誠求之雖不中不遠苟能誠心而求之虛心以處之寒者煦之者濡之呻吟者變於謳歌疲者登於仁壽然後上可以不負於國家下可以不負於斯學矣若夫簿書錢穀之末自有成法奚容贅焉詩曰

朝鮮太祖5年丙子(1396明太祖洪武29年)여름에 첨서중추원사 한공(문간공)이 충청도 관찰사로 특임되어 장차 부임할 때 나에게 격려의 말씀을 청하니 이것은 귀머거리에게 말을 들으라는 것과 봉사에게 길을 물음과 같은 격이다. 그러나 도의로 사귄 친구요 또 誼(의)로 생각한들 어이 한 말씀 없을 수도 없는 처지라서 스스럼없이 어리석은 말을 몇마디 고한다. 대저 백성의 병이 세 종류가 있으되 그 병을 다스리는 법이 각기 다르니 養生(양생)의 잘못으로 생긴 병은 돌침으로 다스려야 하고 타고난 품성이 中正을 잃은데서 생긴 병은 학문으로 다스려야 하고 政令(정령)의 실수는 天再(천재)로서 학문의 正道를 얻은 자가 아니면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니 이 세가지가 모두 급한 당무이지만 둘째까지는 그 일개인의 이해 관계뿐이고 셋째번 것은 일국의 정치에도 관련되는 것이어서 輕重과 緩急을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용렬한 의원은 그 병을 다스릴 수 없고 천박한 학자로써는 그 운기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만한 재질이 있더라도 그 만한 학식이 없으면 시술이 능히 적중치 못할 것이니 가령 진료하는데 진맥도 제대로 못하고, 조제하는데 약방문도 제대로 못하며 심지어 寒症에 냉약을 더하고 온증에 열제를 더하는 따위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고려 왕씨가 쇠망하던 시대에 빈약하고 천박하였던 정치로 백성에게 끼친 병폐가 극심하더니 우리 전하께서 여러모로 治民을 시도할 때 논리와 綱常(강상)을 세우고 시비와 선악을 바로 잡았으므로 민폐가 십중팔구 없게 되었다. 급기야 즉위하여 仁으로 정치를 시작하니 백성의 병과 고통이 완연이 풀어져 통증이 없어져 부종이 치료되었으며, 쓰러진 자가 일어나고 여윈 자가 살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정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지 못하고 濟民(제민)이 대중에게 미흡함을 염려하여 선량한 관리를 채용하여 치민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감찰케하고 아무리 한가한 시골과 멀리 떨어진 지방의 단 한 사람도 안정된 제자리를 못가진 사람이 없게 하였으니 지극한 인애와 극진한 의리로다. 오직 공은 천성이 자상하고 학문이 올바르며 그 操行이 단정하고 삼가고 조심하며 그 처사가 꼼꼼하고 신속하며 典章奏(上書)를 관장함에 출납이 공정하였고 의정의 樞密機要(추밀기요)를 관장할 때는 裁決(재결)이 타당하였으니 인격과 학식을 겸비함이로다. 그러므로 우리 전하께서 주위의 여러 신하 중에서 특선하여 이번 하명을 내리신 것이니 나의 눈이 되고 귀가되어 시청을 넓히사 만백성의 병폐를 바로보자는 뜻 외는 다른 뜻이 없는 것이다. 아,, 장하도다. 백성의 이해가 바로 나라의 治亂에 관련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공에게 부탁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니 어찌 존경치 않을 수 있는가 가히 존경할 만한 일이 아닌가 경전에 이르기를 백성을 갓난아기 보호하듯 하라 하였으니 정성들여 노력한다면 비록 적중은 안되더라도 성공이 멀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근면하고 허심탄회하게 처사하여 추위에 떠는 자를 따뜻이 해주고 목마른 자를 축여주며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자가 희열을 구가토록 해주고 병으로 쓰러지는 자를 회춘장생토록 해야 위로는 국가의 지상명령을 다한 것이요 아래로는 학문의 진의를 관철하였다 할 수 있으리라 저 공문서나 전곡의 출납 같은 것은 각기 법규가 있을 것이니 무슨 군소리 할 필요가 있겠는가.

精敏天資美 忠淸世德傳        정교하고 민활한 천성이 깨끗하고 아름다워 충청도의 명문가에 전해 오는 세덕일세
商功著 分陝化初宣        어진 임금 추대한 공명이 높아 두메 산골 벽촌에도 어진 정치 베풀었네
治道將升泰 風謠定八編        뻗어가는 선정 길에 태평연월 다가오니 우리 님의 성덕 기린 송덕가도 드높아라
會看樹葉 蔽芾映春        周 召公의 仁政을 기려 사랑 받던 저 아가위 잎은 지금도 우거져 봄 안개가 서리었네

陽村(양촌) 權近(권근) 撰(東文選)

陽村先生이 지은 文簡公에 대한 글 문간공 상경

題雜後集(제잡영후집)

陽村(양촌) 權近(권근) 撰

先生柳巷韓公詩律最淸峻大爲韓山牧隱公所稱賞今其嗣信齋先生奉使關東錄一帙愚嘗得而觀之淸新沖澹眞能得其家法矣愚旣跋其後而歸之今又得觀此錄圭復不己益其妙其雄雉云一心何耿介五彩自鮮明者眞善於自道者矣後之觀者不謂吾言爲信(東文選)

류항선생 한공의 시율이 뛰어나게 청아하고 고상하여 목은 한산 이공이 대단히 칭찬하더니 류항선생의 아들인 신재선생이 관동지방 관찰사로 봉직할 때 책한질을 만들었는데 내가 읽어 본 즉 청신하고 담백한 맛이 진실로 그 가통을 잘 이어받았다. 내가 그 책 말미에 발문을 썼는데 지금 다시 보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어도 싫지 않고 점점 그 묘미를 찬탄하게 된다. 그 웅치를 제하에 읊었으되 한 마음이 어이 그리 진실한가. 오색의 영롱한 빛이 스스로 선명하도다. 이 오언시 한귀절은 참으로 자기를 말한 뜻이 잘 표현되었다. 후일에 이 글을 보는 이가 어찌 내 말을 믿지 않겠는가.-東文選(동문선)-

題江原雜前集跋

右江原雜都觀察使淸城韓公之所著也公以門閥之胄詩禮之學早際風雲蔚爲開國元勳出入中外卓有聲績稟氣之剛明處事之精詳爲世所服至其發於題者則典實而無華淸峻而不野發乎性情止乎禮儀忠君戀親憂國愛民之心然溢於賦興之中古人云登高能賦可以爲大夫公之謂矣

永樂四年丙戌夏四月旣望(東文選)

이 강원잡영은 도관찰사 청성군 한공의 저술이다. 공은 명문의 후예로 시와 예등 학문에 경지를 이뤄 조년에 풍운이 거센 변동기를 당하여 장중하게도 개국원훈이 되시고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탁월한 업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천품이 강직하고 명쾌하여 모든 처사가 정밀하고 자상하니 세인이 모두 감복하였다. 그 쓰고 읊은 詩賦에 발로되는 정취에 법식이 신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청아하고 고상하여 속된 데가 없고 본성에서 발현되어 예의에 위배된 데가 없으니 군주에게 충성하고 부모를 연모함과 국정을 우려하고 만민을 애무하는 심정이 은은히 賦(부)와 興(흥)에서 넘쳐 흐르는지라 옛 사람이 이르되 높은 곳에 올라서 능히 賦(부)를 지을 수 있어야 大夫가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두고 한 말이로다.

1406년 (태종6丙戌)여름 4월 16일(동문선)

文簡公이 남기신 글  문간공 상경

四仙亭(사선정)

亭上奇觀似晝成 疑凡骨入三淸     이 정자에 奇한 절경 한 폭의 그림 이루었으니 속세의 범골이 삼청궁에 왔는가 궁금하구나
雙雙白鳥和烟靜 六六奇峯照水明     쌍쌍이 나는 백조 연무 속에 고요하다 육시육 기한 봉이 수면에 빚어 아름답구나
甲乙難尋碑篆跡 宮商己變棹歌聲     갑을의 년대는 비석에 문전의 흔적 찾을 길 없고 고전의 우아한 풍락 사공의 노 젓는 노래로 변했다
惟餘石面丹靑在 誰解仙郞萬古情     오직 호화한 석면에 단청의 흔적만 남았으니 仙郞의 萬古風情 그 누가 풀 수 있으랴

     題高城三日浦(제고성삼일포)

一區勝景畵難成                                   이 일대의 좋은 경치 그려 내기 어려워라
點點奇峯照水淸                                   물에 비친 저 봉우리 그림자가 아름다워
六字丹書(石面畵永郞徒南石行)雖剝落    돌에 새긴 여섯 글자 알아 보기 희미하나
四仙遊跡尙分明                                   四仙들이 놀던 자취 아직까지 분명하구나
華亭想見絃歌會                                   亭上에는 풍악소리 노는 모습 보이는 듯
精舍猶聞梵唄聲                                   절간에는 염불 소리 낭랑하게 들리는 듯 하여라
況在蓬壺毛骨
                                  蓬萊方丈(봉래방장) 왔던 내가 毛骨이 송연하구나
世間何事更關情                                   세상사를 알 수 없네 이런 풍정 또 있는가.

國朝名臣言行錄  韓尙敬 文簡公 문간공 상경

字叔敬號信齋淸州人至正庚子生仕高麗爲司膳署令禑王八年壬戌登第拜禮儀佐郞藝文應敎壬申我太祖革命叅開國功臣授中樞院事都評議使司事歷忠淸京畿觀察使封西原君 太宗朝拜叅知議政府事出爲豊海江原觀察使入爲吏曹判書乙未拜相進封府院君官至領議政世宗癸卯卒年六十四
문간공의 字는 숙경,號는 신재이니 본관은 청주이다. 恭慜王9年庚子(1360元順帝至正20年)생이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사선서령의 직에 있다가 禑王8年壬戌(1382)에 과거에 합격하여 예의좌랑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壬申年(1392)에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는 혁명에 참여하여 개국공신이 되었고 중추원사 도평의사사에 제수되고 충청, 경기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서원군에 봉작되었다. 태종때에 참지의정부사에 배명되고 외직으로 나가 풍해,강원 관찰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太宗15年乙未(1415)에 재상에 임명되었고 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世宗5年癸卯(1423)에 향년 64세로 생을 마쳤다.

太宗卽位謂尙敬曰予承丕緖罔知攸濟心實以爲難焉尙敬對曰古人有言曰后克艱厥后 殿下克知其難實我東方之福也然非知之艱行之惟艱 上嘉納之(並遺事)
태종이 즉위하여 상경에게 물었다. "내가 왕업을 이어 받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 모르겠소, 실로 난감하기만 하네" 상경이 대답하기를 "엣 어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업을 이어받아 그 이전의 왕업을 그대로 본 받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알고 계시니 실로 우리 동방(조선)의 복 된 일입니다. 그러나 알기가 어려운게 아니라 실행하기가 어려움을 아셔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받아 들였다.

欽差兵部主事端木智來公爲接伴使數旬禮待惟謹智曰晏平仲善與人交久而敬之公其人也(並遺事)
흠차병부주사 단목지가 조선에 왔었다. 이때 공은 접반사로서 수십일을 예의로 접대하였다 이에 단목지가 말했다 "안평중은 사람들과 교재를 잘하며 친구와 오래 사귀어도 상대방을 공경한다 했는데 공이 바로 안평중과 같은 사람이다."(遺事)

時有言高麗宗室王麻有孼子一人在民間知申事金汝知以聞令政府刑曹臺諫雜治過實 上曰開國之初高麗宗室不得保全非 太祖本意一二大臣之策也予欲保全遺裔意己定矣玉川君劉敞曰 殿下今日之言實我宗社萬世之福也吏曹判書韓尙敬曰國初臣爲知申事得聞是事實非太祖之意(日月錄)
당시에 고려 종실의 왕마라는 孼子(서자)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얘기가 민간에 있었는데, 지신사 김여지가 이것을 듣고 政府의 형조와 대간으로 하여금 그를 다스리게 하니 이에 대해 임금이 말했다. "조선 개국 초에 고려 종실이 보전될 수 없었던 것은 태조의 본뜻이 아니었고 한두명 대신의 실책이었다. 나는 고려 종실의 후손을 보전할 뜻을 이미 굳혔노라"하셨다. 이에 옥천군 유창이 말했다."전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은 진실로 우리 종사에 만대의 복이 될 것입니다." 이어 이조판서 한상경이 말했다. "국초에 신이 지신사가 되었을 때 들어 알 게 되었습니다. 고려 종실이 보전되지 못한 것은 태조대왕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日月錄)

三功臣獻壽尙敬稱觴以進 太宗曰予卽位之初卿告予以后克艱厥后非知之艱行之惟艱予今不忘矣尙敬對曰 上旣不忘臣之言請更啓一言 太宗曰何對曰靡不有初鮮克有終 又稱善(遺事)
삼공신이 왕에게 헌수하였는데, 상경이 헌수하자 태종이 말했다. "내가 왕위에 처음 즉위하였을 때 경이 나에게 왕다운 왕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는 것이 어려운게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아셔야 한다고 해서 나는 지금도 경의 그말을 잊지 않고 있다네" 상경이 대답하되 "왕께서 소신의 말씀을 아직도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어떤 일이던 시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은 드믑니다" 태종이 또한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遺事)

上壽 上王 孝寧大君補領敦寧柳廷顯領議政韓尙敬右議政李原宗親駙馬六代言侍宴 上進卓上壽 上王曰予之避位欲貯福也今反益尊矣酒群臣舞 上王曰付托若不得人雖欲忘憂得乎主上眞守文太平之主也尙敬等曰實因 聖上知子知臣之明臣民祝手萬年永觀太平極歡乃罷(日月錄)
왕(태종)이 상왕(태조)을 뫼시고 헌수할 때 효령대군 보, 령돈녕 유정현, 영의정 한상경, 우의정 이원과 그외 많은 종친, 부마, 육대언이 연회에 참석하었다. 주상이 무릎을 꿇고 상왕에게 헌수하자 상왕이 말했다. "내가 주상을 피했던 것은 복(덕)이 쌓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아보니 더욱 존중 받게 되었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게 되자 군신이 모두 춤을 추었다. 상왕이 말하기를 "지금 주상을 부탁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내 비록 근심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주상이 진실로 文을 지킨다면, 나라의 태평을 이룩할 주인이 되리라" 한상경등이 말했다. "진실로 聖上의 명찰하심으로 아들도 알아주시고 신하도 알아주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장수하시고 길이 태평을 누리시기를 축수할 것니다. 이렇게 하여 즐거움이 절정에 달하여 파하니라.(日月錄)

公自少不喜遊戱識量精敏行己端恭及長就仕淸潔自持居家克儉衣服飮食取潔而己事母定省晨昏親臨甘旨雖官高衰老未廢焉遭喪旣襄事病益篤語人曰吾有疾久矣惟恐先亡以傷老親之心今人子事畢矣死且無憾(遺事)
공은 소시적부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지식을 쌓는데 정성을 다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처신하는데는 단정하고 공손했다. 장성하여 벼슬 길에 오르자 청렴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으며 집에서는 검소하고 의복과 음식은 깨끗한 것이면 족하였다. 어머니 섬김에 있어 조석문안을 미루지 않고 친히 어머니의 음식 맛을 보았으며 나이 늙고 벼슬이 비록 높아져도 그치지 않았다. 부모상과 또 3년상을 다 치르고 나서는 공의 병이
깊어지자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게도 병이 있은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보다 먼저 죽어 연로하신 부모님의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릴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마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다.(遺事)

公以門閥之胄詩禮之學早際風雲蔚爲開國元勳出入中外卓有聲績稟氣之剛明處事之精詳爲世所服至其發於題者則典實而無華淸峻而不野發乎情止乎禮儀忠君戀親憂國愛民之心然溢於賦興之中(陽村集 題江原雜前集跋)
공은 명문의 후예로 시와 예등 학문에 경지를 이뤄 조년에 풍운이 거센 변동기를 당하여 장중하게도 개국원훈이 되시고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탁월한 업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천품이 강직하고 명쾌하여 모든 처사가 정밀하고 자상하니 세인이 모두 감복하였다. 그 쓰고 읊은 詩賦에 발로되는 정취에 법식이 신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청아하고 고상하여 속된 데가 없고 본성에서 발현되어 예의에 위배된 데가 없으니 군주에게 충성하고 부모를 연모함과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연히 시를 읊는 흥취 중에 넉넉히 드러났다.(陽村集 題江原雜前集跋)

文簡祠 庭碑(문간사 정비) 문간공 상경

조선조의 태조가 건국의 창업을 일으킬 때 웅략을 품은 영재들이 구름 같이 모여 대업에 협찬하였다. 이 창업시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서원부원군에 봉작된 한상경이 시중 裵克廉(배극렴)과 함께 국인을 이끌고 보새를 받들어 태조의 사저에 찾아가 이를 바치고 천세를 불러 그 공으로 익대개국공신이 되었다. 그 후 태종이 등극하여 북방을 순행할 때 삼공신이 술을 올려 헌수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즉위하였을 때 경이 나에게 앞으로의 극복해야할 어려움을 일러 주었는데 그 뒤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어려움을 실행하여 내가 지금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 하니 공이 다시 고하기를 처음이 좋으나 끝도 좋아야 할 것이라 하니 또 칭찬하셨다. 향년 64세로 세종 계묘년에 세상을 뜨니 왕이 슬퍼하고 使臣을 보내 조위하고 3일간 정사를 폐하였으며, 葬事를 官에서 보살펴 賻米豆共 70석을 하사하고 제문까지 내렸는데 그 제문에 良臣開國의 공훈이 고금에 막중하니 人主가 報功하는 의전의 存沒이 어찌 다르랴 경은 성행이 단정하고 識慮가 정달하여 否泰往來의 機微를 잘 살폈다. 성조가 개국 창업을 할 때는 보새를 邸第에 바쳤으니 이는 산하도 아는 일이요 역사에 공명을 드리운 일이다. 아!. 운대도상(雲臺圖像)의 충현이 조령(凋零)을 한하고 주례에 사훈(司勳)의 상제(喪制)는 그 시종이 익근(益勤)하다 라고 하였고 賜號를 문간이라 하였다.
英祖40年甲申(1764)에 후손 應宇(通訓)가 옛 화상이 그을리고 낡아 새로이 상을 모사하여 溟州 發翰(현:동해시 발한동)서쪽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향화를 이어 오다가 계축년(1973) 가을에 종인들이 협의하여 그 서쪽에 구제에 따라 옮겨 짖고 묘정에 비석을 세워 端愚(단우)가 나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청한다. 아!. 공이 류항선생에게서 출생하고 목은의 문하에서 詩禮의 학업을 익혀 이태조 창업 때 공훈이 조정에서도 그 위계가 가장 높아 성예(聲譽)가 길이 빛나고 있는데 어찌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무사(蕪辭=세련되지 않은글)를 적을 수 있겠는가. 堂宇가 壯麗하고 빈조(藻)가 깨끗하여 후승(後承)들의 선조에 대한 사모의 정이 절실하니 하물며 綱淪法之日에 있어서랴. 이에 일은 필하였으나 모름지기 실행이 어렵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어렵다는 계훈을 잊어서는 아니 되고 조석으로 충효를 일깨워 덕을 닦으면 문간공의 광휘는 더 할 것이다. 불초한 사람이 이 뜻을 힘을 다하여 받들고 사를 맺지 못하노라

乙卯年(1975) 月 上澣  唐城 洪鍾凡 謹撰

廟庭碑文(묘정비문) 문간공 상경

서원부원군 한상경 선생의 시호는 문간이요, 관적은 청주로 문경공 한수 선생의 아들이시다. 선생은 고려조에 등과하여 사관하였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국권을 지탱하지 못하게 되자 태조를 추대하고 보새를 봉헌하여 조선 개국에 주석의 위훈을 세워 익대개국공신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경기, 충청, 황해, 강원도의 관찰사를 지냈고 내직으로는 공조, 이조의 판서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마침내 병신년에 영의정에 올라 서원부원군에 봉작되셨다. 선생은 근학청렴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노년에 관직이 높아 졌어도 어머님 섬기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경자년에 어머니의 상을 치루고 병이 깊어져 세종 5년 3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부고에 접한 세종께서는 애도의 뜻으로 3일간 국사를 휴무케 하고 良臣開國(량신개국)의 공훈은 고금에 막중하고 인주보공의 전은 존몰이 어찌 다르리오 경은 평생 성행이 단정하고 識慮가 정달하였다는 제문을 내려 선생의 공적과 인품을 칭송하였다. 영조 갑신년(1764)에 후손 應宙(응주), 應宇(응우), 應正(응정)이 중심이 되어 동해시 사문동 양촌에 선생의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셔 향화를 봉대하다가 계축년(1973년) 가을에 영당을 그 서쪽에 이건하고 후손 瑞愚 典校(서우 전교)가 묘정비문을 나에게 지으라 하나 류항의 문벌이요 목은의 학통인 선생의 행적에 함부로 붓을 드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될까 두려워 여러번 거절하였으나 누차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끝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蕪辭를 짓기에 이르렀다.

文簡公 諱:尙敬 神道碑銘 (문간공 휘:상경 신도비명)문간공 상경

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補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春秋館藝文館書雲觀事世子師西原府院君贈諡文簡韓公神道碑銘幷序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춘추관예문관서운관사세자사서원부원군증시문간한공신도비명병서

惟 太祖龍興盛際名公卿以德望稱者未嘗無人惟是鍾山嶽之氣而稟鍾鼎之量以王祥姜詩之行而負希文君實之望而朝野加額歿而海痛惜雖婦孺輿莫不樂道公前日之事靡然一辭慕仰而莫不歎誦以澤斯民矣嗚呼盛哉公諱尙敬字叔敬號信齋姓韓淸州人
태조가 용흥할 즈음에 이름 있는 공경들의 덕망으로서 일컫는 자가 많았다. 여기에 산악의 기운을 타고 종정의 도량을 받아서 王祥과 姜詩의 행실로 希文과 君實의 名望을 온 몸에 모아서 朝野가 加額하고 죽어서는 환해(海)가 아파하고 아쉬워하며 비록 婦儒와 여대(輿擡)까지도 한결 같이 일컬었다. 공의 지난날 일과 풍미하던 당시의 일을 우러러 사모하고 백성들을 윤택케 하였음을 탄송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장함이여. 공의 휘는 상경이요 자는 숙경이며 호는 신재요 성은 한씨인데 본은 청주다.

始祖諱蘭佐高麗太祖統合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門下太尉始居淸州仍以爲籍諡威襄傳至七世諱康高宗戊子生癸卯國子監試壯元後登第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致仕癸卯二月二十二日卒享年七十六諡文惠歷事高宗忠烈兩朝有相業歷史有傳寔爲公之五代祖也高祖諱謝奇文科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制誥贈翰林直學士亞中大夫經車都尉高陽縣候曾祖諱渥文科宣力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上黨府院君諡思肅配食忠惠廟庭性勤愼有器局有史傳祖諱公義字宜之丁未生三重大匡戶部尙書淸城君乙巳十月卒壽五十九諡平簡慈詳勤儉動遵禮法忠定王遜位之日奏食白馬山下人以爲忠考諱脩字孟雲號柳巷忠惠王癸酉生丁亥文科輸忠贊化功臣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淸城君甲子三月二十八日卒壽五十二諡文敬十五登科歷事三朝學文行誼爲世所宗有文集刊行金石之刻亦多傳時人謂文如班馬筆追鍾王歷史有傳與牧隱李穡先生有道誼交妣靜寧宅主安東權氏侍中吉昌府院君適之女以恭愍王庚子生
시조 휘 란은 고려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 벽상공신 삼중대광 문하태위에 오르시고 청주에 사신 까닭에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7세에 이르러 휘 강이 고려 고종 무자년에 나셔서 계묘년에 국자감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신후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를 치사하시고 계묘년 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6이요 시호는문혜이다. 고종과 충렬왕 두 임금을 섬기고 相業을 이어 왔음을 역사가 전하고 있으니 공의 5대조가 되신다. 고조 휘 사기는 문과에 급제하시어 조정대부 첨의부 좌사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고에 이르고 한림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 고양현후를 증직 받으셨으며, 증조 휘 악은 문과에 급제하시어 선력좌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판전리사사 상당부원군에 이르시고 시호는 사숙이다. 충혜왕의 사당에 배향되시고 성품은 부지런하고 신중하였고 국면을 이끌 만한 큰 역량이 있음을 역사는 전하고 있다. 조부의 휘는 공의 字는 의지인데 정미년에 나시고 삼중대광 호부상서 청성군에 이르시고 을미년 10월에 돌아 가시니 壽가 59세요. 시호는 평간이고 성품이 자애하고 꼼꼼하시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시며 모든일을 행함에 예법에 어긋남이 없고 충정왕이 왕위를 물려주던 날 백마산 아래서 왕에게 음식을 드시기를 권하여 신하로서의 도리를 행하였다. 부친 휘 수는 자가 맹운이요 호는 류항으로 忠惠王3年癸酉(1333)에 나셔서  忠穆王3年丁亥(1347)에 문과에 오르시니 수충찬화공신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청성군에 이르시고 禑王10年甲子(1384) 3월 28일에 돌아가시니 壽는 52이시다. 시호는 문경이고 15세에 등과하여 세임금을 섬기시고 학문과 올바른 삶이 중인의 존경을 받으셨으며 문집을 남기시고 金石에 글씨를 많이 전하셨으며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장은 班固(반고)나 司馬(사마)와 같고 필법은 鍾(종유)와 王羲之(왕희지)를 쫓을 수 있다고 하였음을 역사가 전하고 목은 이색선생과 도의로써 사귐이 깊었다. 정녕택주 안동권씨 시중 길창부원군 적의 따님으로 공민왕 경자년에 공을 낳으셨다.

公儀觀魁偉沈毅醇謹不好嬉戱八歲入學刺口難疑非孺子爲者未舞象卓然早成봉遊牧隱李先生之門沈潛義理德修行高常曰丈夫當以聖賢爲期一言一行動遵繩尺勉承庭訓擢壬戌文科第三人拜禮儀佐郞遷右正言歷典理正郞藝文應敎工部摠郞宗簿令歲甲子丁父憂公年二十五哀毁甚執古禮不懈人莫不感歎事壬申陞密直司右副代言李朝開國與推戴之議奉寶璽以獻賜翊戴開國之號遷中樞院都承旨陞推忠翊戴開國功臣僉書中樞院事都評議使事出爲忠淸道都觀察使封西院君又爲京畿左道都觀察使建文二年 太宗卽位謂公曰予承丕緖罔知攸濟心實以爲難焉公對曰古人有言曰后克艱厥后今 殿下克知其艱實我東方之福也然非知之艱行之惟艱 太宗嘉納之拜知議政府事 欽差兵部主事端木智來 命公爲接伴使數旬禮待愈勤智曰晏平仲善與人交久而敬之公其人也出爲豊海江原兩道都觀察使入爲工曹判書遷知議政府事兼司憲府大司憲 太宗皇帝巡幸北方遣公欽問起居遷戶曹判書三功臣獻壽公稱觴以進 太宗曰予卽位之初卿告予以后克艱厥后非知之艱行之惟艱予今不忘矣公對曰 上旣不忘臣之言請更啓一言 太宗曰何對曰靡不有初鮮克有終又稱善歷贊議政府事吏曹判書乙未陞西原府院君議政府右議政丙申拜領議政
공은 뛰어난 인품과 훌륭한 풍모로 모든일에 생각이 깊고 굳세며 후덕하고 조심하고 삼갔으며 놀고 즐기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어려움과 의문을 칼로 찌르듯 정확하여 어린애가 아니라 어엿한 어른과 같았다. 일찌기 목은선생 문하에서 의리를 배워 덕을 닦고 행실이 높았다.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성현을 본받기를 기약하여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야하고 가정에서도 교육을 힘써 이어가야 한다고 하셨다. 禑王8年壬戌(1382)문과에서 3인에 뽑혀 예의좌랑이 되시고 이어 우정언,전리정랑,예문응교,공부총랑 종부령을 역임하다 갑자년에 부친상을 당하시니 공의 나이 25세였다. 하늘이 무너질만큼이나 슬퍼하시되 옛 예절을 심히 고집하시고 행함에 게을리 아니하시니 감탄 않는 이가 없었다. 밀직사 우부대언에 승진하시고 조선이 개국할 때 모의에 참여하고 보새를 받들어 올려 익대개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중추원 도승지에 옮겼다가 추충익대개국공신 첨서중추원사 도평의사사에 오르시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서원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경기좌도 도관찰사가 되시다.  定宗2年庚辰(1400明惠帝建文2年)태종이 즉위하여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업을 이어 받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 모르겠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라 하시니 공이 대답하기를 "엣 어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진정한 왕이 된다고 했으니 이제 전하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조선의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알기가 어려운게 아니라 실행하기가 어려움을 아셔야 합니다."하니 태종이 가납하여 참지의정부사로 삼았다. 흠차병부주사 단목지가 명에서 사신으로 왔을 때 상경을 접반사로 명하여 수십일을 예로 대하였더니 단목지가 이르기를 안평중(晏平仲)은 선으로 사람들과 교류하였기에 오래도록 공경을 받더니 공이야말로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외직으로 풍해(황해), 강원 양도의 도관찰사를 지내시고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를 지낸후 참지의정부사겸 사헌부대사헌으로 옮기셨다. 명나라 태종이 북방을 순행할 때 공을 보내 기거를 흠문하였고 호조판서로 전임하였다. 삼공신이 왕에게 헌수하였는데, 공이 헌수하자 태종이 말했다. "내가 왕위에 처음 즉위하였을 때 경이 나에게 왕다운 왕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는 것이 어려운게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아셔야 한다고 해서 나는 지금도 경의 그말을 잊지 않고 있다네" 상경이 대답하되 "왕께서 소신의 말씀을 아직도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어떤 일이던 시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은 드믑니다" 태종이 또한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참찬,의정부사,이조판서를 역임하고 太宗15年乙未(1415)에 서원부원군 의정부우의정에 승진되고 太宗16年丙申(1416)에 영의정이 되어 부원군에 봉하여졌다.

公以司憲府大司憲 太宗六年閏七月 上時務十事一曰鱞寡孤獨文王發政之所先也當今中外豈無無告而失所者乎願令漢城府留後司各道觀察使推考存恤開寫其名啓聞二曰孟子云人人親其親長其長而平願京外孝子順孫義夫節婦考問褒賞以勵風俗三曰五部學堂敎授訓導官聚集生徒每日訓導終日乃罷而無點心亦無使令反不如州郡鄕校宜給田與奴婢四曰凡有赦罪囚放免則盜之人以非一罪而放之付于親戚或同州里者其人慮徵贓物尋卽逃匿徵賊之日責其所付之人定日囚禁或徵其物如是則放宥之恩反爲無辜之害誠爲未便願自今盜遇赦只勿笞杖仍置于獄以待贓物畢徵而後放出五曰城中凡有役使漢城府乃令五部坊里人爲之然人皆規免而役使者皆無告之家兒童婦女殊失 殿下哀矜之意願自今里人役使惟路緣而居者除其前路掃除外一皆禁止六曰無識之徒農月田獵大傷禾穀無告之民怨及于天願自今京畿及外方農月擅自獵者痛行禁理七曰兩界鷹者進上之時有持私鷹者頗多來往之際弊不勝言願定都巡問使進上之數而都兵馬使母得進上不惟鷹子一事其他進上除都巡問使外亦皆禁斷諸郡守令與團練使多畜私鷹貽弊於民幷宜痛禁八曰外方守令凡於賦役之事或有憑據古規移文於吏且於田地踏驗軍資納稅之際亦定監考皆不身親之於是姸吏鄕愿乃作威福無告之民受弊不淺監司詳加考察如有不躬不親者痛行糾理其納稅之事須令納者量所餘雖一斗升悉令還給九曰州郡各里方別監進退官門支應差使且於里中事或遲緩則受鞭其故莫甚故人皆規避無告者一受其任或五六年或至十年而不遞因是家産蕩盡流離失所者有之守令令一里之人每戶一朔相每月季具錄其名呈于監司以爲恒式十曰州郡廩給田租或不足於支應故許於其境擇陳荒可耕處無弊耕鍾以補不足守令占移接人田多置屯田民受其弊以致其亡者有之各官屯田宜定其數母令泛濫違者以不廉論罪也
공이 사헌부대사헌으로 태종 6년 윤7월에 시무 열까지를 올리니 첫째, 鰥寡孤獨(환과고독)을 文王이 정사하는데 먼저라 이제 당하여 어찌 고하는 자가 없어 가야할 길을 잃고  있는 자 없겠습니까. 원컨데 한성부와 각 도 관찰사로 하여금 찾아내어 돌보게 하고 그 이름을 올리게 하며, 둘째, 맹자께서 이르기를 사람이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면 온 나라가 편안하리라 하였으니 원컨데 나라 안의 효자순손과 의부절부를 찾아 포상하면 풍속이 순화될 것이며, 셋째, 오부학당에 교수와 훈도를 두고 관에서 생도를 모아 매일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고 또한 사령이 없으니 각각의 주군 학교에 전답과 노비를 주어야 하며, 넷째, 죄 지은 자들 중 절도한 자를 풀어줄 때는 친척이나 같은 마을사람의 보증으로 풀어주는데 장물을 곧 감추고 도망한다면 보증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구류를 살리고 그 장물을 찾아내는데, 그렇케하면 풀어주는 은혜가 오히려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원컨데 지금부터는 절도한 자는 태장(곤장)을 쳐서 그냥 내보내지 말고 장물을 찾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다가 찾았을 때 풀어주도록 할 것이며, 다섯째, 무릇 성내에 노역이 있을 때 한성부가 오랑방리 사람으로 하게 하나 왠만한 사람들은 다 빠지고 실제로 역사하는 자는 다 힘없는 집의 부녀자나 아동들밖에 없으니 전하가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뜻이 왜곡되어 백성들에게 전해지니 원컨데 이제부터는 길 옆에 사는 자는 길 앞 청소를 제외하고는 다 금지케 하시고, 여섯째, 상식없는 무리들이 농사철에 사냥을 한다고 하여 곡식에 큰 피해를 끼쳐 무고한 백성의 원성이 하늘에 미치니 원컨데 이제부터 경기지방과 외방까지 농사철에 사냥하는 자의 출입을 금하고, 일곱째, 매를 진상하는데 사사로이 매를 가진 자들이 내왕하여 폐단이 많으므로 都巡問使(도순문사)에게 진상할 수를 정하고 都兵馬使(도병마사)는 진상을 받지 못하게 하고 기타 진상을 도순문사 외에는 다 금지시키고, 여러 고을의 수령 및 단련사들이 사사로이 매를 많이 길러 민폐를 많이 끼치니 아울러 이것도 금함이 마땅하며, 여덟째, 외방의 수령들이 부역하는 일에 예전의 규칙을 빙자하여 아전들에게 령을 내리고 논밭을 답사하여 군자금의 납세등을 감독하여 정하는데 몸소 하지 않으니 간사한 향리나 이방등이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예가 많으니 감사는 자세히 고찰하여 몸소 친히 않는 자와 납세의 업무를 규명하여 모름지기 납부한 수량이 남으면 비록 한 말이라 할지라도 다 돌려주게 할 것이며, 아홉째, 州郡 各里坊 別監이 이 관문을 진퇴하는데 다음에 응하여 와서 또 마을의 일이 혹시 지연되면 편달을 받게 되어 그 폐단이 막심하여 사람들이 다 피하여 무고자에 그 책임을 물어 5,6년 혹은 10년이 지나도록 바꾸지 않아 이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유리되어 떠도는 자가 있으니 수령들은 한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집집마다 한번씩 서로 바꾸게 하고 월말마다 그 명단을 기록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게 함을 법으로 정하게 하고, 열번째, 州郡의 창고에서 부과하는 논밭에 대한 세금 부과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거나 묵은 땅과 경작 할 수 있는 땅을 가려 갈고 씨뿌림에 폐단이 없게 하여 부족 분을 보태는데 고을 수령이 정함에 둔전을 과하게 많이 두어 백성이 그 폐단으로 망하는 자가 생기니 각 고을의 둔전은 마땅히 그 수를 정하여 과하지 않게 하여 이를 어기는 자는 엄히 죄를 논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公致仕于 太宗十八年戊戌六月日事讀書不言人是非兢兢然先訓自持自少凡有過眼經耳一未有遺忘人皆以聰慧出常艶稱之然此特知公之著於外者耳白軒李景奭相國眞贊曰天開 聖作手扶日轂經濟治平道尊德宿詩禮學業厥亦有源柳巷之庭牧隱之門措諸事爲仁洽義敦陽村權近先生信齋記曰今公以是額齋而自勉可謂知所本矣宜其處事精詳動作合義以見是於國人獲知於君上也若夫稽諸往古之施諸事功之懿者今雖在千半年之後如得謁卓然風儀於斯矣公平居重而威若不可犯及待人油油然度量無涯際篤於孝每侍疾中夜服勤不寐夫人常悶而止之公亦素患風疾及罹艱公年六十一哀毁甚執古禮不懈由是病益篤 上軫念遣代言命啖肉使內醫治療問賜不絶至是卒于 世宗五年癸卯三月七日訃聞 上震悼卽遣中使弔慰輟朝三日官葬事且命致賻依完山府院君李天佑例賜米豆共七十石紙一百五十卷贈諡文簡勤學好問曰文一德不懈曰簡公就仕潔自持久長銓選所擧惟公居家克儉衣服飮食取潔而己事親定省晨昏親臨甘旨雖官高衰老未廢焉常居以信齋顔楣而勉乎仁義禮智信五德之實遭喪旣襄事語人曰吾有疾久矣惟恐先亡以傷老親之心今人子지事畢矣死且無憾焉 世宗遣禮官賜祭于公其文曰開國之勳古今莫重人主報功之典存沒何殊惟卿性行端方識慮精建儒雅推其世濟淸勤服其家傳體備四時稟陰陽中正之氣心潛萬理察否泰往來之機念前祖叔季之時寔 聖祖經綸之際衆皆推戴而戮力卿亦協贊而與謀奉厥璽符獻于第邸及應圖籙俾代咽喉遭逢 列聖之奬知踐華聯於中外監司四道黜陟幽明師長諸曹功施乃懋宜其振肅拍府之風紀調劑殷鼎之和羹等帶勵之山河而垂功名於竹帛也嗟予不弔罔知攸爲庶憑元老之詢諮無替厥子之構獲惟卿以四朝之龜鑑享暮境之桑楡萱室母夫人之喪咸稱孝親之道及鯉庭左納言之過足爲有子之榮何七旬之未盈致寡人之興悼慨英靈之己逝宜恤典之斯頒肆酬旣往之勞丕視惟新之渥於戱雲臺圖像忠賢每恨於凋零周禮司勳喪制益勤於終始云嗚呼斯可以驗公之爲國名相不亦哉墓在楊州郡榛接面金掘里南向原配馬韓國大夫人海州吳氏版圖判書俊良女與公上下兆生一男一女
공은 太宗18年戊戌(1418)6월에 관직에서 퇴임하시고 글 읽는 일을 생활화 하여 남의 시비를 입에 담지 않고 항상 조심성으로 선훈을 지키셨다. 어릴 때부터 눈에 지나고, 귀에 스치는 것을 하나도 잊어 본 적이 없어 사람들이 총혜함이 뛰어 나다고 칭찬하였다. 백헌 이경석相國이 진심으로 칭송하기를 하늘이 聖作을 열고 손으로 日穀을 붙들었도다.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하는데 편안히 다스리고 도가 높고 덕이 깃들어 있다. 시례학업에 또한 그 근원이 있으니 류항의 아들이요 목은의 제자이다 모든 일을 처리함에 어짐이 흡족하고 의로움이 두텁다고 하였고, 양촌 권근선생의 신재기에서는 공이 스스로 힘써 그 근본을 아는 바이다. 처사정상과 동작합의에 마땅히 하여 이를 나라 사람들에게 보이고 君上에게까지 알리었도다. 무릇 모든 일은 옛 일을 상고하여 일과 공을 베푸는데 남 다른 것은 이제 비록 천만년 후에도 탁연한 풍의를 여기서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공은 평거에서도 위엄이 가히 범할 수 없으나 사람을 대하는데는 유연하셔서 그 도량을 측량할 수 없었고 효도 또한 지극하셨다. 매양 탕약을 올리심에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리셔서 부인이 민망하게 여겨 그치게 하셨다. 공이 원래 풍질을 앓으시던 중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매 공의 나이 61세(1420)이셨으나 슬픔이 깊어도 옛 예법을 고집하셔서 모든 법도에 해이함이 없어 병이 더욱 위중하게 되니 임금이 걱정하셔 대언을 보내 음식을 권하고 내의원를 보내 치료케 하고 문사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5년계묘(1423) 3월 7일에 돌아 가시니 임금이 들으시고 震悼(진도)하여 中使를 보내 조위하고 3일간 정사를 폐하고 관에서 장사를 치루도록 명하고 부의는 완산부원군 이천우의 예에 의해 米豆를 각각 70석과 종이 150권을 내리고 시를 문간이라 증하니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는 뜻으로 文이요, 한결 같이 덕을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簡이라 하였다. 공은 벼슬에 나가 청렴하고 전선을 오래 맏아 오로지 공적이고 사사로움이 없었다. 집에서는 검소하여 음식이 깨끗한 것이면 족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조석으로 살펴 드리고 음식 드리는 것도 손수 맛을 보신 후에 올렸으며 벼슬이 높아지고 나이가 드셔도 한 번도 부모님 공양을 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신재라 하시고 항상 거처하는 방에 信齋(신재)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仁義禮智信의 덕목을 쌓기에 힘 쓰셨다. 어머님의 장사를 치른 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랜 병이 있어 먼저 죽어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걱정하였는데 이제 자식의 도리를 다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세종대왕께서 예관을 보내 공에게 제사문을 내리고 그 글에 쓰기를, 개국의 공은 고금을 막론하고 막중하거늘 임금으로써 그 공을 보답하는데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가 무엇이 다르리요 경은 성행이 端方하고 생각이 깨끗하고 통달하여 유아함은 세상의 제도함을 알았고 청렴하고 근면함은 가통을 전함에 충분하였다 몸으로는 사철의 한서를 갖추어 음양중정의 기운을 받고 마음으론 만리를 알아서 否泰往來의 기틀 살피고 먼저 시대의 성쇠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聖祖(이태조)가 건국할 때 여러사람이 추대하는데 경이 협찬하여 옥새를 사저에 바치고 도록에 응하고 인후와 열서의 권장함으로 中外의 華職을 거쳐 4도감사로 명암을 분명히하고 諸曹의 책임을 맡아 공을 세우는데 힘쓰고 柏府의 風紀를 엄숙하게 떨치고 殷鼎의 和羹을 고르게 맛을 내고 帶勵의 산하와 같이 공명이 竹帛에 드리웠다. 슬프다 내가 弔喪을 못하여 어찌할까 오직 경은 4조의 귀감으로 모경의 상유를 누리게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여는 세인이 효자라 칭찬하였고 鯉庭左納言之過를 일컬음은 족히 아들을 둔 영화가 되려니와 어찌하여 칠순도 채우지 못하고 과인에게 슬픔을 주는가 영령이 이미 떠남을 슬퍼하여 휼전의 사반으로 지나간 수고를 보답하여 새로운 우악함을 보겠노라. 아름답다, 운대의 도상이여, 충현이 매양 조령됨이 한이로다. 주례의 사훈으로 상제를 시종하여 끝까지 보살피겠노라 하셨다. 아! 여기서 가히 공이 나라를 위한 명재상임을 알 수 있도다. 묘는 양주군 진접면 금굴리에 남향으로 있고 부인 마한국대부인 해주오씨는 판도판서 오준량의 딸로 공과 상하 분묘이고 슬하에 1남 1녀를 낳으셨다.

男曰惠甲午生員丁酉文科嘉義大夫咸吉道觀察使淸山君辛亥三月三日卒 贈領議政西原府院君墓在金掘里寅坐操心賢善稟性寬緩事 太宗世宗兩朝歷按二道配 贈貞敬夫人星州李氏同知摠制穗女生一男二女墓積城失護今設壇于公墓側后配 贈貞敬夫人昌寧成氏判中樞諡襄惠達生女生四男一女女適全義李士寬長孫繼胤通訓大夫川寧縣監 贈嘉善大夫檢校判兼 經筵贊官司憲府掌令曾孫峻通訓大夫刑曹正郞通仕郞玄孫承乾禦侮將軍行忠佐衛大護軍承坤嘉善大夫行承文院校次孫繼美推忠佐翼精忠敵愾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輔國崇祿大夫西原府院君吏曹判書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文襄曾孫純誠佐理功臣資憲大夫西陽君諡恭悼通訓大夫司贍寺副正 贈資憲大夫吏曹判書通政大夫驪州牧使玄孫亨元通訓大夫宗廟署直長亨榮漢城判尹亨運處士亨允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亨俊保功將軍行忠佐衛副司果亨傑進士亨信朝奉大夫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
아들 혜는 갑오년(
太宗14年,1414)에 생원이 되고 정유년(太宗17年丁酉1417)에 문과에 올라 가의대부 함길도 관찰사로 청산군에 봉해지고 신해년(世宗13年辛亥1431) 3월 3일에 卒하다. 영의정 서원부원군에 증직되고 묘는 금굴리 寅坐에 있다. 성정이 곧고 착하고 어질며 성품은 너그러웠다. 태종과 세종 두 임금을 섬기고 전라 함길 양도 감사를 역임하였다. 부인 정경부인 성주이씨는 동지총제 수의 딸로 슬하에 1남 2녀를 낳으셨다. 묘는 積城에 있었는데 실호되어 지금은 공의 묘 옆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後配는 정경부인 창녕성씨인데 판중추 양혜공 달생의 딸로 슬하에 4남 1녀를 낳으셨다. 딸은 전의 이사관에게 출가하였다. 장손 계윤은 통훈대부 천녕현감으로 가선대부 검교참판겸 경영참찬관 사헌부장령에 증직되고 증손 준은 통훈대부 형조정랑이요, 우는 통사랑이며 현손 승건은 어모장군 행 충좌위 대호군이요, 승곤은 가선대부 행승문원 참교이다. 둘째 손자인 계미는 추충좌익정충적개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 서원부원군 이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내고 증 시호는 문양이요, 증손 의는 순성좌리공신 자헌대부 서양군이며 시호는 공도공이며 절은 통훈대부 사섬사 부정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였으며, 금은 통정대부 여주목사이고 현손 형원은 통훈대부 종묘서 직장이며 형영은 한성판윤, 형운은 처사, 형윤은 자헌대부 형조판서겸지 의금부사, 형준은 보공장군 행 충좌위 부사과이며 형걸은 진사, 형신은 조봉대부 예조정랑겸 춘추관 기주관이다.

三孫繼禧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左贊成西平君 贈領議政諡文靖曾孫斯文秉忠義決策翊運靖國功臣正憲大夫工曹判書兼咸鏡道觀察使兼咸興府尹西川君諡恭簡士武漢城判官贈左贊士信通訓大夫宣略司猛三登縣令 贈通禮院左通禮士介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海州廣州晋州牧使 贈嘉善大夫兵曹判玄孫胤源禦侮將軍忠義衛副司果胤根禦侮將軍忠佐衛副司直承元旌善郡守 贈左贊成承亨星州牧使承利忠佐衛副司直承貞大司諫承仁副護軍承義處士永通訓大夫沃川郡守 贈通禮院左通禮碩訓鍊院都正五衛都摠府副摠管常通禮院左通禮胤熙建功將軍胤昌禮曹判全羅忠淸監司胤興處士
셋째 손자 계희는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좌찬성 서평군으로 증영의정 시호는 문정이며 증손 사문은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 정헌대부 공조판서겸 함경도관찰사겸 함흥부윤을 지내고 서천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공간이다.  사무는 한성판관 증좌참찬이고 사신은 통훈대부 선략사맹 삼등현령을 지내고 통례원좌통례에 증직 되었으며 사개는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 해주,광주,진주목사를 역임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받았으며 현손 윤원은 어모장군 충의위 부사과, 윤근은 어모장군 충좌위 부사직, 승원은 정선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승형은 성주목사, 승리는 충좌위 부사직, 승정은 대사간, 승인은 부호군을 지냈으며 승의는 처사이다. 영은 통훈대부 옥천군수를 지내고 증통례원좌통례이며 석응 훈련원도정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상은 통례원좌통례, 윤희는 건공장군, 윤창은 예조참판 전라,충청감사를 역임하엿고 윤흥은 처사이다.

四孫繼善嘉善大夫戶曹判檢校曾孫珽通訓大夫燕岐縣監瑾通訓大夫司憲府監察松禾縣監通政大夫振威縣令琛通政大夫祥雲道察訪玄孫孝孫嘉善大夫戶曹判鐵仝折衝將軍全羅水軍節度使安國忠勳府都事安世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勇安弼忠義衛世應世憲通政大夫縣監淸白褒典安命主簿五孫繼純輸忠補社翼戴佐理功臣崇祿大夫吏曹判書淸平君諡襄平曾孫崑上護軍崗一作壽算玄孫種壽上護軍鍾俊副司直本外裔不盡祿而
넷째 손자 계선은 가선대부 호조참판 검교이고 증손 정은 통훈대부 연기현감, 근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송화현감을 지냈으며 개는 통정대부 진위현령이며 침은 통정대부 상운도 찰방이고 현손 효손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철동은 절충장군 전라수군절도사 안국은 충훈부도사, 안세는 어모장군 행 충좌위 부사용이고 안필은 충의위, 세응,세헌은 통정대부 현감 청백포전하였으며 안명은 주부이다. 다섯째 손자 계순은 수충보사익대좌리공신 숭록대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청평군에 봉해젔으며 시호는 양평공이며 증손 곤은 상호군, 강은 일명 수산이라하며 현손 종수는 상호군, 종준은 부사직이며 그외 후손은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하고 생략한다.

王妃 仁烈王后一人相臣孝純興一啓源三人湖堂智源浚謙二人學行百謙元震二人淸白吏亨允益相二人功臣繼美繼禧繼純斯文五人皆公之后也初葬于楊州富坪四十餘年之後以 世祖陵寢擇定移葬于金掘嗚呼今於五百年之後諸孫慨念公墓道闕刻徇謀京鄕諸孫醵出誠金遂成未遑之事玆乃不揆拙荒按其遺事書之庶可以不負幽明歟 銘曰
왕비에 인열왕후 1인이요 상신에 효순,홍일,계원 3인이요. 호당에 지원,준겸 2인이요. 학행에 백겸,원진 2인이요 청백리로는 형윤,익상 2인이요. 공신은 계미, 계희,계순 형제와 의 사문등 5인이 다 공의 자손이다. 처음의 묘소는 양주 광릉(부평)이었는데 40여년후에 세조의 능침으로 정하여저서 현재의 금굴리(금곡리)로 이장하였다 슬프다 이제 500여년 뒤 후손들이 공의 신도비를 세우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서 경향각처의 모든 자손들이 성금을 내어 드디어 종중의 숙원사업을 이루고 여기에 완벽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남기신 업적을 살펴서 세우니 살아 계실때의 일이나 돌아가신 후의 일들이 저버려 지지 않게 되었도다. 명하여 왈

文簡公 諱尙敬 묘소와 사우 문간공 상경

문간공 묘소: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에 위치하며 입구로부터 참판공묘를 지나서 위쪽이 부군의 묘소이고 아래가 배위 마한국대부인 해주오씨의 묘소이다.

문간공 묘역 전경:마을 뒤로보이는 산이 청주한씨 묘역으로 왼쪽 입구로 부터 참판공 문간공 양평공 청산군의 묘가 있고 마을 가운데 문간공 영정을 모신 사우와 문간공, 청산군, 검교참판공의 신도비가 있다. 검교참판공의 묘는 문간공묘 산 넘어 소재한다.

 

문간공 묘비:문간공묘역 봉분앞에 위치한 비석으로 조선초기 양식으로 오랜세월 풍화마모되어 자세히 보아야 판독할 수 있다.

문간공 신도비:위의비는 1984년 봄 문간공 사우 앞에 세운 신도비로서 금곡리 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부군의 묘소로부터 약300m의 거리이고 뒤 왼쪽은 검교 참판공의 신도비이고 오른쪽은 청산군의 신도비이다.

문간공 사우:문간공의 영정을 모신 집으로 금곡리 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앞 뜰에 신도비가 있다.

영정 안내문:문간공 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66호)에 대한 안내자료로 문간공사우 앞에 세워저 있다. 부군의 영정은 15세기 초기의작품을 17세기에 모사한 작품으로 원본에 충실하여 조선초기 공신의 초상화에 대한 중요한 사료이다.

13世 惠(혜) top

 청산군 유사

 정경부인 창령성씨 묘지명

 청산군 묘표

 청산군 연대표

 청산군 신도비문

 청산군 묘소 및 신도비

 청산군 행장

 

공은 조선조 태종, 세종 때의 문신으로 號는 松齋(송재)이다.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조선조 개국공신 상경의 아들이요. 고려 때 대제학을 지낸 류항 수의 손자이다. 1403년(태종3 癸未=明太宗永樂1)출생하여 1414년(태종14 甲午) 1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종부서령으로, 1417(태종17丁酉)에  15세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전사시 소윤 보문각지제교에 제수되고, 세종 2년(1420)에 사간 우부대언, 동 5년에 좌대언이 되었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한번도 외출한 적이 없었다. 병오(1426)에 병조참의, 무신(1428)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에 올라 청산군에 봉군되고 동년 10월에 좌군동지총제가 되어 명나라에 동지, 하절 사신으로 갈 때 세종대왕이 모관과 면의를 내려 잘 다녀 오라고 했으니 공이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1429년에 전라감사가 되고 1430년 12월에 함길도관찰출척사(咸吉道觀察黜陟使)겸 함흥부윤(咸興府尹)에 임명되었다. 공이 함길도민을 위해 선정을 베풀고 변방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고 있던중 1431년(세종13 辛亥=29세) 봄 아깝게도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니 세종대왕이 부음을 듣고 특사를 보내 부의를 전하고 조문하였으며 영의정 서원부원군에 증직(贈領議政西院府院君)되었다. 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곧았으며 심성은 어질고 남에게 편안하게 했으며 여유가 있었다(公稟性寬操心賢善綬事). 공의 묘소를 금곡리에 정하고 장례를 치를 때 함길도 백성들이 공의 선정을 감사하여 흙 한줌씩을 가져와 봉분을 쌓고 위령의 예를 다하였으며 현재의 지명은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문간공 묘역에 있고, 世一祭는 10월3일에 행한다.
배위는 초배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는 동지총제(同知摠制) 수(穗)의 딸이고 조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인민(仁敏), 외조부는 남양군(南陽君) 남양홍상재(南陽洪尙載)이며, 기일은 8월 27일이다. 묘소는 적성(積城)에 있었는데 1986년(丙寅) 春淸明節에 緬奉하여 부군과 合
窆하였다
후배 정경부인(貞敬夫仁) 창녕성씨(昌寧成氏)는 판중추(判中樞)양혜공(襄惠公)달생(達生)의 딸로 조부는 대제학大提學 문숙공文肅公 석용石瑢, 증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정공文靖公 여완汝完, 외조부는 부윤府尹 풍양豊襄 조운개趙云价이다. 1458년(세조
4 戊寅) 9월28일에 졸하였으며, 공의 묘와 상하조이다. 공의 묘비는 오랜 풍화로 심하게 마모되어 1996년 3월에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새로 세웠다.
공에게는 5남 3녀가 있는데, 장남은 원종공신 검교참판 繼胤(계윤)이고, 차남은 문양공 繼美(계미)이며, 3남은 문정공 繼禧(계희)요. 4남은 호조참판 繼善(계선)이며, 5남은 양평공 繼純(계순)이다. 차남 문양공이 받은 丹書 鐵卷敎旨(단서철권교지)에 의하면 문양공의 공으로 청산군에게는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서원부원군이 추증되었다고 되어 있다. 공의 신도비는 본래는 없었으나 1986년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문간공 사우 앞 뜰에 세웠다.

淸山君 諱:惠 遺事  청산군 혜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補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侍講院師西原府院君行嘉善大夫咸吉道都觀察黜陟使兼咸興府尹淸山君韓公遺事

金守溫撰韓繼美碑曰韓尙敬娶吳俊良女生嘉善大夫咸吉道都觀察黜陟使兼咸興府尹諱惠娶崇祿大夫判中樞院事成公諱達生諡襄惠公之女以永樂辛丑生公(乃繼美)公年十一府尹卒于官(乃宣德辛亥也)又曰丁亥李施愛叛公(乃繼美)領兵赴以角賊平策敵愾功臣拜右贊成 贈府尹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 世子侍講院師西原君
김수온이 지은 문양공 한계미 비에 이르기를 휘 상경이 오준량의 딸과 혼인하여 가선대부 함길도관찰출척사겸 함흥부윤 휘 혜를 낳고 부윤은 숭록대부 판중추원사 휘 성달생 시양혜공의 딸과 혼인하여 세종3년
辛丑(1421明太宗永樂19)에 공(계미)을 낳았고 공의 나이 11세에 부윤이 봉직중 별세했는데 이해가 세종13년 辛亥(1431明宣宗宣德6)이다. 또 이르기를  世祖13年丁亥(1467)에 이시애가 모반하였을 때 문양공 한계미가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평정된 뒤에 적개공신이 되어 우찬성에 오르고 그 공으로 부윤에게는 순충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예문춘추관 홍문관 관상감영사 세자시강원사 서원군을 증하였다.

徐巨正撰韓繼禧碑曰觀察使諱惠壽不滿種德遺後
서거정이 지은 문정공 한계희 비에는 관찰사 한혜는 천수를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덕을 후세에 길이 남겼다고 하였다.

蘇世讓撰 贈西原君韓亨元墓碣曰曾祖諱惠咸吉道都觀察使淸山君
소세양이 지은 서원군에 증직된 한형원의 묘비문에는 증조의 이름은 혜니 함길도도관찰사 청산군이라 썼다.

洪貴達撰鄭錫年妻韓氏墓碣曰 贈領議政西原府院君諱惠
홍귀달이 지은 정석년의 부인 한씨 묘비문에서는 증영의정서원부원군휘혜라고 썼다.

韓晄世系帖曰韓惠 贈純忠積德補祚功臣領議政墓在楊州豊壤夫人李氏墓在積城後夫人成氏墓在豊壤觀察使墓一處上下墳又曰李氏生一男二女
한황세의 계보첩에 기록하기를 한혜는 증순충적덕보조공신영의정으로 산소는 양주 풍양에 있고 부인이씨의 묘는 적성에 있으며 계배이신 성씨의 묘는 풍양의 관찰사묘와 한곳에 상하분묘로 되어 있으며 이씨는 일남이녀를 낳았다고 기록하였다.

登科錄曰永樂十五年丁酉四月八日 太宗大王御慶會樓試文武科韓惠以 宗廟署令居乙科第一人卽拜典祀少尹直寶文閣知製敎己亥司諫戊申禮曹判己酉全羅監司咸吉道都觀察使
등과록에 영락15년
丁酉(太宗17年1417) 4월 8일에 태종께서 경회루에 친히 임석하여 문무과 시험을 시행하였는데 종묘서령 한혜가 을과 제1인으로 뽑히니 그 자리에서 전사소윤 직보문각지제교로 삼고  기해년(1419)에 사간이 되고 무신년(1428)에 예조참판, 기유년(1429)에 전라감사, 함길도관찰사가 되었다.

承政院日記曰 世宗庚子十一月乙丑朔ㅇㅇ以韓惠爲同副代言癸卯正月癸未朔丁未韓惠爲左代言戊申十一月己卯朔乙未以韓惠左軍同知摠制庚戌三月全羅監使韓惠罷職十二月以韓惠爲咸興府尹辛亥正月丙寅朔丙戌 上曰咸吉道監司韓惠性本徐緩恐不及賑恤知申事皇甫仁曰惠操心善者也 上曰操心雖善治事恐有不周三月乙丑朔丁卯咸吉道都觀察使韓惠卒遣中官往弔
승정원일기에 세종경자년(1420) 11월에 한혜를 동부대언으로 하였고 계묘년(1423) 정월25일에 한혜를 좌대언으로 삼았다.무신년(1428) 11월17일에 한혜를 좌군동지총제에 임명하였고 경술년(1430) 3월에 전라감사 한혜를 파직하고  12월에 한혜를 함흥부윤으로 명하였으며  신해년(1431) 정월21일  왕이 말하기를 함길도감사 한혜는 본성이 급하지 않고 느긋하여 구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하니 지신사 황보인이 대답하되 혜는 심성은 대쪽같으나 착한 심성임을 아뢰니  왕이 이르되 성품은 착하나 다스림에는 능하지 못할 것 했다. 3월3일에 함길도 도관찰사 한혜가 세상을 떠나니 관원을 파견하여 조위를 했다.

許氏初譜曰觀察使韓惠忌三月三日前室李氏忌八月二十七日後室成氏忌九月二十八日
허씨의 처음 보첩에 관찰사 한혜의 기일은 3월3일이고 초취 부인 이씨의 기일은 8월27일이며 재취 부인 성씨의 기일은 9월28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韓繼禧碑曰貞敬夫人成氏昌寧著姓因公(謂繼禧也)貴封爵屢被內恩一族榮之
문정공 한계희의 비에 기록하였으니 모친 정경부인 성씨는 창령의 거족으로 문정공 계희로 인하여 귀한 봉작을 받았고  수차에 걸쳐 내은을 입었으니 일족의 영광이다.

韓繼美碑曰戊寅九月丁內艱(謂成氏卒也)丁亥  贈母成氏貞敬夫人 又曰公(謂繼美)事母承顔順色未有時物必求獻定省不廢
한계미 비문에
世祖4年(1458)戊寅 9월에 모친 성씨의 상을 당하였고 世祖13年(1467)丁亥年에  어머니 성씨에게 정경부인의 작위가 내렸다. 또한 문양공 한계미는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안색을 항상 밝고 부드럽게 하여 마음을 편안케 하여 드렸으며 귀한 것을 구하면 반듯이 어머니께 먼저 고하였고 아침 저녁 문안을 게을리 한적이 없다고 한다.

淸山君 諱:惠(청산군 혜) 墓表  청산군 혜

嘉善大夫咸吉道觀察使韓公之墓 貞夫人成氏之墓(面刻也)公諱惠領議政尙敬之子擢文科壯元以觀察使卒公先娶摠制李穗女生一男二女后娶判院事成達生女生四男一女男長檢參判繼胤次西原府院君繼美次西平君繼禧次檢參判繼善次淸平君繼純女長適僉知柳均次適中樞愼先庚次適正郞李永瑞

皇明正德十二年    五月 日 子孫等立石(陰刻也)

  가선대부함길도관찰사한공지묘 정부인성씨지묘. 공의 휘는 혜이고 영의정 상경의 아들이다. 문과 장원에 뽑혀 관찰사로 돌아 가셨다. 공의 처음 부인은 총제 이수의 딸로 1남 2녀를 낳으시고, 재취 부인은 판원사 성달생의 딸로 4남 1녀를 낳으시니 맏이는 검교참판 계윤이고, 다음은 서원부원군 계미이며 다음은 서평군 계희요, 다음은 검교참판 계선이고, 다음은 청평군 계순이다. 장녀는 첨지 류균에게, 다음은 중추 신선경에게, 다음은 정랑 이영서에게 출가 하였다.

중종12년(1517) 丁丑 5월 일 후손 세우다

淸山君 諱:惠 神道碑文   청산군 혜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侍講院師西原府院君行嘉義大夫咸吉道都觀察黜陟使兼咸興府尹淸山君韓公諱惠神道碑銘幷序
증순충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예문춘추관홍문관관상감영사세자시강원사서원부원군행가의대부함길도도관찰출척사겸함흥부윤청산군한공휘혜신도비명병서

朝鮮世祖朝贈領議政西原府院君韓公諱惠號松齋貫淸州其先箕聖至高麗初有諱蘭佐麗太祖統合三韓三重大匡門下太尉諡威襄是爲始祖居淸州故仍籍焉六傳諱康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封高陽侯寔生諱謝奇朝請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提鶴知制誥中書省行左右司員外郞贈翰林直學士亞中大夫輕車都尉追封高陽縣侯於公爲五代祖也高祖諱渥號誠齋宣力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封上黨府院君諡思肅曾祖諱公義號栢堂三重大匡補祚功臣戶部尙書追封淸城君諡平簡祖諱脩號柳巷輸忠贊化功臣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封淸城君贈領議政諡文敬文如班馬筆追鍾王有文集行于世士林俎豆之考諱尙敬號信齋朝鮮朝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西原府院君諡文簡特命不之典馬韓國大夫人海州吳氏其考版圖判書俊良
조선세조조에 영의정으로 증직된 韓公의 諱는 혜요 號는 송재이니 그 선계는 箕聖이며 高麗初에 이르러 諱蘭이 太祖를 도와 三韓을 통합하고 벼슬이 삼중대광문하태위에 올라 위양의 시호를 받았으니 곧 淸州韓氏의 시조이다. 그후 후손 諱康(1228~1303)은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하고 고양후에 추봉되었으며 그 아들 諱謝奇는 조정대부 첨의부좌사의대부 보문각제학지제고 중서성 좌우사원외랑을 역임하고 한림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에 고양현후로 증봉되니 公의 5대조이다. 고조의 諱는 악(
1274-1342)이요. 號는 성재요. 선력좌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판전리사사하고 封 상당부원군이요 시호는 사숙이다. 증조의 諱는 공의(1307~1365)요 號는 백당이니 삼중대광 보조공신 호부상서를 지냈고 청성군에 진봉된 諡평간이다. 조부의 諱는 수(1333.-1384)요 호는 유항이니 수충찬화공신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지내고  청성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공은 문필의 명성이 높았고 문집이 간행 되었으며 사림에서 향사를 드렸다. 아버지의 諱는 상경(1360 ~ 1423)이요 호는 신재이니 조선조에서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예문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서원부원군이며 시호는 문간이다. 어머니는 마한국대부인 해주오씨이니  판도판서를 지낸 오준량의 따님이다.

太宗三年癸未生公氣貌軒昻擧止凝重兼以才秀異見之者無不稱以遠到之期甲午生員丁酉四月八日太宗御慶會樓文武科覆試以宗廟署令居文科壯元及第卽拜典祀寺少尹直寶文閣知製敎己亥爲司諫世宗二年庚子十一月爲右副代言癸卯正月二十五日爲左代言同年三月七日丁外艱哀毁踰禮三年侍廬不出門外喪祭禮典必遵先賢之訓而少不違背丙午三月任兵曹議戊申九月除禮曹判封淸山君同年十月爲左軍同知摠制十一月奉冬至賀節使之命臨發上厚賜毛冠及綿衣木靴等物拜領携帶寒天雪路無事返己酉爲全羅監司庚戌三月解任同年十二月嘉善大夫咸吉道都觀察黜陟使兼咸興府尹嗚呼痛哉公世宗辛亥三月三日卒咸吉道任所訃聞上震悼中官往吊致賻次子文襄以貴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侍講院師西原府院君墓在楊州榛接面金谷里(豊壤金堀鐵馬山)寅坐原配貞敬夫人李氏星州望族父同知摠制穗祖門下評理仁敏夫人和順莊重仁厚婦德天壽微滿早世忌八月二十七日墓在積城而檀紀四三一九年丙寅春淸明節緬奉與公合生一男二女繼配貞敬夫人成氏昌寧華閥父判中樞襄惠公達生祖大提學文肅公石瑢生四男一女世祖四年戊寅九月二十八日卒于公之兆下
공이 태종3년계미(1403)에 탄생하니 기모가 헌앙하고 거지가 의중하며 재주가 특출하여 보는이마다 칭찬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갑오년(1414)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유년(1417)4월8일 태종이 경회루에 친림하여 문무과시를 보일 때 종묘서령으로 을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사소윤 직보문각지제교에 즉시 임명되고 기해년(1419)에 사간, 세종2년(1420)경자11월에 우부대언, 계묘년(1423)정월25일에 좌대언이 되었으며 동년3월7일 부친(문간공)상을 당하니 3년동안 초막에서 슬픈가운데 예를 다하여 상제법도를 준행하셨으며 병오년(1426) 3월에 병조참의, 무신년(1428) 9월에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청산군에 봉해졌으며 동년10월에 좌군동지총제, 11월에는 동지하절사로 명을 받고 출발에 임하여 왕이 친히 의복과 신발까지 하사하시어 한천설로에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였다. 기유년(1429)에 전라감사, 경술년(1430) 3월에는 그직에서 해임되었으나 동년12월에 가선대부 함길도도관찰출척사겸 함흥부윤을 배명하였다. 아! 슬프도다. 공이 함길도 임소에서 세종신해(1431) 3월3일 서거하시니 時年이 29세였다. 왕이 부음을 들으시고 매우 슬퍼하시어  관리를 보내 부의 조문하시었다.차자 문양공의 공로로 순충적덕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예문춘추관 홍문관 관상감영사 세자시강원사 서원부원군에 봉작되었으며 묘소는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풍양금굴철마산)인좌원이다. 배증정경부인 이씨는 동지총제 수의 여식이요 문하평리 인민의 손녀로서 성주의 망족으로 부인은 그성품이 화순장중인후부덕(和順莊重仁厚婦德)하였으나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니 기일은 8월27일이요, 산소는 적성에 있었으나 단기4319년(1986병인) 봄 청명절에 공의 묘소가 있는 진접읍 금곡리로 이장하여 합폄하였으며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계배이신 정경부인 성씨는 창령화벌로 아버지는 판중추 양혜공 달생이고 조부는 대제학 문숙공 석용이며 4남1녀를 낳았으며 세조4년(1458)무인9월28일 졸하시니 묘소는 공의 묘 아래에 있다.

長男繼胤嘉善大夫檢校判次繼美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西原府院君議政府左贊成兼吏曹判書諡文襄次繼禧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事西平君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諡文靖次繼善嘉善大夫檢校戶曹判次繼純崇政大夫行吏曹判書淸平君諡襄平女戶曹判書柳均中樞府事愼先庚正郞李永瑞其壻也檢繼胤子峻通訓大夫行刑曹正郞次通仕郞文襄繼美子資憲大夫行漢城左尹西陽君諡恭悼次贈資憲大夫吏曹判書次通政大夫驪州牧使文靖繼禧子斯文正憲大夫工曹判書西川君諡恭簡次士武漢城府判官贈資憲大夫議政府左贊次士信通訓大夫行三登縣令贈通禮院左通禮次士介通政大夫行永興都護府使贈兵曹判繼善子珽通訓大夫行燕岐縣監次瑾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次通政大夫行振威縣令琛通政大夫行祥雲道察訪襄平繼純子崑禦侮將軍上護軍次崗宣略將軍副護軍曾玄以下多不盡錄公德足以保世撫民仁足以綏福享壽如是重望求之今古絶無僅有賢而位天可信也仁而不壽天不可信也事業未半中途逝此時運之所關歟天道之有差歟人無不嗟惜焉若假之以天年則其所進就不可量也然而不有種德積善之功有孚有餘則後裔之興旺能如是哉公之沒距今五百五十餘矣然只有墓標而未竪神道碑其裔孫瑞愚與其諸宗議定竪石而來要余鐫文年代浸遠實有杞宋莫徵之歎然幸有撰與序及譜乘可據者按而之繼而銘曰
장남계윤은 가선대부 검교참판이요 다음의 계미는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서원부원군 의정부좌찬성겸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시호는 문양이다. 다음의 계희는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겸 지경연사 서평군에 봉작되고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시호는 문정이며 다음의 계선은 가선대부 검교호조참판이고 끝의 계순은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청평군에 봉작되고 시호는 양평이다. 딸은 호조판서 유균, 중추부사 신선경, 정랑 이영서에게 각 출가하였다. 검교참판 계윤의 장남 준은 통훈대부형조정랑이고  다음 우는 통사랑이다. 문양공 계미의 장남 의는 자헌대부 한성좌윤 서양군 시공도이고  다음 절은 증자헌대부 이조판서이며 다음 금은 통정대부여주목사이다. 문정공 계희의 장남 사문은 정헌대부 공조판서 서천군으로 시호는 공간이고  다음 사무는 한성부판관증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이며 다음 사신은 통훈대부삼등현령으로 증통례원좌통례이며 다음 사개는 통정대부로 영흥대도호부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계선의 자 정은 통훈대부로 연기현감을 지냈고 다음 근은 통훈대부로 사헌부감찰이며 다음 개는 통정대부행진위현령이며 침은 통정대부로 상운도찰방을 역임하였다. 양평공 계순의 자 곤은 어모장군 상호군이고 다음 강은 선략장군 부호군이며 증손 이하는 이를 모두 기록하지 못하노라. 공의 德은 족히 보세무민하고 仁은 족히 수복향수하므로 이와같은 중망은 고금에 드믈며 덕망이 높고 관작이 있음은 하늘이 내려 줌이로다. 국가를 위하여 정치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서거함은 시운의 소관인가 하늘의 무심함인가. 만백성은 안타까워 탄식을 금치 못하였도다. 만약에 공이 천수를 향유하셨다면 그 치적은 가히 막중하였으리라. 연이나 덕과 선을 쌓은 공이 없으면 후예가 지금과 같이 흥왕할 수 있으리오. 공이 서거한지 550여년이 되었으되 다만 묘표만 있을 뿐이요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였는지라 그 후손인 서우가 여러 종친과 더불어 의론하여 비를 세우기로 하고 나에게 비문을 청하매 연대가 너무나 오래된지라 막연한 감이 있도다. 그러나 다행히 선배와 찬문과 서서와 전해온 보첩이 있어 이를 근거로 하여 서술하노라. 명왈

偉哉淸山間世英傑                  위대하도다 청산군이시여 일세의 영걸이로다.
器局軒豁芳條高潔                  기국이 헌활하고 방조가 고결하도다.
妙年文科卽就斑列                  일찍이 문과장원하여 곧바로 반열에 오르도다.
出使施厚萬民愉悅                  벼슬에 나아가 선정을 베푸니 온 백성이 기뻐하도다.
國之樞機人之謨楷                  국가의 대들보 되고 백성의 귀감이 되었도다.
歷事兩朝續大功夥                  두왕을 모시고 이룬 업적이 크고 또 크도다.
翼戴藎忠國光添長                  충성을 다하여 공훈을 이루니 국정이 더욱 빛나도다.
天理己定報施有常                  하늘의 이치는 공의 공적을 보답하리라 믿었건만
壽不稱德中駕仙鄕                  명이 덕을 쫓지 못하여 신선이 되어 가셨도다.
人亡依璋國失蓍龜                  백성은 의장을 잃었고 국가는 동량을 잃었도다.
功垂竹帛蔭滋後時                  공과를 죽백에 새기고 음덕을 후세에 전하도다.
子姓蕃衍四域廣基                  자손이 번창하여 온누리에 거하도다.
撮其懿德書于勒碑                  아름다운 공덕을 비문에 새기도다.
表于羨門千載攸宜                  남이 부러워하는 문벌을 표시하나니 길이 길이 빛나리라.

淸山君 諱:惠 行狀  청산군 혜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侍講院師西原府院君行嘉義大夫咸吉道都觀察黜陟使兼咸興府尹淸山君韓公(諱:惠)號松齋行狀
증순충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예문춘추관홍문관관상감영사세자시강원사서원부원군행가의대부함길도도관찰출척사겸함흥부윤청산군한공혜행장

我東方淸州韓氏始自箕聖至高麗初有諱蘭佐麗太祖統合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門下太尉諡威烈改諡威襄是爲始祖而仍居淸州故爲貫籍焉屢傳諱康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封爲高陽侯寔生諱謝奇朝請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提鶴知制誥中書省行左右司員外郞贈翰林直學士亞中大夫輕車都尉追封高陽縣侯於公爲五代祖文科宣力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封上黨府院君諡思肅諱渥配享於忠惠王廟爲公高祖三重大匡補祚功臣戶部尙書封淸城君諡平簡諱公義號栢堂爲公曾祖輸忠贊化功臣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封淸城君贈領議政諡文敬諱脩號柳巷爲公王考是柳巷公文如班馬筆追鍾王與牧隱李穡鐵城李岡爲道義之交有遺稿行于世士林推仰享于長湍松京豊壤松山鳳山書院等俎豆之也考諱尙敬號信齋訖佐朝鮮王朝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封西原府院君諡文簡特命不之典馬韓國大夫人海州吳氏其考版圖判書俊良也公生於太宗三年癸未氣貌軒昻擧止凝重才秀異見之者莫不譽之太宗甲午年十二中生員試丁酉四月八日太宗御慶會樓覆試文武科以宗廟署令居文科壯元及第卽拜典祀寺少尹直寶文閣知製敎世宗二年庚子拜司諫庚子十月爲右副代言癸卯正月二十五日爲左代言同年三月初七日丁外艱哀毁踰禮三年居廬不出門外丙午三月拜兵曹議戊申九月除禮曹判封淸山君十月爲左軍同知摠制十一月奉冬至賀節使之命臨發上厚賜毛冠綿衣等物拜領而酷寒雪程無事返然則公之蒙寵之厚可知也己酉拜全羅監司庚戌三月不忍奸策解任同年十二月復拜嘉善大夫咸吉道都觀察黜陟使兼咸興府尹咸興以北邊要塞責任莫重若非智慧能熟則不敢當也故被擢焉嗚呼公世宗辛亥三月三日卒於咸吉道任所享年二十九訃音聞達上震悼遣中使致賻葬于豊壤金堀里咸吉道民以民草之誠各將墳土一握而來封墳積土奉慰靈之禮若非愛民善治則豈有如斯之盛儀乎以次子文襄公之貴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侍講院師西原府院君配貞敬夫人星州李氏同知摠制穗女婦德仁厚天壽未長八月二十七日早卒墓在積城光復後初丙寅春淸明節與公緬奉于楊州榛接面金谷里寅坐原合生一男二女繼配貞敬夫人昌寧成氏判中樞襄惠公達生女世祖戊寅九月二十八日卒墓公墓下兆生四男一女卽五昆季三姉妹也男長繼胤嘉善大夫檢校判次繼美崇祿大夫領中樞西原府院君左贊成兼吏曹判書諡文襄次繼禧崇祿大夫左贊成封西平君贈領議政諡文靖次繼善嘉善大夫檢校戶曹判次繼純崇政大夫吏曹判書封淸平君諡襄平女柳均戶曹判書愼先庚中樞府事李永瑞正郞也嗚呼公德足爲保世撫民事業未半中途仙化時之運歟天道之欠歟若假之以天年則其所就興應必不可量也然雖未半之年不有種德積善之功後昆豈能如是興旺哉公之沒距今五百餘裔孫瑞愚議合諸宗建立神道碑成了裡德不珉之業焉

 贈貞敬夫人昌寧成氏墓誌銘   청산군 혜

貞敬夫人 昌寧成氏는 判中樞府事 襄惠公 諱 達生의 女요. 大提學 文肅公 諱 石瑢의 孫이요. 政堂文學 文靖公 諱 汝完의 曾孫女다. 其는 豊壤趙氏 府尹公 云价의 女也라. 夫人이 入 淸州韓氏門하야 爲贈領議政 西原府院君 淸山君 諱 惠의 配가 되니 文簡公 諱 尙敬의 子婦요 柳巷 文敬公 諱 脩의 孫婦다. 夫人은 生長法家하야 習內則하고 染家學하야 範克備라 旣歸엔 事舅姑以孝하야 承順其志하고 奉君子以敬하야 無違禮義하고 御婢에 雖有不可 於意者라도 不加怒하고 諭之以義하야 使其自悔하고 舅姑或有 疾하면 未離側하고 親調烹하야 問其所欲而供之하야 雖斥賣粧奩而無也러라 自始至終하야 晨昏을 不廢하고 財藏을 不私하고 勤於女工하야 以備舅姑衣服을 無有不潔하고 或 出他타가 得異味하면 不先入口하고 舅姑沒에 以不盡其壽로 爲恨하고 業於紡績하야 致羨而遇賓客之供과 奉饋奠之需를 一無缺焉하니라. 人之慕富貴는 婦女가 尤甚커든 夫人은 不然而泊然 無爲意於此하니 特異志操를 六親이 咸稱하더라. 夫人은 素性이 溫柔仁慈하고 持心이 恭謙謹飭하야 府院君當時에 貴莫高矣요 祿莫重矣로되 依夫君貴而不驕易肆하고恃夫君祿而 不華靡奢侈하고 儉約節而 貯其所餘하야 以恤貧周急으로 爲一生事業하니 遠近鄕坊이 無不悅服而 稱頌焉하니라. 好事多魔하고 家運不幸하야 府院君이 未得天壽而 中途捐世하니 夫人이 任情哀毁하야 欲自裁下 從者數矣로되 惟有幼孤 四男一女하고 又有 前室李氏所生 一男二女하야 其長則雖如有知나 其餘는 蒙昧不省하니 如其然無知면 子子諸孤를 保育無人이라. 反心自責하고 戒諸子曰 汝之家世殊以文學으로 爲業하니 汝等은 勿以貧若難으로 廢學이라하고 益加勸奬하야 使之成就케하니 夫人之德은 不言可悉也라. 遂以 戊寅九月二十八日 沒하니 哭之者는 哀하고 思之者는 泣하고 見之者는 狀其事而傳之하다. 諸子가 從于 府院君墓하야 異穴하다.
정경부인 창령성씨는 판중추부사 양혜공 휘 달생의 따님이요. 대제학 문숙공 휘 석용의 손녀이며 정당문학 문정공 휘 여완의 증손녀다. 부인의 어머니는 풍양조씨 부윤공 운개의 따님이다. 부인이 한씨 가문에 들어와서 증영의정 서원부원군 휘 혜의 부인이 되니 문간공 휘 상경의 며느리가 되고 유항 문경공 휘 수의 손부가 된다. 부인은 엄격한 가문에서 성장하여 일찍이 내칙(조선시대에 여성의 행실에 대한 규범을 기록한 도서)을 익히고 엄격한 가풍을 익혀 여성으로서의 규범을 갖추었으며 혼인하여 시집에 와서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그 뜻을 순종하며 부군을 공경으로 받들어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노비를 거느림에 비록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을지라도 옳은 도리로 타일러 스스로 뉘우치게 하며, 시부모가 혹시 병환이 있으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친히 음식을 장만하여 그 기호를 여쭈어 올리고 비록 소지품을 팔아 없앨지라도 아까와 하지 않앗으며 시종 조석 문안과 보살핌을 폐하지 아니 하였다. 재물을 사사로이 간직하지 않았으며 시부모의 의복을 항상 정갈하게 준비하였으니 이는 가사에 게으르지 않음이었다. 혹 밖에나가 별다른 음식을 얻으면 시부모님께 먼저 드렸으며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그 수명이 다하지 못함을 한하였다. 손님을 접대함과 시부모의 빈소에 오리는 제물을 마련함에 길쌈을 하여 충당하였으나 빠뜨리거나 소홀함이 없었다. 부귀에 대한 욕망은 대개 여성이 더욱 심한편인데 부인은 그와 같지 않아 사치와 허영에 조금도 뜻이 없으니 주위의 모든 사람이 칭찬하였다. 부인의 성품은 온순하고 인자하여 마음을 가짐이 공손하고 겸손하엿으며 매사에 삼가고 신중하였으며 부군 생존시에 지위와 권세가 더없이 높고 귀하였으나 이에 의지하여 교만하거나 방자함이 없고 부군으ㅣ 록을 믿고 화려하거나 사치하지 않고 근검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주위의 급한일을 도움을 즐겁게 하여 원근 동리에서 감복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가운이 불행하여 부원군(청산군)이 중도에 돌아가시니 부인이 하늘이 무너지는듯 슬픔이 지극하여 부군을 따라가고픈 마음뿐이나 생각해보면 어린 자녀 5남매와 전실의 3남매가 있으니 아직 어려 세상일을 살필수 없으니 누가 이들을 보살피리요. 마음을 돌이켜 다스리고 자녀들을 모아 이르기를 이 가문이 대대로 우수한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으니 지금 비록 가난하고 어렵더라도 학업에 정진하라 하고 독려하여 모두 성취시켰으니 부인의 덕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가 있으리라. 1458년 9월28일에 부인께서 운명하시니 모두가 슬퍼하여 눈물을 흘렷으며 그사실을 전하였다. 자손들이 부원군의 묘 옆에 장사하였다.

有五男三女하니 男에 繼胤은 檢校判하고 其配는 慶州崔氏 大司憲 文孫의 女요. 繼美는 五衛都摠府都摠管하고 其配는 坡平尹氏 判中樞 貞靖公 의 女요. 繼禧는 議政府左贊成하고 其配는 咸陽呂氏 判 稽의 女요. 繼善은 檢校戶曹判하고 其配는 南平文氏 牧使 의 女요. 繼純은 吏曹判書하고 其配는 星州李氏 檢校議 啓基의 女요. 婿에 柳均은 晋州人인대 吏曹判書요 愼先庚은 居昌人인대 中樞府事하고 李永瑞는 平昌人인대 正郞이다. 繼胤은 有三男三女하니 男에 峻은 刑曹正郞이요 는 通仕郞이요 崙은 不仕하고 婿에 徐은 達城人 僉正이요 鄭錫年은 河東人이요 李壽孫은 全州人 東林令이다. 繼美는 有 三男三女하니 男에 는 西陽君이요 은 副正이요 은牧使요 婿에 安友參은 順興人 繕工監正이요 權彭은 安東人인대 安川君이고 辛順鼎은 寧越人인대 僉正이다. 繼禧는 有六男一女하니 男에 斯文은 都摠管하고 士武는 左贊하고 士信은 左通禮하고 士介는 兵曹判하고 士粹와 士俊은 不仕하고 婿 李永禧는 全義人인대 府使이다. 繼善은 有四男三女하니 男에 珽은 縣監이고 瑾은 監察이고 는 縣令이고 琛은 察訪이다. 婿에 南悌文은 宜寧人이요 鄭鐵壽는 草溪人이요 權偉는 安東人이다 繼純은 有二男四女하니 男에 崑은 上護軍하고 崗은 不仕하고 女에 盧聆은 豊川人인대 藝文館校理하고 柳仲孫은 晋州人이요 柳仁濠는 文化人인대 工曹議하고 呂希和는 咸陽人인대 不仕하다. 柳均의 子 柳仁濕은 宣傳官이요 柳義濕은 虞候요 愼先庚의 子 愼嗣源은 監察이요 愼純源은 府使요 李永瑞의 子 李季男은 吏曹判書요 李季同은 領中樞하다. 內外曾玄은 多不盡錄이라.
5남3녀가 있으니 장남 계윤은 검교참판하고 그 부인은 경주최씨로 대사헌 문손의 여식이요 둘째 계미는 5위도총부 도총관으로 부인은 파평윤씨 판중추 정정공 번의 여식이며 셋째 계희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부인은 함양여씨 참판 계의 여식이다.넷째 계선은 검교 호조참판이고 부인은 남평문씨 목사 서의 여식이며 끝의 계순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부인은 성주이씨 검교 참의 계의 여식이다. 사위로는 첮째 유균으로 진주인으로 이조판서를 지냈고 둘째 신선경은 거창인으로 중추부사이며 끝으로 이영서는 평창인으로 정랑을 지냈다.
계윤은 3남3녀가 있으니 男에 준은 형조정랑이요 우는 통사랑이요 륜은 벼슬하지 않았으며 사위에 서간은 달성인 첨정이요 정석년은 하동인이요 이수손은 전주인 동림령이다. 계미는 3남3녀가 있으니 男에 의는 서양군이요 절은 부정이요 금은 목사요 사위에 안우삼은 순흥인 선공감정이요 권팽은 안동인인대 안천군이고 신순정은 영월인인대 첨정이다. 계희는 6남1녀가 있으니 男에 사문은 도총관하고 사무는 좌참찬하고 사신은 좌통례하고 사개는 병조참판하고 사수와 사준은 不仕하고 사위 이영희는 전의인인대 부사이다. 계선은 4남3녀가 있으니 男에 정은 현감이고 근은 감찰이고 개는 현령이고 침은 찰방이다. 사위에 남제문은 의령인이요 정철수는 초계인이요 권위는 안동인이다 계순은 2남4녀가 있으니 男에 곤은 상호군하고 강은 不仕하고 女에 노영은 풍천인인대 예문관교리하고 유중손은 진주인이요 유인호는 문화인인대 공조참의하고 여희화는 함양인인대 不仕하다. 유균의 子 유인습은 선전관이요 유의습은 우후요 신선경의 子 신사원은 감찰이요 신순원은 부사요 이영서의 子 이계남은 이조판서요 이계동은 영중추하다. 內外曾玄은 이를 모두 기록하지 못하노라.

夫人은 天稟이 賢淑하고 持行端正하야 奉舅姑孝敬하고 敎諸子義方하야 五常이 俱陞達官하야 昌大門閭하고 子姓이 繁榮하니 天必以是 報夫人之 仁厚也로다. 今其十九代孫容鉉이 齎狀而來하야 示之而語曰 吾十九代祖 昌寧成氏는 行義가 可書者多而尙闕하여 未免不仁 不明之過라하고 請銘至懇하니 辭不獲而 敍之라 然이나 恐傷夫人之 實德也라 銘曰
부인은 천품이 현숙하고 행실이 단정하여 시부모를 효성과 공경으로모시고 여러 자손들을 옳은 방법으로 가르쳐 5형제가 모두 훌륭하게 자라 국가의 동량이 되었으며 가문이 창대하고 자손이 번성하니 이는 하늘이 부인의 인자하고 후한 덕에 보답한 것이리라. 이제 부인의 19대손인 용현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19대조비 창령성씨께서는 그 행하신 업적이 기록할 만한 것이 많으나 지금까지 하지 못하였으니 후손들의 큰 허물이라 "하고 銘을 지어 주기를 간절히 청하니 감히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서술하였으나 부인의 훌륭한 업적과 덕을 손상시킬까 염려되고 두렵도다. 銘하여 曰

  開城(개성)  高成勳(고성훈)  謹撰(삼가 지음)

 청산군 연대표   청산군 혜

단기

서기

조선

간지

연령

경력사항

3736

1403

太宗3年

癸未

太宗永樂1年

1

출생

3747

1414

太宗14年

甲午

永樂12年

12

생원

3750

1417

太宗17年

丁酉

永樂15年

15

문과장원   전사소윤직보문각지제교

3752

1419

世宗1年

己亥

永樂17年

17

사간

3753

1420

世宗2年

庚子

永樂18年

18

우부대언,  조모 정령택주권씨 졸

3754

1421

世宗3年

辛丑

永樂19年

19

2남 계미출생

3756

1423

世宗5年

癸卯

永樂21年

21

좌대언  3.7부친 문간공 졸  9.4 3남 계희 출생 3년간 복상

3759

1426

世宗8年

丙午

宣宗宣德1年

24

병조참의

3761

1428

世宗10年

戊申

宣德3年

26

예조참판 청산군  10월 좌군동지총제, 명에 사신으로 감

3762

1429

世宗11年

己酉

宣德4年

27

전라감사

3763

1430

世宗12年

庚戌

宣德5年

28

3월 전라감사직을 파하고  12월 함길도도관찰사,함흥부윤

3764

1431

世宗13年

辛亥

宣德6年

29

함흥부중에서 봉직중 돌아가심3.3

 

 

 

 

 

 

 

3791

1458

世祖4年

戊寅

英宗天順2年

 

배위 정경부인 창령성씨 졸9.28

3800

1467

世祖13年

丁亥

憲宗成化3年

 

순충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예문춘추관홍문관관상감영사세자시강원사서원부원군에 증직됨

4319

1986

大韓民國

丙寅

 

 

신도비 건립

청산군 묘소와 신도비    청산군 혜

청산군 묘소 전경:공의  묘소는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125번지 문간공묘역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위쪽이 부군과 정경부인 성주이씨의 합조이고 아래에는 정경부인 창령성씨의 묘소이다. 묘소아래 입구에는 묘비와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1986년 세운 부군의 신도비로서 금곡리 마을안 문간공 사우앞에 문간공 신도비, 검교참판공 신도비와 함께 있고 부군묘소와는 약 1Km거리에 있다.

좌측의 묘비는 부군묘 앞에 세워진 묘표로 세월이 오래되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려워, 1996년 묘비(우측)를 새로 묘소 입구에 세웠다.

14世 繼禧(계희) top

문정공 유사1

문정공 신도비문

문정공 유사2

문정공 부조묘 상량문

양양 낙산사

영모재 상량문

흥인문 및 천흥사 대종명

문정공 연대표 

박기재 동량잡기

문정공 묘소와 신도비

문정공 후손 분계도

 

字는 자순(子順 ), 1423년(세종5 癸卯) 9월4일 출생. 1441년(세종23 辛酉) 진사(進士)가 되고, 1447년(세종29 丁卯) 증광문과급제(增廣文科選)하여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등을 역임하고,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錄大夫) 의정부우찬성겸지경연사(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 서평군(封西平君)에 봉군되었다. 1482년(성종13 壬寅)閏8월 19일 享年60세로 卒하였다.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錄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정(諡文靖)이다. 학문이 정갈하고 박식 고매하여 명나라의 역학을 번역하고 보충하여 많은 백성을 계도(學文精博識見高邁心性理道德日就明於易學補解啓蒙)하였으며 도덕문장이 관면일세(道德文章冠冕一世)라 세 왕을 모시고 제우소융재책훈명루장전형사업륭혁(歷事三朝際遇昭融再策勳名累掌詮衡事業隆赫), 몽부조지전(不祧之典)의 은혜를 입었다. 여지승람에 공우청주인물(與地勝覽錄公于淸州人物)로 기록되었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양여씨(咸陽呂氏)로 부는 좌랑 증(贈)참판 계(稽)이고 외조는 청송(靑松)심의구(沈義龜)이며, 1455년(乙亥) 5월 15일 卒하였다. 墓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 申坐에 공묘와 상하조(輿公墓上下兆)이고 세향일은 10월 5일 봉행한다. 신도비명은 사가서거정선생이 지은 것이다(四佳徐居正撰神道碑銘). 재실명은 영모재(永慕齎)이다. 공의 사당은 적장손이 거주하는 화성시 우정면 운평리에 모셨으나 1872년(고종 壬申)에 차손인 士武 14세손인 敬源으로 바꾸어 받들어 왔다. 공의 묘앞에 세운 신도비가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어 인식하기 어려운고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1975년(乙卯) 10월 구비의 비문을 다시 새겨 공의 묘로부터 1리 거리에 저수지 건너 대로변에 다시 세웠다. 구 재실이 소실되어 최근 공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공의 묘 앞에 중건공사가 진행 중이다.

文靖公 諱繼禧(문정공:계희) 遺事 1    문정공계희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숭록대부의정부우찬성겸지경연사서평군증시문정한공유사(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崇錄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西平君贈諡文靖韓公遺事)

1441년에 진사가 되고 학문에 힘써 침식을 잊었으며 1447년에 문과에 급제 집현전 정자(正字)에 뽑혀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였다. 임금이 서적에 유의하여 장서각을 짓고 각처의 서적을 구입하여 들보에까지 미치도록 책을 쌓았는데 公이 보지않은 책이없이 모두 보았으므로 사람들이 중국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과 같다고 칭양하였다. 1455년(세조원년) 세조는 잠저(潛邸)때부터 공의 학문과 인품을 인정해 오던차 즉위하자 특히 돌보아 주어서 보도교수(輔導敎授)겸 우문학이 되어 세자이던 덕종에게 경학을 가르쳤다. 1457년(세조3년)에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다시 내전에서 세자를 가르쳐 도움이 많았다. 1462년에 이조참판에 올라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이 되었다. 1465년 세조의 병이 위독하자 公을 입시하라 하여 나이 어린 예종의 뒷일을 일임하고 조친(朝親)과 근신(近臣)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며 이조판서에올라 자헌대부 다시 정헌대부가 되었다. 公이 추천한 인재는 다 한때의 명사였는데 朝官들이 자제를 위하여 관직을 요청하는 이가 있으면 그다지 거절하지 않고 "옛 말에도 조정밖의 추천은 원수를 버리지 아니하고 조정안의 추천은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자제가 賢良하다면 말하는 이도 잘못이 아니요 쓰는이도 제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지만 만일 귀한 집 자제라고 해서 조그마한 사심이라도 낀다면 이는 用人하는 도리를 모르는 것이다." 라고 하여 현명한 사람인가 아닌가에 따라 사람을 결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아량에 복종하였으나 친구의 자제라고 私恩을 베풀지 않았으므로 문 안이 쓸쓸하였다. 1468년 세조의 병이 위독하자 公을 입시하라 하여 세조 생존중 예종(睿宗)을 도와 왕위를 전하고 이튼날 승하(昇遐)하자 공이 모든 일을 적절히 처리하였다. 앞서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4도병마도총관이 되고 남이(南怡)가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이준은 종친으로서 금군(禁軍)을 맡길 수 없고 남이는 거칠고 사나와 병권을 줄 수 없다는 公의 밀계(密啓)를 왕이 받아들여 모두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그 뒤에 남이등은 모반죄로 죽고 이준도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탄핵으로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功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3등으로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지고 1469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예종의 상빈(上賓)이 되고 1471년(成宗2年) 좌리공신(佐理功臣)2등에 오르고 1479년 좌찬성에 올랐다. 가정생활이 儉約하며 자기의 몸을 너무도 아끼지 아니하여 귀에 즐거운 음악도 없고 눈에 아름답게 꾸민 여자도 없으며 집안에는 도서만이 가득하여 깨끗하였다.(人物考)  仲兄 서원부원군 계미와 재종형(再從兄) 상당부원군 명회는 다 혁혁하게 빛나는 부귀를 누리고 있는데 홀로 청빈한 생활을 지켜 가도(家道)가 차고 쓸쓸하여 조석으로 야채와 서속(조)으로 견디엇다. 서원군(계미)이 답답히 여겨 어려운 경우를 가끔 도와 주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루는 상당군(명회)집에서 문중 회의를 열었는데 일동이 모두 "서평(문정공)은 나이가 많아졌는데도 자기몸을 너무 아끼지 않아 그 의복과 음식을 소홀히 함은 보는이로서 민망하기 짝이 없으니 처리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자 上黨이"이는 나의 잘못이다."하고 아이를 불러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첫째 서평의 청백하고 간역(簡易)한 덕을 쓰고, 둘째 문중에서 관심을 소홀히 한 과오를 쓰고, 끝으로 마음에 들 만한 것은 못되는 자그마한 정성이라고 써서 흥인문 밖 돈암 아래에 있는 전답 열섬지기를 드렸는데 서평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상당이하 제종이 모두 받기를 간청하니 부득이 받았지만 환한 웃음가운데 한결같이 조심하여 불안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寄齋雜記) 공이 병에 걸려 여러 차례 위독하자 왕이 걱정하여 기도문(祈禱文)을 지어서 빌어 주고 병이 낳자 거실에 불러"경은 나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오. 나는 경의 얼굴울 불쌍히 여기오. 내가 병 들었을 때 경이 나를 도와 주었으므로 경이 병 들었을 때 나도 걱정이 되오. 경의 이름만 들어도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뜻밖에 경의 얼굴을 보게 되어 대단히 기쁘오." 라고 하였다. 공은 얼굴이 수척하여 가끔 휴가를 얻어 정신을 수양하고 벼슬에 뜻이 없는 듯 스스로 멀리 하였다. 1482년 7월에 병이 위독하여 閏8월 19일(乙酉)에 사망하였다. 태상사(太常寺)에서 문정(文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享年60세. 독신생활로서 자녀의 혼가(婚嫁)를 마련 못했는데 세조 승하때 정희왕후에게 혼례 의류를 주라고 부탁했다.(성종실록)

文靖公 諱 繼禧(문정공:계희) 遺事  2   문정공계희

공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諱는 계희이고 字는 字順(자순)이다. 함길도 관찰출척사를 지낸 청산군 혜의 셋째 아들이고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문간공 상경의 손자이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창녕 성씨는 양혜공 달생의 따님이시다. 공은 세종 5년(1423)에 태어나 세종 23년(1441)에 진사가 되고 세종 29(1447)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숭문원 정자에 보임 되었다가 집현전 정자에 뽑혀 경연관을 겸하였다. 세종이 장서각을 세우고 중국 등 사방 각처에서 양서를 수집하여 비치하니 공이 빠짐 없이 다 읽고 머리 속에 넣고 다녀 사람들이 탄복하여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과 같다 하여 세남비서라 칭하기도 하고 걸어 다니는 비서(秘書)라고도 했다. 성종실록에 세조가 문종께 말씀 드리기를 "계희가 경서에 밝고 처신을 잘하여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고 적고 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공의 학문과 인품을 인정해 보도교수 겸 우문학을 제수 하고 세자인 덕종에게 경학을 가르치게 했다. 이어 좌필선 사헌부 집의를 거쳐 세조 2년 정축에 예문관 직제학 겸 지제교와 세자우보덕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옮기고 예종이 세자로 책봉 되자 다시 내전에서 세자를 가르쳤다. 1458년 무인에 세자좌보덕 병조참의가 되었고 1460년에 우승지로 옮겼다가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중추원부사가 되고 1462년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세자우빈객이 되고 이 때 흥천사 신종명을 지었다. 1463년 인순부윤이 되고 1465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세자좌빈객에서 다시 정헌대부가 되었다. 1466년 選部(선부)를 관장하시며 숭정대부가 되고 1467년 지중추부사가 되셨다. 공은 임무를 수행할 때 공정무사하여 청백을 보전하고 늘 겸양하여 아무도 이의나 시비를 걸지 못했다. 성종실록에는 공에 대하여, 세조를 만나 은총이 극진하였으나 마음이 늘 유백하고 지위가 높되 의지를 더욱 낮추어 임금이 후대하고 위로함이 더하였으며 명예와 절조에 힘써 시종여일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젊어서 집현전에 있을 때 동료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인이라는 분을 우리가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한공 같은 이와 비슷하지 않겠느냐며 어려워하고 존경하였다 한다. 1468년 세조께서 병이 위독해지자 공을 급하게 내전으로 부르시어 독대한 자리에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한다 하여 공이 적극 만류하였으나 재차 명하여 대보(大寶)와 곤면(袞冕)을 세자에게 전수하는 일을 주관케 하였다.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 장군등의 모반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추충정난 익대공신에 책록되고 서평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숭록대부로 예종의 상빈이 되고 성종이 즉위하니 책훈되어 지경연사를 겸하고 영릉보호사찰로 신륵사를 중창하여 보은사로 개명하는데 도제조로 참여하고 경국대전을 찬술, 간행하는데 제조가 되었다. 1470년 낙산사기를 지었으며 1471년 성종 2년에 순성명량 경제좌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간경사업(刊經事業)의 중심이 되어능엄경(楞嚴經), 법화경육조해(法華經六祖解),금강경 삼가해(金剛經 三家解), 원각경(圓覺經) 심경(心經), 영가집(永家集)등의 경인(經印) 보급에 진력하셨다. 공의 가문은 조선 초기의 명문거족이지만 가문의 배경보다는 세종 때 집현전 장서각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박람강기(博覽講記)로 쌓은 학식이 큰 바탕이 되었다. 풍부한 학식과 단정한 성품은 주위로부터 추중을 받았으며 특히 서거정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종은 공의 청백리 지정을 권유하였으나 받지 않았으며, 흉년에 백성들은 한 끼도 못 먹는데 내 어찌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으리요 하고 조석 두 끼만 식사하는 것도 밥과 죽으로 연명하였다. 그리하여 대소일가가 모여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제안으로 문서를 작성하여 홍인문 밖 고암리의 논 10섬지기를 억지로 받게 하였는데 논은 받았는데 이 곳에서 나오는 소출은 집에 못들여 오게 하고 인근에 가장이 병든 집이나 가난한 선비, 고아, 과부 등 살림이 어려운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공의 뜻이 유업으로 가문에 계승되어 인근이 편안히 살게되어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이름을 편안할 안자로 바꾸어 지금도 안암동으로 부르고 있다. 공은 일품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궁색하기가 극에 달해 자녀의 혼수를 걱정하였으며, 집에는 언제나 책만 가득하였고 공의 책 읽는 소리만 들릴 뿐 항상 조용하였다 한다. 성종은 공에게 사패지(賜牌地)를 내리려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고 서평군의 봉작도 사양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성종의 끈질긴 사패지 하문으로 말년에서야 굳이 묻힐 자리를 주신다면 대왕의 태실 옆 한자리를 주심이 어떠냐고 말하니 성종은 쾌히 승낙하고 태실을 광주군 태전리로 옮기고 율리 일대(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율동)를 사패지로 내려 주어 현재의 능침 자리에 묻힐 수 있었다. 공은 자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나라에서 내리는 예장품은 일체 받지 말라고 유언하였으니 청백리의 표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성종 10년 의정부 좌찬성이 되어 성종이 선정치민하는데 정치의 중신이 되었다. 성종 13년(1482) 윤 8월 19일에 향년 60세로 졸하니 성종은 사흘간 조회를 폐하고 극진한 예우로 장사토록 하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의 시호를 내렸다

 江原襄陽洛山寺記(강원양양낙산사기)    문정공계희

夫我大士之行化也에或處懸崖萬丈하야以絶其蹤하고或住海岸千尋하야以臨其虛하니是蓋圓通無碍之隨處應現仰普門三昧不可思議者也라襄陽之東二十餘里에有山하니自大嶺으로東驚而止하야磅環拱하고峰巒聳秀하야勢若鳳舞라寺據其中峰者하니曰洛山이라觀音正趣二大士像焉하니端嚴妙麗天下無比라其靈跡奇應이現於傳記者比比而是我國四衆之遊金剛五臺者必之洛山而膽拜焉이라我 世祖大王之東巡也에與慈聖大王大妃殿下로率 王世子하고親禮大士하야獻香幣하니于時에異香馥郁이聞于數里라舍利分身이於大士에光明烱熀하니  世祖盛諸鉢盂하야 頌示於扈從하니 臣僚莫不歡喜라 頂戴大下濱海에 有石掘하니 州人이相傳호대大士湧出之處라하야늘 世子躬禮於石하야又得舍利하니  世祖益驚喜焉하고 乃命禪德學說하야重甁其寺而且建石塔하야以藏如意寶珠相傳하니東海龍王이獻于觀音者也라兩宮立願之意는欲以資  世子壽福之祐라而其營締之費를皆出內帑하고及刊經에都監을始於戊子春三月하야告訖 己丑夏四月하니及睿宗卽位에感 先王遺構之意하야申命有司하야無敢或怠니於是에殿堂寮舍曺廠廚庫를各奠其位하고金碧丹雘輝映山門이라法器什物을悉備悉膽하고以其年月日로設大會하야以落之하고睿宗이命臣繼禧하야奉香幣赴焉하고且  賜田畓하야藏獲以供香花하고爲常住之資하다江原一道는國家東極之地라其山谿之險과道里之阻는千乘萬騎無由一至而我  世祖大王이親御六飛하고登臨瀛海하야擧  玉跡禮金仙하고乃發宸哀하야命令重剏하고使寶陁洛伽之境으로煥然再新하야遂爲金剛五臺諸刹之最奇觀하니實此道此山千百年之幸也라抑大士潛孚密感感所應歟아不幸無祿하야  世祖睿宗이相繼賓天하니嗚呼痛哉라惟我 主上殿下灮承 祖業하야誕寶位하고聖德維新하야治化方洽이라 其使睿算無彊하고鴻圖永固하야宗枝茂而風兩時則하니惟我大士神功妙力之所發이其必有在者歟저成化六年六月日에推忠定難翊戴功臣崇祿大夫西平君兼  知經筵事臣韓繼禧奉  敎謹記라

                                               成宗1年庚寅(1470明憲宗成化6年)    지경연사를 겸함 낙산사기 찬술

흥인문내대종명과 천흥사대종명   문정공계희

興仁門內大鐘銘 흥인문내대종명(文獻備考:문헌비고)

世祖八年壬午에鑄大鐘하고命吏曹判韓繼禧하야撰銘하니今在興仁門內하다  英宗戊辰建閣하니라

天興寺大鐘銘 천흥사대종명

洪武丁丑에 太祖命葬 神德王后於貞陵하니在西部皇華坊이라建寺其東하니是爲禪宗이라權近이有記러니後에 陵移于他寺則仍舊焉이라 世祖七年에鑄大鐘以懸하니銘曰惟我聖神이夙受佛記하고手執金輸하야繼天出治하고嚴恭寅畏하야不遑暇寐하니神人協和하고靈騈至라仰惟大覺에廣攝緣類하고設利分身에現希有事라驚動耳目에光耀天地라靈瑞震動에曠劫罕比라天心悅豫에弘警發誠이라像設容에演了義經이라福我 烈祖하야廷及含靈이라 宗國永固에彌億萬齡이라惟佛道弘에普拔幽滯와惟 聖體佛에大悲廣濟라冶金鑄鐘에開覺一世라息若警昏에窮未來際라

輿地勝覽天興寺敍記

朴寄齋 東亮雜記(박기재 동량잡기)   문정공계희

記에曰左贊成西平君文靖公繼禧柳巷先生大提學文敬公脩之曾孫이요政丞文簡公尙敬之孫이요觀察使惠之子요西原府院君繼美之弟요吏判淸平君繼善(繼純의誤記繼善은判公)之兄이요上黨府院君明澮之再從弟也라累代勳德으로富貴爀然而公獨操自持하야俸祿所入을亦必散宗族之孤寡者하니以此로家道凉簿하야朝夕萊하야老而愈礪하니西原이悶之하야時時周急하되亦皆辭而不受러라一日에設門會於上黨第一座할새咸曰西平이年紀己高에自奉이猶儉하야服御之疎를視瞻에極未安이라思所以處之리오上黨曰此는吾之責也라하고遽呼兒하야取紙筆來하야成一券하야列書諸親在堂之名하고上敍公의淸簡之德하고高次述一門이不能奉承之失하고末言微物이不能稱情之意하고遂以興仁門外巖下稻田種十石者로獻之하니公이讓不受어늘上黨以下且起且拜하고齊辭共贊하니勢不中止라然後에始受之나然이나其蹜踖不安之色을可也러라老小咸起舞하고扶醉夜還하니可謂一門忠厚之盛矣로다先大夫外祖母는卽西平之孫이라吾宗家巖田이亦分於此云爾이라

朝野僉載云 世祖嘗志東方學者語音不正句讀不明雖有鄭夢周權近口誤訿謬尙多腐儒俗士傳誤承訛遂 命老士宿儒鄭麟趾申叔舟丘從直金禮蒙韓繼禧崔恒徐居正等分授四書五經考古證今定口訣 上親加 璿裁

東閣雜記云李施愛之亂流言韓明澮申叔舟盧思愼韓繼禧等爲內應 上命拘闕內麟趾堂其子壻囚禁府月餘審其誣釋之引見內殿下庭相迎 上深自悔責至於涕泣及擒施愛問其誣指何也答曰申韓輩在則吾事恐不成故也

文靖公 諱 繼禧(문정공:계희) 神道碑銘   문정공계희

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崇錄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西平君贈諡文靖韓公神道碑銘幷序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숭록대부의정부우찬성겸지경연사서평군증시문정한공신도비명병서

嗚呼라居正이尙忍銘公之碑乎아居正이年十五에遊學宮할새公이弟於我三歲라年十二에頭角이然호대讀書에通大義하야亦來赴學宮이라因與之托交하니童穉情親이非面也오心也라年雖長이나交道不衰하니라居正이僥倖先公登第하야選入集殿이러니越四年에公이擢第하야又黍僚友하야同居侍從하야出入聯者 十有餘年이라交誼益篤하야私竊謂生我者 親이요知我者公이라하더니公今己矣로다嗚呼痛哉라公之諸孤泣請居正曰知先君이莫如先生이라較德不朽를亦惟先生是望하나이다居正이泫然出涕하야可忍銘諸아謹按公의姓은韓이요諱는繼禧요字는子順이니韓은本西原大族姓이라遠祖의 諱蘭이니三韓功臣이요世濟其美하야有諱曰渥하니佐高麗忠肅王하야位宰하니諡思肅이요生淸城君諱公義하니諡平簡이요生三重大匡右文館大提學諱脩하니文章道德이師範一時라諡文敬이요生領議政諱尙敬하니諡文簡이요生咸吉道觀察使諱惠하니是公皇考라壽不滿德하고種德遺後하니라皇貞敬夫人成氏  亦昌寧著姓이니判中樞達生之女라. 以永樂癸卯九月乙巳에生公하니公이生而異하고性又端重하야不妄笑語하며動止從容中禮하야屹若成人이러니稍長에知讀書하야寢食忘疲하고學業日就하니라正統辛酉에中進士科하며入胄監하야以平日所得所疑者로質之於賢師友하야硏精覃思하여欲求底蘊하야不得不止하니由是로所見이益高하고所得이益精하야大爲輩所推하니라丁卯에擢第하야補承文院正字하고俄遷集賢殿正字하고轉至副修撰知製誥하고常兼經筵官하고再轉至副校理하니라時에 世宗이留意典籍하사建藏書閣하고購求中國四方諸書하야充溢棟宇하니公이居常披閱하야無書不讀하고博覽强記하야磊落載腹하니人或比之世南秘書하니라平時公暇에朋僚簪이高談異論하야英藻遞發호대公은獨端坐正色하고手執一卷하고目注心想하야不左右酬答하니一座嚴憚이러라中有所主면心不馳於外者能然乎저世祖在龍에見公하고深器重之러니乙亥에登寶位하야眷注殊異러라懷簡王이在東邸에上이命公輔導하야授世子右文學하고丙子夏에陞左弼善하야階中訓하고冬에拜司憲府執義하고丁丑春에遷藝文館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하고秋에移通訓 世子右輔德하니官職이如故하니라及 睿宗繼二極에上이又命公하야獨於內殿에侍讀하니裨補弘多러라戊寅正月에加通政左輔德하고二月에擢兵曹知事하고俄陞議하니라九月에丁內艱하니公이早失先君하시고事大夫人篤孝하며又能立揚하야以悅其心하며大夫人이因公貴封爵하고又屢被內恩하니一族이榮之러니及卒에哀毁盡禮하니라庚辰에起復하야爲承政院右承旨하니辭不獲이라辛巳春에轉左承旨하고秋에陞嘉善工曹判하고尋에移中樞副使하고壬午夏에轉吏曹判 世子右賓客하다. 一日에 上이違豫하사命公入侍할새 睿宗이年幼하야凡屬後事를一委於公하니雖宗戚近侍라도亦莫得聞이러라公이親調藥餌하야聖體平善하니寵眷이重하니라癸未에授仁順府尹하니 上이以公學問이精邃로謹勤奉公이라하야凡經籍典章을集纂述할새委任責成하니公이日愼이러니一日에中罹疾하야濱死者數라 上이甚軫慮하야手製祈文禱之러니病間에召見便殿하고謂公曰汝憐我心하니我憐汝色我嘗病에卿嘗救之하니卿今病에我亦憂之로다其憂之也深故로至不欲聞卿性名이러니不圖今日에得見卿面이라하고勞慰懇至하니其得聖眷이如此하더라. 乙酉에擢吏曹判書하고陞資憲하니公이啓曰以臣不才로待罪銓衡하야常開閤하고  廷訪士大夫하고品題人物에尙恐不能甄拔賢愚온今設循資之格하고嚴奔競之禁하실새是使聾고로辨聲色하니乞罷之하소서上이曰誠如卿言이나然이나王者立法하야垂憲萬世하노니使繼卿者로皆卿則可어니와非卿則不可라하고夏에加正憲하니公之在選部에注擬人物이一出至公하야黜奔競하고抑僥倖하야其所甄拔이皆一時名士러라. 朝臣이或有爲子弟求官者면公이不甚拒之曰古人이云內擧不廢親이라하니子弟라도尙賢則言지者非過요而用之者非私라苟以爲膏梁子弟로而稍存形跡이면非知用人之大體者也라하고於是隨其子弟之者賢否하야而用舍之하니人服其度量이나然이나不以私恩으로對親舊하니門庭이肅然하고關節이不到하니物論이多之라丙戌에加崇政하니라公이以銓胄는政柄所在니不宜久竊하야以招衆謗이라하야屢乞辭호대  上曰掌選은重任이라非卿이면不諧니其勿固辭하라하니라丁亥에移知中樞府事하다. 夏에逆臣李施愛煽亂東北하야殺節度使觀察使守令하고據吉州叛할새又欲謀害在廷大臣하야飛語上聞하니公名이亦在其中이라  上이召議群臣하야咨議處置할새被告諸相이皆就私室待罪호대公은獨不知하고隨倒而入할새中官이止之하니라公이逡巡不敢進하니 上이笑謂公曰卿來何後耶아 命與群臣同議케하고仍留禁中하야逾月遣還하니公之忠誠이明白素著故로雖危嫌之地나見信於上이如此러라自是로常居幄하야謀議贊襄하니卒之元惡이授首에一方이寧靖하니公之籌에與有多焉이러라. 戊子八月에上이違豫하야 召公入侍러니越數十日에 上疾이大漸이라世子侍側이러니  上謂世子曰平日欲作如祖訓條章者하야授汝러니 今旣不能이라略擧其하노니一曰敬天事神이요二曰奉先思孝三曰節用愛民이니汝其念하야母壤我寡命하라遂令公道揚末命于世子하니世子俯伏祗承하니라 上이又謂公曰知卿忠赤일새命卿輔幼子케하노니卿其勿忘幼子면幼子亦豈忘卿이리요庶其相濟하라 九月某甲에 上疾이彌留하사召公諭以內禪之意하니公이曰此는大事라 勿煩聖慮하시고以靜調攝하소서 上이聲者再라 命公하야取大寶冕하야授世子하니 世子拜受하야出御正門하야受百官賀하니라翌日에 上이昇遐하시다 自上違豫로至于內禪히事機倉皇이어늘公在宥密하야周旋左右하야咸中其宜하니非公篤之忠이면能然乎아一日에群臣이會議 大行廟號할새 睿宗이命公하야諭群臣曰 先王이功德隆高하야非一二字可旣라欲上七八字하노라兼判禮曹朴元亨이議加二字하니 上이怒曰誰主此議하야沮敗我意오群臣이莫敢出言이어늘公이曰臣이奉 旨不稱하야致有此議하니臣實有罪니이다 上이霽威하니公之謙恭自損이類如此러라. 先是에龜城君浚이爲都總管하고南怡爲兵曹判書하니公이密啓호대浚은宗室이니不宜典禁兵이요南怡는悍하니不可授兵柄이라한대 上이嘉納하사卽一皆罷하니라 睿宗이初卽位에怡等이果模不軌伏辜하고浚이亦廢하니라策勳하야 賜推忠定難翊戴功臣鐵券하고封西平君하고己丑春에加崇祿하니冬十一月에睿宗이上賓하고今 上이入繼大統하니有定策勳하고庚寅에兼知經筵事하고辛卯에 賜功臣號曰純誠明亮經濟佐理하고戊戌에拜議政府右贊成하니라. 公이中年以後로疾病이綿하고形容消瘦하야多時告謁하야怡養精神코자常自退하야若無意於名宦者하니其高風雅量을不可尙己러라壬寅七月에病劇하야累辭封西平君하니라閏八月乙酉에卒于正寢하니訃聞에 上이震悼하사撤朝市하고賻贈에有加하시고太常이易名文靖하니라. 公의資性이簡重하고操履端純하야平生에立志毅然하야以古人自期러라學問精詣하고識見이高邁하야出平辭氣하고發於議論者 明白正大하야無纖毫瑕累하며居官履一事에奉公守正하고淸白自持하야 與人語에 先者退讓하야未嘗表崖異호대及臨決大事하여는確不可犯하며居家儉約하야自奉卑簿하고 耳不聽絲竹하며目不視粉黛하야圖書一書室이淡如也러라知遇我 光陵하니千載奇逢이라寵極而心愈小하고位高而志愈卑하며例聖이相承하야眷遇之勒이有隆無替호대公이能砥礪名節하야保全終始하니嗚呼盛哉로다是年十月壬寅에于廣州南村靈長山東向之原하니與其配貞敬夫人呂氏로同原異塋이러라夫人이先公二十七年卒하니라夫人은贈戶曹判稽之女니라. 曰斯文은通訓江華府使요曰士武는通訓軍器主簿요曰士信은宣略司猛이요曰士介는朝奉尙衣院別坐요生一女하니適天安郡守李永禧요庶子二니曰士粹士俊이라江華는娶僉知金崇海之女하야生一女하니適迪順副尉元하고後娶贈茂松君佺之女하야生一女하니幼하고主簿는娶縣監邊保之女하야生三男一女하니男의長은曰承源이요次曰連源이요餘는皆幼하고司猛은娶直長李釘堅之女하야生三男하니皆幼하고別坐는娶僉知李有仁之女하야生二男하니皆幼하고天安은生三男하니曰昌仁이요曰昌義요曰昌禮요女三人이니一適幼學朴僖요一適奉事陳首允하고一適檢閱安塘하고元는生二女하니幼하고昌仁은娶副提學崔敬止之女하야生男女하니皆幼라嗚呼라西平이至於斯하니居正이尙忍銘諸아 銘曰
아! 거정이 차마 공의 碑銘을 쓸 줄이야. 내 나이 열다섯에 성균관에서 글을 배울 때 공이 세살 아래인12세에 뛰어난 두뇌로 글을 읽는데도 大義를 알고 있어 서로 사귐에 마음이 통하였고 나이가 들수록 道로서 사귐이 더욱 두터웠다. 거정이 요행으로 공보다 먼저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들어갔는데 4년뒤 공이 급제하여 다시 10여년을 동료로 지내니 그 사귐이 더욱 깊어져 나에게 말하기를 나를 낳은 분은 어버이시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공이라 하더니 공이 이제 가니 아! 슬프고 아프도다. 공의 여러 자제들이 울며 청하기를 선군을 아는데는 선생님만한 분이 없으니 선군의 생전의 덕을 후세에 전하기에는 선생이 가장 적절하다 하니 거정이 눈물을 머금고 비문을 쓰노라.공의 성은 한이요. 휘는 계희요. 자는 자순이니 한씨는 본래 청주의 거족으로 윗 조상의 휘 란은 삼한공신이요. 여러세대를 그 미덕을 이어 휘 악이 있으니 고려 충숙왕을 도와 정승에 이르고 시호는 사숙이요. 그 아들은 청성군 휘 공의요 시호는 평간이라. 청성군이 휘 수를 낳으니 삼중대광 우문관대제학이며 문장과 도덕이 일세에 사표가 되었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문경공이 휘 상경을 낳으니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간이며 그 아들이 휘 혜로 공의 아버님이 되시고 함길도 도관찰사를 역임중 수를 다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 가셨으나 덕을 남겨 후세에 끼친 바 많았다.어머님이신 정경부인 성씨 또한 창령의 명문으로 판중추부사 달생의 따님이시다. 세종5년癸卯(1423明太宗永樂21年)9월4일(乙巳)에 공이 탄생하니 어려서부터 범인과 달라 성품이 단정하고 헤푼 웃음과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 행동함이 어른과 같이 의젓하였다. 학업에 임하여 침식을 잊고 고달픔을 모를 만큼 정진하였다.  세종23년
辛酉(1441明英宗正統6年)에 진사과에 합격하여 주감(학교)에서 배울때 평일에 배운 것중 의심나는것등은 어진 스승이나 동료들을 찾아 물어 배우고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끝까지 알고야 마는 성격이니 소견이 더욱 높아가고 지식이 많아져 주위로부터 추앙을 받앗다. 세종29년丁卯(1447)에 과거에 뽑혀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곧 집현전정자로 옮겼으며 다시 부수찬지제고에 이르러 경연관을 겸하고 다시 부교리로 옮겼다. 그 무렵에 세종이 서적에 관심을 두어 장서각을 짖고 두루 서적을 사 모아 서고에 가득 쌓으니 공이 항상 열람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어 많은 것을 기억하니 사람들이 당나라 태종때의 우세남에 비유하여 세남비서라 하였다. 평소 한가할 때 친구들이 모여 고담준론이 오가도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책을 보고 생각하며 좌우와 이야기하지 않으니 주위가 항상 엄숙하였다. 사람들은 주관이 뚜렸하여 마음이 항상 제자리에 있으면 능히 그럴 수 있겠다고 말하였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 공을 보고 그의 사람됨이 신중함을 알고 重하게 여기더니 乙亥(1455)에 보위에 올라 특별히 대우하여 공에게 懷簡王(세자로 생각한다는 말)의 보도를 명하고 세자우문학을 제수하였다. 丙子(1456세조2년) 여름에 좌필선에 승진하여 중훈에 오르고 겨울에 사헌부집의가 되고 丁丑(1457세조3년) 봄에는 예문관직제학지제교겸 춘추관기주관으로 옮기고 가을에 통훈 세자우보덕으로 옮겼으나 관직은 전과 같았다. 에종이 세자를 이어 받음에 또 공에게 명하여 내전에 홀로 시독케하니 왕이 공을 생각함이 매우 크다. 戊寅(1458세조4년) 1월에 통정을 더하고 세자좌보덕이 되었으며 2월에 병조지사에 발탁되어 바로 참의로 승차하였다. 9월 28일 어머님의 상을 당하니 공이 선군을 일찍(9세) 여의고 대부인을 섬김에 효도를 극진히 하고 또 능히 家道를 다스려 그 마음을 기쁘게 하며 대부인은 공의 영달로 인하여 작위를 봉하고 또 여러번 내은을 입으니 일족이 영화를 누렸으며 이제 돌아가시니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중에 예를 다 하였다. 庚辰年(1460세조6년)에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우승지를 제수하니 사양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辛巳年(1461세조7년)봄에 좌승지로 옮겼으며 동년 가을에 가선대부에 승차하여 공조참판을 배하고 곧 중추원부사로 옮겼으며 다음해(壬午年:1462) 여름에 이조참판 세자우빈객으로 전임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병환으로 공을 들라 하여 세자(예종)가 너무 어려서 후사를 공에게 일임하니 비록 종친과 척족 근시라도 이 일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공이 몸소 藥과 음식을 드려서 성체가 좋아지니 왕이 공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두터워지다. 癸未(1463세조9년)에 인순부윤을 제수하니 이는 왕이 공의학문의 경지가 깊음을 인식하고 중용하는 것이라. 모든 경전과 법전등 서적을 모아 찬술하는 중요한 임무 일체를 공에게 위임하였다. 어느날 공이 질환으로 빈사하기를 수차하니 왕이 크게 염려하여 손수 기도문을 지어 기도하더니 조금 차도가 있자 편전으로 불러 보고 공에게 말하기를 경이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듯 나도 경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안타까이 여기노라 일찍이 내가 병들었을 때 경이 구완하였으니 나도 이제 경의 병이 걱정되도다. 병중의 소식을 듯지 못해 걱정이더니 오늘 생각지도 못한 경의 얼굴을 본다 하고 위로의 말이 간절하니 왕의 공에 대한 관심이 이와 같더라. 乙酉(1465세조11년)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자헌대부로 승차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렵고 사대부가 찾아와 인물을 품제함에 그 현명함과 어리석음를 가려내지 못할까 두렵고 하물며 지금 순자를 설치하여 분경을 엄히 금하시는 이때 귀먹어리와 장님과 같은 臣에게 옥석을 분별케 함이니 바라건대 물러나게 해 주시기를 비노라 하였다. 왕이 말하되 진실로 경의 말이 옳도다. 그러나 임금이란 자가 법을 세우면 오래도록 수호하고 지켜야 하는데 경의 후임자들이 모두 경과 같으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못하니 이 자리는 경이 아니면 수행할자가 없다 하고 여름에 정헌대부의 爵을 더하니 공이 吏曹(選部)에 있음에 관리를 선발할 때 분경을 물리치고 요행을 막아 공정하게 선발하니 그때 선발된 자들이 모두 당대의 명사더라. 조신이 자제의 관직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심히 거절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 어른의 말씀에 집안식솔의 천거함을 폐하지 않는다 하니 친 자제라도 어질고 현명하면 천거함이 오히려 허물될 것이 없고 쓰는 자도 사사로움이 아니로다. 구차하게 부모의 배경으로 겨우 벼슬이나 구하는 것이라면 인사(用人)의 원칙이 아니라 하고 그 사람됨을 인사의 원칙으로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그러나 사사로움으로 친구를 대하지 않고 원칙을 앞세우니 집의 문전에 부당한 청탁자의 발길이 없으니 집안이 조용하고 숙연하더라. 丙戌(1466세조12년)에 숭정대부를 봉작받았으나 공이 銓胄(이조판서)를 오래 수행하자면 많은 사람의 비방을 불러 오는 것이라 하여 여러번 사임을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인사를 맡는 일은 중책이라 경이 아니면 능히 할 사람이 없다 하고 사임을 받지 않았다. 丁亥(1467세조13년)에 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동년(1467)여름에 이시애가 동북지방(함길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관찰사등 지방 수령들을 살해하고 길주에 근거하여 모반할새 조정대신을 모해하고자 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려 왕이 듣게 하는데 공의 이름도 그 중에 들어 있었더니 왕이 대신들을 불러 이를 처리할 것을 의논할 때 이에 해당자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 대기하는데 공은 홀로 이를 알지 못하고 평시처럼 입궐하려하자 관리가 막으니 공이 들지 못하고 주춤거리니 왕이 웃고 말하기를 경이 어찌 오는 것이 늦었느냐 하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의논을 명하고 궐내에 머물어 달포후 집으로 돌아오니 공의 충성이 명백히 들어나니 비록 위험한 곳에서도 왕의 믿음이 이러하였다. 이로부터 숙식을 하며 변란에 대한 국사를 의논하더니 졸지에 수괴의 목이 베임으로  난이 평정되었다. 戊子(1468세조14년) 8월에 임금이 병환이 나셔서 공을 입시케 하더니 수십 일이 넘어서 임금의 병환이 점점 더하여 세자도 시측하더니 왕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평일에 선조의 가르침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너에게 주고자 하였더니 이제까지 하지 못한지라, 여기에서 개략을 거론하노니 첫째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잘 섬기고, 둘째 조상을 받들며 효를 생각하고, 셋째 검소하고 절도 있게 하여 백성을 사랑함이니 너는 깊이 생각하여 나의 명을 헛되이 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공으로 하여금 내 명을 세자에게 천양토록 하라 하니, 세자가 엎드려 삼가 승복하니라. 임금이 공에게 이르기를 경의 충성됨을 알고 있음에 공에게 어린 자식을 돕게 명하노니, 경이 어린 자식을 잊지 않으면 그 어린 자식도 또한 어찌 경을 잊으리오. 두사람이 서로 서로 도와가며 일하라 하였다. 동년(1468) 9월 어느날에 임금의 병환이 깊어 공을 불러 세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는 뜻을 말씀함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중요한 일이라 성려를 번거로이 마시고 편안히 조섭하소서 하니 왕이 큰소리로 공에게 다시 호령하여 옥새와 곤룡포를 갖고 오게 하여 세자에게 왕위를 전수하니 세자 업드려 절하고 받아 정문으로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으니라, 다음날 임금이 승하하시었다. 임금이 병환이 나심으로부터 양위에 이르기까지 업무가 어려웠으나 공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어 일을 집행하는데 모두 그 도리에 맞으니, 공의 남다른 충성심이 아니면 능히 그럴 수 있으랴. 하루는 조정대신이 모여 임금의 승하에 따라 선왕의 묘호를 의논할 때 신왕(예종)이 공에게 명하여 조정신료들에게 말하기를 선왕의 공덕이 높고 높아서 한두자로 이미 可하지 않음이라. 7~8자로 올리고자 하노라 예조판서 박원형이 2자만을 제의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 모의를 주도하여 내 뜻을 막는고 하니 대신들이 모두 감히 말을 하지 못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신이 성지를 받들어 행함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여 이런 의논이 있게 되니,신이 실로 죄가 있다고 하였다. 임금이 노여움을 거두니 공의 겸손하고 공손하여 스스로 책임을 짐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 앞서(세조재위시) 구성군 이준이 도총관이 되고 남이가 병조판서가 되니, 공이 가만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준은 종친이니, 금병(대궐의 호위군사)을 맡는 것은 부당하고 남이는 거칠고 난폭하여 병권을 줄 수 없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시고 즉시 파직하니라. 예종이 즉위함에 남이등이 과연 법을 지키지 않은 허물이 있어 폐하고 준도 또한 폐하니라. 공훈을 책하여 추충정난익대공신의 철권을 내리고, 서평군을 봉하고, 己丑(1469예종원년) 봄에 숭록대부를 더하고 동년 11월에 예종이 상빈으로 하였다. 예종이 승하하고 지금 임금(성종)이 대통을 이으니 庚寅(1470成宗1年)에 지경연사를 겸하고 辛卯(1471成宗2年)에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으로 책록되고, 戊戌(1478成宗9年)에 의정부우찬성을 제수받으니라. 이 중년이후로 질병을 오래도록 앓아 형용이 수척하여 여러차레 왕께 아뢰되, 평화롭게 정신을 수양하며 지내고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스로 물러가려 하니, 그의 풍모와 아량이 더할 나위 없었다. 壬寅(1482成宗13年) 7월에 병환이 중하여 여러번 서평군의 봉작도 사양하였다. 윤8월19일(乙酉)에 정침에서 돌아가니 임금이 들으시고 매우 슬퍼하사 조정은 휴무하고 시장도 철시케하고 부의를 후히 내리시고 태상에서는 문정이라 시호를 내렸다. 공의 자질과 성품이 간중하고 조행이 단정하고 순수하여 평생에 뜻을 세움에 굳세고 옛사람의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기약하더라. 학문이 깊고, 식견이 높으며 말솜씨가 뛰어나 의론을 펴는데 공명정대하여 털끝 만큼의 하자가 없으며 공무를 집행하는데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으며 청백을 보존하며 남과 말할 때는 겸손하고 사양하여 겉으로 모나지 않게 하되 큰 일을 처결할 때는 확실하게 하며, 집에서는 생활이 검약하며 자신을 위해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처신하고 귀로는 풍악을 듣지 않고, 눈으로는 단장한 여인을 보지 않으며 실내에는 책만 있어 깨끗하였다. 세조를 만난 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의 만남이라. 임금의 믿음이 깊을수록 마음은 적게 가지고 지위는 높을수록 뜻은 더욱 낮게 가지며 역대 임금이 서로 이어서 후대함이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져도, 공은 명예와 절개를 갈고 닦아서 시작과 끝을 보전하니, 아 훌륭하였도다. 이 해 10월 경인에 광주남촌영장산(현재:성남시 분당구 율동)동향지원에 안장하니,배위인 정경부인여씨는 동원이영이더라. 부인은 공보다 27년을 먼저 돌아가니라. 부인은 증호조참판계의 여식으로 4남1녀를 두었다. 장남 사문은 통훈대부 강화부사요 다음 사무는 통훈 군기감 주부요 사신은 선략사맹이요 사개는 조봉대부 상의원별좌이며 딸은 천안군수 이영희와 결혼하였다. 서자 형제가 있으니 사수와 사준이다. 사문은 첨지 김숭해의 딸과 혼인하여 딸을 낳으니 적순부위 원여에게 출가하고 증 무송군 이전의 딸과 재혼하여 딸을 낳으니 나이 어리며 사무는 현감 변보의 딸과 혼인하여 3남1녀를 낳으니 맏이는 승원이요 둘째는 연원(후에 개명하여 승형)이요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다음의 사신은 직장 이정견의 딸과 혼인하여 생3남하니 아직 모두 어리며 사개는 첨지 이유인의 딸과 혼인하여 생2남하니 모두 어리다. 사위 이영희는 3남3녀를 낳으니 아들로는 창인 창의 창례요 사위는 유학 박희와 봉사 진수윤 그리고 검열 안당이다. 사문의 사위 원여는 아직 어린 딸 둘이 있고 사위 이영희의 아들 창인은 부제학 최경지의 딸에게 장가들어 남매를 낳았으니 아직 어리다. 오호라 서평이 이같은 위치였으니 거정이 차마 銘할 수 있으리요. 銘하여 왈

                                  達城君(달성군)  四佳(사가)  徐居正(서거정)  撰(지음)

後識(후식)

舊碑之建이歲久剝落하야不可復識故로謹因其舊文하야而改刻貞珉하고且以舊在墓前하야難於廣示故로今再建于一里許相向地貯水池上大路邊   
옛 비가 세월이 오래되어 비문이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렵고 또 묘 바로 앞에 있어 여러 사람이 보기 어려워 옛 비문을 새로 새겨 마주보이는 저수지 건너 대로변에 새로운 신도비를 세우다.

주:    금마옥당---홍문관을 칭함   운대---공신의 초상을 두는곳    대려----황하의 대와 태산의 려(공신의 집은 영구함을 뜻함)

文靖公 不廟 上樑文(문정공 부조묘 상량문)  문정공계희

廟基重建에秩秩上下之旣平하고  祖宗是依에洋洋左右之如在라物有歸根之理하고世供明이란念昔 先公之純誠은克軫輔 國而專美하고肆今後裔之繼述은祗肯堂而匹休라翊師兩朝에異此風雲之眷注하고蒙萬古에卓彼星嶽之儲精이라坐平亂之籌에遭嫌仗義하고親調 進御之藥에處憂碣忠이라其孰與於當時며遂令美報於來許아宅址厚密에人皆事赴工하고結架宏深에役不費時違度라粲然棟宇之輪渙은山川增輝하고展也意匠之經營은草木生色이라池月虛照에杖之玄이未泯하고嶺雲이時停에姜墻之素懷 不盡이라取大壯待風雨하고試家人淨掃廛埃라 名祖遺勳이幾見滄桑之變이며令孫慕- 己訖土木之功이라喧萬口而共傳하여某乃積善於日이요準一面爲表하니孰不與榮於今朝아奧之等級은遂陳方位之第次하니不越華 巧하고屋漏之天光은爲章繡壁粧奇하니海隅之地靈이幷毓이라神保奚居奚處하고吉是蒸是嘗이라鄕人聳瞻하니依然竹苞之像이요違客歆賞하니溢乎栢悅之情이라燕賀盈階하고鰲載路聊勝善頌하야助擧脩梁이라
兒郞偉抛梁東하니撲地群山瑞靄紅이요雨順風調雙阜野라百年佳興萬人同이라
兒郞偉抛梁西하니海濱居勝碧山捿하고漁舟日落乘潮返하라烟火相連十里堤라
兒郞偉抛梁南하니天外歸鴻이或四三이요當世知名同氣客이라淸州故宅이每停
이라
兒郞偉抛梁北하니碧峀重回行不息이요人在其間仁且富라福星이來照太平域이라
兒郞偉抛梁上하니綠否靑松이日漸長하니佳氣
蒽蒽常在此라孫枝子葉이永無恙이라
兒郞偉抛梁下하니四時風物問于野하고朝耕暮讀今朝業이라驛路長看策寶馬라
伏願上梁之後에休滋一門에瑞膺百世라自我興也發也는永保西海之居하고
爾昌而熾而는丕擬南山之壽라龜疇의垂三日祀之訓은 靈位不遷하고鳳曆에占萬斯年之期는孝孫有慶이라奚但吉事之未艾아其永多福之無彊이라

歲在丁巳十月  日       謹稿

永慕齋 上樑文(영모재 상량문)  문정공계희

伏以惇宗禮秩祀元은自國家崇德報本之道요築墳菴永慕는卽子孫追遠報本之誠이라旅楹이有覺有閒이요升堂에如聞如見이라恭惟我先祖文靖公은西原望族이요東國忠賢이라舊德言足聽聞에煥乎黼黻之文勳忠之閥이요天資稟得英秀에鍾彼河嶽之靈奎璧之精이라在弱冠에博通六經百子하고早擢高第에遂登玉署金門이라王曾이豈志於節溫이며山甫--懈於夙夜라秉文衡侍經幄에甄拔이其明하고啓沃이其深이라施賊破怡兵에籌策이有紆하고謀議有密이라王庸嘉尙에封爵誓以錄券丹書하고民具仰瞻에聲價 高於連城白璧이라居寵極而思畏하고處位高而持謙이라君陳之政이克施由爾令德孝友하고公著之譽--終永以其行義文章이라太常氏易以大名에曰文曰靖이요達城君이銘于神道에有風有聲이라嗟烈祖申錫祜於無彊하고肆來裔寅念祀於永世라薦馨薦苾에典型이宛見於焄蒿하고履露履霜에春秋不堪其愴이라惟千億其麗가孰非祖先氣攸傳이며四百餘年尙無墓下齊宿之室이라於是에宗族이咸聚하야自今營作始謀하니瞻彼某水某丘에占取境界요詢于爾-爾筮에體無咎言이라工師-圖에其庭基楹이其冥其正하고役夫-功赴事에自西自東요自北自南이라靈區-闢以有時하고華棟이成於不日이라念皇祖之陟降이西東階하고啓後人之藏修 右書左史라王亭이揭以春雨諭苗本之相滋하고李庄이築於平戒花石之勿毁라載陳偉頌하고助擧脩樑이라抛樑東하니駒峀蒼蒼曉旭紅을烈祖丹心如彼日하니垂光千載汗靑中이라抛樑南하니雙峰秀色이與天參이라厥名兄弟豈無義아盖取薇歌殷二男을抛樑西하니日夜砯砰嗚碧溪라觀彼有源流不息하니遙遙馳入海門迷라抛樑北하니月峴에雲深夜無色으로安得長風吹破昏하야萬邦이皆作光明域고抛樑上하니上帝高居玉臺曠이라降哀于民民有彛하니親親之性自天을抛樑下하니黃熟千郊皆納稼라蒸祀家家醴酒香하니共歌周頌與幽雅라伏願上樑之後에棟宇靜恤하고人文이朗宣이라念爾祖忠孝勳烈과文章德義之弘을是講是習而厥武克繼하고惟每歲豆尊俎와蘋蘩薀藻之薦을必誠必虔而式禮莫愆이라

문정공 연대표   문정공계희

서기

조선

간지

문정공

중요 사항

1423 世宗5年 癸卯 太宗永樂21年

1

9.4 출생
1431 世宗13年 辛亥 宣宗宣德6年 9 3.3 부친 청산군 사망
1441 世宗23年 辛酉 英宗正統6年 19 진사
1447 世宗29年 丁卯 英宗正統12年 25 증광문과 급제 승문원정자 이후 집현전정자,부수찬겸경연관,부교리등 역임
1455 世祖1年 乙亥 景宗景泰6年 33 보도교수가 되어 세자우문학에 제수됨  5.15배위 증정경부인 함양여씨졸
1456 世祖2年 丙子 景宗景泰7年 34 좌필선중훈대부,사헌부집의
1457 世祖3年 丁丑 英宗天順1年 35 예문관직제학지제교겸춘추관기주관  세자(예종)우보덕
1458 世祖4年 戊寅 英宗天順2年 36 1월세자좌보덕 통정대부   2월병조참의   9.28모친 정경부인 창령성씨 졸
1460 世祖6年 庚辰 英宗天順4年 38 승정원우승지
1461 世祖7年 辛巳 英宗天順5年 39 봄,좌승지  가을 가선대부 공조참판, 중추부사
1462 世祖8年 壬午 英宗天順6年 40 여름 이조참판 겸 세자시강원세자우빈객   흥천사 신종명 찬
1463 世祖9年 癸未 英宗天順7年 41 인순부윤
1465 世祖11年 乙酉 憲宗成化1年 43 이조판서  자헌대부   정헌대부
1466 世祖12年 丙戌 憲宗成化2年 44 숭정대부
1467 世祖13年 丁亥 憲宗成化3年 45 지중추부사    이시애의 난
1468 世祖14年 戊子 憲宗成化4年 46 8월 공이 세조로부터 유조를 받음
1469 睿宗 己丑 憲宗成化5年 47 추충정난 익대공신 서평군 숭록대부  예종의 상빈이 됨

 

 

 

 

 

영릉보호사찰 신륵사 중창도제조 ,경국대전찬술 제조
1470 成宗1年 庚寅 憲宗成化6年 48 지경연사를 겸함 낙산사기 찬술
1471 成宗2年 辛卯 憲宗成化7年 49 순성명량 경제좌리공신에 책록
1472 成宗3年 壬辰 憲宗成化8年 50 이후 간경사업(刊經事業)의 중심이 되어능엄경(楞嚴經),법화경육조해(法華經六祖解),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원각경(圓覺經) 심경(心經),영가집(永家集)등의 경인(經印) 보급에 진력
 

 

 

 

 

1478 成宗9年 戊戌 憲宗成化14年 56 의정부우찬성
1482 成宗13年 壬寅 憲宗成化18年 60  윤8.19  졸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시호 문정

 

 

 

 

 

 10월광주영장산에 예장함

文靖公 諱繼禧 묘소와 신도비 문정공계희

문정공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 율동공원 서평릉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위쪽에는 부인이신 정경부인 함양여씨의 묘(위사진우측) 아래에 문정공묘소(위사진 좌측)가 위치한다. 주위에 장남 서천군, 3남 삼등공, 4남 영흥공의 묘가 있고, 묘소 아래에 문정공의 재실이 중건공사중에 있다.

문정공신도비.jpg

좌측의 비는 문정공의 신도비로서 문정공묘소 바로 앞에 세워저 있으며 건립연대는 1483년(성종14년)이며 비문은 서거정(1420 ~1488)이 짓고 안침이 전과 글씨를 썼다. 모양은 전형적인 조선초기양식으로 화관, 비신, 기대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화관과 비신이 하나의 화강 편마암으로 구성되었으며 화강암으로 만든 기대(받침돌)에 꽂아 세워져 있다. 크기는 맨 윗부분인 화관은 폭 72Cm 두께23Cm  높이 52Cm이고 비문을 기록한 비신은 폭 61 Cm 두께 18Cm 높이152Cm이며 비를 받치고 있는 기대는 전면이 115Cm 측면 59Cm 높이는 44Cm이며 총 높이는 248Cm이다.  이 신도비는 조선초기의 금석문의 양식을 간직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은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전서체를 제외하면 거의 알아보기가 어려워 새 비석에 비문을 옮겨 적어 저수지 건너 길가에 세웠다.

 15세 斯文(사문)  top

서천군 유사

서천군 신도비명

서천군부조묘중건기

서천군 연대표

서천군 유사 서천군사문

공(公)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자예(子藝)요, 휘(諱)는 사문(斯文)이고 초휘(初諱)는 사문(士文)이었다. 문장(文章)이 뛰어나 성종(成宗)이 진(奏)나라의 이사(李斯=진시황제 때의 정치인 문장가)와 같다 하여 사(士)자를 사(斯)로 바꾸라는 왕명(王命)에 따라 사문(斯文)으로 하였다.  1446년(世宗28丙寅) 4월 23일 출생하여 1462년(世祖8)에 음보(陰補)로, 문소전 직장(文昭殿 直長)에 임명된 뒤 세자익위 사세마 겸 선전관(世子翊衛 司洗馬 兼 宣傳官), 이조정랑, 1478년에 군기시 첨정, 부정(副正)을 거쳐 부평(富平), 철원(鐵原), 강화(江華)의 부사(府使)를 역임하니 선정(善政)으로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1478년(成宗9) 충훈부 경력(忠勳府 經歷)이 되고,집의(執義) 제용감 정(濟用藍 正), 통례원 좌우통례(通禮院 左右通禮)를 거쳐, 1492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우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495年(연산군1)에 전라도 관찰사가 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물려받아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에 이어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이 되고 1498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로서 천추사(千秋使 ;조선조 때 중국 황태자<皇太子>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신<使臣>)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0년(연산군 6)에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 해 다시 정조사(正朝使 ;조선조 때 명 또는 청나라로 정월 초하룻날에 새해를 축하하러 가던 使臣)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와 공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이어 공조판서(工暫判書)로서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이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함경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함흥 부윤(威鏡道 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威興 府尹)이 되었다. 이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병충분의 결책익운 정국공신(秉忠奮義 決策翊運 靖國功臣) 4등에 녹훈(錄勳)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어 함경도 관찰사 겸 함흥 부윤(威鏡道 觀察使 兼 威興 府尹)을 지냈다. 1507년(중종 2) 閏1월 21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62수였다. 諡號는 공간(恭簡)이고 부조지전(不之典)의 은혜를 입었다.  천성(天性)이 단엄(端嚴)하고, 관직(官職)에서는 근근(勤謹)하고 간밀(簡密)하였고 법도에 따라 행동하였다(動遵規度).
부인은 초배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청풍김씨(淸風金氏)인데 부사 숭해(崇海)의 딸로 기일(忌日)은 11월 7일이고, 후배는 정경부인(貞敬夫人)전주이씨(全州李氏)로 무송군(茂松君) 전(
)의 딸이고 조부는 의성군(誼城君) 천(泉), 증조는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이며 외조는 여흥(驪興) 민추(閔)이다. 忌日은 12월 3일이다.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 영장산에 문정공묘역 좌록지원자좌(先塋左麓之原子坐)에 계배 정경부인전주이씨(貞敬夫人全州李氏)와 합조이고, 초배 정경부인청풍김씨(貞敬夫人淸風金氏)는 공의 묘 위쪽 자좌(子坐)에 있다. 이락정(二樂亭)고령(高靈)신용개(申用漑)선생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상촌(象村) 평산(平山) 신흠(申欽)선생의 찬갈명(撰碣銘)이 公墓域내에 있으며 94, 4, 20에 경기도 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었다. 구비가 마멸되어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려워 1984년(甲子) 가을 새로운 신도비를 공묘에서 저수지 건너 로변에 문정공신도비와 함께 세웠다. 
사우는 적장손이 거주하는 수원쌍부지서평전동(水原雙阜之西坪田洞) 지금의 화성시 우정면 운평리에 있다.

西川君 諱斯文(서천군 사문)神道碑銘  서천군사문

奮義靖國功臣正憲大夫西川君諡恭簡韓公神道碑幷序(분의정국공신정헌대부서천군시공간한공신도비병서)

春秋館成均館事 左議政 申用漑 撰(춘추관성균관사 좌의정 신용개 찬)    

淸州에多巨族하니韓爲右姓이라自高麗로中贊諱康은八代而至公히代著勳閥하야爲世名家라國初에有諱尙敬者하야佐 太祖開國하고誓功山河하니官至議政府領議政西原府院君이요諡는文簡이니於公에爲曾祖라文簡之子諱惠는爲咸吉道觀察使로卒하니 贈議政府領議政西原府院君이요是生議政府左贊成諱繼禧하니策名翊戴佐理兩功臣하야封西平君하고諡는文靖이라娶贈戶曹參判呂稽之女하야以正統十一年丙寅에生公하니公의諱는曰斯文이요字는曰子藝니生而聰慧하야未弱冠에氣宇己老成하야恭謹寡言하며動遵規度하니識者知其爲遠大器러라年十七天順壬午에始筮仕하야爲 文昭殿直하고歷世子翊衛司洗馬兼 宣傳官戶曹正郞軍器寺僉正副正하고出爲富平鐵原江華三府使하야所至에事修政擧하니常有去後思러라成化十八年壬寅에丁內艱하고服에拜忠勳府經歷이러니轉陞司憲府執義濟用監正通禮院左右通禮하니라弘治五年에以賢勞로特加通政階하야授承政院右副承旨하고累轉爲左承旨하고典喉舌四年에出納詳允하야無有愆違하니特加嘉善階하니襲文靖하야封西川君이요九年丙辰에拜開城府留守하니開城은乃古都라民物蕃하고詞訟劇雜하며又多富商大賈하야有脂有膏하니非公淸有幹能者면副人望이어늘公이廉淨簡嚴하고務祛積弊하야用法平允하니闔一境이莫不服其淸而懷其惠라至今談公之美不離口라十年丁巳에特加嘉靖階하고任滿에遷拜漢城府左尹하고轉司憲府大司憲兵工兩曹參判이요十七年甲子에特加資憲階하야陞工曹判書兼五衛都總府都總管이요正德元年丙寅夏에出爲咸鏡道觀察使兼咸興府尹하다是年九月에坐事就對于京이러니遭遇 聖主하야龍飛策勳으로爲靖國功臣하고階加正憲하야仍本職하니라二年丁卯閏正月에以疾로終于官하니享年이六十有二라訃聞에輟朝市三日하고賻贈有加하니賜諡恭簡이라公卒後四月에官葬具하야于廣州治南靈長山南向之原하다事旣完에其嗣子胤源胤根이以公之族出行治와歷官壽年으로請碑銘于用漑曰亡父는天性이端嚴하야不事幅하고居官職에勤謹簡密하고臨財苟無得하며待人如有容하고生長門閥하야不以富貴로加人하고敦睦九族하야未嘗以親疎爲內外라先娶僉知中樞府事金崇海之女하야生一女하고後娶茂松君女하야生二男一女라其性行事業이在人耳目者-自當流播于世나然이나不文諸貞石이면恐久而湮滅하야無以昭于後요吾兩孤-身不立하고名不揚하야無能顯于親이라女弟는幼未適人하고姉壻는判官元亦官位未達이라若不得當世主史翰者一言이면將何以取信於世리요願借末筆하야以圖不朽하노이다用漑-哀其意重其請하고且觀其敍述先人에無溢語하니協吾所嘗見聞이라皆可書하노라遂爲銘曰

西川君不廟重建記(서천군부조묘중건기) 서천군사문

此는 惟我十三代祖考恭簡公府君 妥神之所也라. 府君의 姓은 韓이요. 諱는 斯文이요. 字는 子藝니 淸州人이라. 遠祖 諱蘭은 佐高麗太祖有功하야 封三韓壁上功臣하다. 自後로 名公巨卿이 繼世聯하니 有諱康은 擢第하야 歷事之高宗,忠烈 兩朝하야 終中贊하고 諡는 文惠하다. 中贊之孫 諱渥은 從忠宣王 入元朝하야 能悍王子艱하야 策功爲 三韓三重 上黨府院君하니 諡는 思肅이요. 思肅之孫 諱脩는 右文館大提學이니 諡는 文敬이요. 諱尙敬은 朝鮮朝 領議政 開國功臣이니 諡는 文簡이요. 諱惠는 咸吉道觀察使니 封淸山君이요. 諱繼禧는 左贊成 諡文靖이니 於府君에 高曾祖考也라. 府君이 生於 正統丙寅四月二十三日하야 中宗朝 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正憲大夫 行工曹判書 咸鏡道觀察使兼 咸興府尹 封西川君 諡恭簡하고 卒于 正德丁卯正月二十一日하니 墓在 廣州秋峴負子之原하니 今城南市 栗洞也라. 二樂亭申用漑撰 神道碑銘하다. 府君之偉勳嵬業이 昭載於國史而 令德懿行이 亦載於遺事卷中矣라. 余孱裔-何敢煩贅리요. 特 聖朝之優遇하야 陞資添帙하고 垂加不之典하야 永奉香奠하니 實子孫百世之榮而不幸近世에 累經兵괘하고 且孫裔守護不謹하야 祠宇毁傾而未能補修하고 莫重主神이 多年權奉於嗣孫家廟하니 私心悚惶이 恐縮無地라. 每多議及於營建之計나 然이나 事巨力綿하야 齎志未就者數十有載矣라. 其后皆者 -戰兢之心이 果何如哉아. 去年秋에 後孫萬永이 以奉先之誠으로 祭畓七斗落於獻納于門中하니 衆議齎發하야 乃以從姪百允으로 擔當巨事하야 期欲成就之計하니 散在孫仍이 一是響應하야 彈誠竭力하야 經之營之하야 亘寒暑而祠宇告成이라. 涓吉奉安하니 如在洋洋이라. 感何如之며 幸何形焉이리요. 凡事之有成이 必有其時而且待其人乎哉인저 惟望僉宗은 克念今日之艱若하야 須續守護하야 永世無替 -千萬是幸耳라. 功告之日에 屬余以文記之커늘 志其疎拙하고 如右記實焉하노라.

 檀紀4310年 丁巳秋 13代孫 郁會 謹識

서천군 연대표 서천군사문

서기

조선

간지

중국(명)

서천군

경력사항

1446

 世宗28年

丙寅

英宗正統11年

1

4.23. 출생

1452

文宗2年

壬申

景宗景泰 3年

7

弟 사무,사신 출생

1453

端宗1年

癸酉

景宗景泰 4年

8

弟 사개 출생

1455

世祖1年

乙亥

景宗景泰 6年

10

5.15 母  증정경부인 함양여씨졸

1458

世祖4年

戊寅

英宗天順 2年

13

9.28 조모  정경부인 창령성씨 졸

1462

世祖8年

壬午

英宗天順 6年

17

문소전직장

1463

世祖9年

癸未

英宗天順 7年

18

세자익위사세마겸 선전관, 호조정랑 역임 

1478

成宗9年

戊戌

憲宗成化14年

33

군기시첨정,

1479

成宗10年

己亥

憲宗成化15年

34

부평, 철원, 강화부사 역임

1482

成宗13年

壬寅

憲宗成化18年

37

충훈부경력.  윤8.19  부친 문정공 졸

1483

成宗14年

癸卯

憲宗成化19年

38

사헌부집의, 제용감정, 통례원좌,우통례 역임

1492

成宗23年

壬子

孝宗弘治 5年

47

통정대부,우부승지

1493

成宗24年

癸丑

孝宗弘治 6年

48

 좌승지

1495

燕山君1年

乙卯

孝宗弘治 8年

50

전라감사,가선대부,서천군

1496

燕山君2年

丙辰

孝宗弘治 9年

51

개성부유수,

1497

燕山君3年

丁巳

孝宗弘治10年

52

한성좌윤,가정대부

1498

燕山君4年

戊午

孝宗弘治11年

53

동지주추부사, 천추사(사신),

1500

燕山君6年

庚申

孝宗弘治13年

 55

대사헌,정조사(사신)

1501

燕山君7年

辛酉

孝宗弘治14年

 56

병조, 공조참판 역임

1504

燕山君10年

甲子

孝宗弘治17年

 59

자헌대부,공조판서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갑자사화

1506

中宗1年

丙寅

武宗正德1年

 61

함경도관찰사겸 함흥부윤, 중종반정후 정국공신,정헌대부

1507

中宗2年

丁卯

武宗正德2年

 62

閏1.21.졸

15世 士武(사무)

1452년(문종 壬申)生 丁亥 始仕 한성부 判官 1482년(성종 壬寅) 9월 10일 卒 贈左叅贊
○配 贈貞敬夫人 원주邊氏  父는 현감 保 祖 군수 尙聘(상빙) 증조 도총제 頤(이) 외조 贈兵叅 양천 許樞(허추) 忌 4월 13일
墓 광주 돌마면 분당리 秋峴 巳坐 今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上下兆 有碣

15世 士信(사신) top

  삼등공묘지명

  삼등공 묘소

공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조조의 명신 한계희의 3남으로 字는 德祖(덕조)이다. 1452년(文宗2 壬申)에 출생하여 1498년(燕山4 戊午) 9월 4일 졸하니 壽 47세이다. 성종조에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선략사맹(宣略司猛)으로부터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삼등현령(三登縣令)을 지내고 사후 통례원좌통례(贈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인(淑人)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직장(直長) 정견(釘堅)의 딸이며 생년은 미상이고 1512년(중종壬申) 卒하였다. 祖父는 참판(
判)증영상(贈領相) 연손(連孫)이고 증조는 판관(判官) 승(昇)이고 외조는 교리(校理) 창령(昌寧) 성희(成熺)이다.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 율동공원위 영장산에 부친인 문정공묘(文靖公墓) 외청룡(外靑龍) 자좌(子坐)에
쌍조(雙兆)이고 석의(石儀)로 치산하였다.

三登公 諱士信(삼등공 사신)墓誌銘  삼등공 사신

通訓大夫宣略司猛行三登縣令贈通禮院左通禮淸州韓公士信之墓 配淑人慶州李氏 左(통훈대부선략사맹행삼등현령증통례원좌통례청주한공사신지묘 배숙인경주이씨 부좌)

府君의姓은韓이요諱는士信이요字는德祖이시다惟我韓氏는西原大族이라始祖의諱는蘭이요高麗統合三韓開國壁上功臣三重大匡門下太尉諡威襄이라自後로冠冕이奕世相繼하야有封有諡니淸城君諱公義諡平簡이고右文館大提學贈左議政諱脩諡文敬이니皆中世顯祖라曾祖는諱尙敬이며號信齋니朝鮮開國元勳으로領議政西原府院君諡文簡이고有不하고祖考의諱는惠요嘉義大夫咸吉道觀察使淸山君贈領議政西原府院君이고考의諱는繼禧요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議政府左贊成西平君諡文靖이고有不하고는貞敬夫人咸陽呂氏이다府君이文宗三年壬申生하시어燕山五年戊午九月四日卒하야葬于文靖公局內貯水池上子坐雙兆之原하다官至通訓大夫宣略司猛行三登縣令贈通禮院左通禮이고配淑人慶州李氏니直長釘堅女라祖는判延孫이며外祖는校理昌寧成熺라生三男六女하니男長永이요通訓大夫行沃川郡守贈通禮院左通禮요次曰碩이니嘉善大夫訓鍊院都正이요三曰常이니通禮院左通禮요女坡平尹倬은右尹이요安東權弼은監察이요洪伯源은內禁衛고彦陽金仁叔은士人이요韓山李繼金은佐郞이요孫熙祖는縣令이요沃川公이生一男하니文源이요官至通訓大夫行禮山縣監兼洪州鎭營兵馬節制使이고都正公이生四男하니長曰仁源은同福縣監이요次曰議源禮源智源이라智源은文科에登第하여歷翰林銓郞湖堂하고行通訓大夫弘文館校理經筵侍讀官知製誥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世子主賓客이요通禮公이生三男하니長曰善源이요次慶源은文科銓郞이요次性源은文科東萊府使라曾玄以下는盡不錄이라嗚呼라公의事蹟은累以兵面散逸泯沒하야無以徵之라豈不痛惜哉아墓碑가歲久磨剝하야不能判讀故로每爲孫之悚恐이러니後孫羽東炳澤暎澤龍善叔豹用國等鳩議詢謀하야發議於庚申祭享時宗會라京鄕諸宗이齊應하야卽着役工이라晳鎬掌財諸役하고亦記實하니晳鎬詳按譜牒而記하고以俟後之取徵云爾하노라

檀紀4314年辛酉(1981) 2月 日 堅立(견립) 13代孫    晳鎬(석호) 謹識(근식)
                                                         
傍14代孫  旭東(욱동) 謹書(근서)

三登公 諱:士信(삼등공:사신)墓所  삼등공 사신

 

 삼등공 휘사신의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 율동공원위 서평릉내의 문정공묘외 청룡자좌에 위치하며 배위 숙인 경주이씨와 쌍조이다.

 삼등공의 구비가 있었으나 비문이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하고 또 전하는 비문이 없어 서기1981년 봄에 비문을 새로 지어 세웠다.

15世 士介(사개)

공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士廉(사렴)이고 문정공 繼禧(계희) 의 4남이다. 1453년(端宗癸酉) 출생하여 1480년(성종 11) 처음 별제(別提) 에 제수되고, 이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를 거쳐, 주부·좌랑(主簿·佐郞) 을 역임하였다. 그후 조봉대부(朝奉大夫) 에 올라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 와 부정(副正) , 정(正)을 역임하고 1505년(연산군 1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통정대부(通政大夫) 에 승진하여 영흥부사(永興府使) 와 해주·광주·진주(海州·廣州·晉州) 등지의 목사(牧使) 를 역임하고 1521년(中宗辛巳) 7월 6일 卒하니 향년이 69세이다. 사후 병조참판(兵曹參判) 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정부인(贈貞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인데 대사헌(大司憲) 유인(有仁)의 딸이다. 외조는 감찰(監察) 연일(延日) 정보(鄭保)이고 忌日은 正월 19일이다.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공원위 부친인 문정공묘하(文靖公墓下) 신좌(辛坐)에
합조(合兆)이며 묘 앞에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문은  金安老가 撰하였고 부친 문정공 신도비와 伯氏인 서천군 사문의 신도비와 함께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享祀는 음력 10월 5일 行한다.

15세 李禧(이영희)  top

全義人, 武科 重試에 올라 경원부사를 지냈다.부친은 현감 宏植(굉식)이고 아들은 현령 李昌仁, 현령 李昌義, 군수 李昌禮, 참봉 李昌智, 내금위 李昌善이고 딸은 좌의정 순흥 안당이다.

14세 柳均(유균)

晋州人武科僉知贈戶曹判書, 父知敦寧子偕, 子:柳仁濕宣傳官贈左贊成 子:柳義濕虞候 女:李準純昌郡事固城人父漢城少尹질 女:奇自煥進士高陽人父參判貴

14세 愼先庚(신선경)

僉知居昌人,父監司幾 子:愼嗣源監察 子:愼繼源府使 女:先朝后宮昭訓 女:盧盼再登文科禮文館校理豊川人父參判叔仝吏判盧愼之祖 女:柳仲孫晋州人 父子行 女柳仁濠文科工曹參義文化人 父靈光郡守孝章 女:呂希和咸陽人 父郡守孝輔

14세 李永瑞(이영서)

文禮曹正郞 贈領相平原府院君有詩名平昌人 父判官宗美 子:李季男吏判平原君諡翼平 子:李季仝武領中樞府事諡憲武 女:盧公著司評交河人 父領相思愼 女:柳지文贊成文陽君諡平簡文化人父監察自湄

13세  李士寬(이사관)

全義人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증영상(贈領相), 父 지중추부사(知中樞) 정간(貞幹) 子 이인장(李仁長) 록사(錄事), 이의장(李義長) 현감

13세 崔進明(최진명) top

全州人 증승정원도승지(贈承政院都承旨), 父 충익공(忠翼公) 만육당(晩六堂) 양(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