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56_back.gif blue56_up.gif blue56_next.gif                        上世譜2-3      quartz_red.gif세계도 보기

8세

謝奇

 

 

 

 

 

 

 

 

 

 

 

 

 

사기

 

 

 

 

 

 

 

 

 

 

 

 

 

9세

 

 

 

 

 

 

 

 

 

 

 

 

 

 

 

 

 

 

 

 

 

 

 

 

 

 

 

 

10세

公義 

 

 

 

 

 

 

 

 

 

 

 

 

 

공의 

 

 

 

 

 

 

 

 

 

 

 

 

 

11세

脩 

 

 

 

 

 

 

 

 

 

 

 

 

 

 

 

 

 

 

 

 

 

 

 

 

 

 

 

12세

尙德

 

安景儉

李作

權邦緯

任仲善

朴登

田甫長

 

 

 

 

 

 

상덕

 참판공

안경검

이작

권방위

임중선

박등

전보장

 

 

 

 

 

 

13세

權孟貞

李聞

 

 

 

 

 

 

 

 

 

 

 

 

권맹정

이문

 

 

 

 

 

 

 

 

 

 

 

 

14세

 

 

 

 

 

 

 

 

 

 

 

 

 

 

 

 

 

 

 

 

 

 

 

 

 

 

 

 

 2c

 

 

 

 

 

 

 

 

 

 

 

 

 

 

 

 

 

 

 

12世 尙德(상덕)  top

부윤공 유사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부윤공 언행록

府尹公 諱尙德 遺事

생몰년 미상.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字는 季德인데 이는 목은 이색이 지은 한씨사자명설에서 볼 수 있다. 공은 공신 호부상서 공의의 손자이고 학문이 높기로 이름난 류항 문경공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의 딸이다. 음사로 종부시승이 되고  1385년(고려우왕11 乙丑) 문과에 급제하여 1409년(태종9 己丑)에 사간원 지사, 승정원 승지를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간관과 승지의 자리에 있을 때 공의 족적이 실록에 전하여 진다.
우대언으로 있던 당시 우리나라는 많은 부분 중국농서를 이용하여왔다. 이에 불편을 느낀 태종은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중국의 고서에서 우리 실정에 간절히 필요한 것을 초록하되 우리말로 주를 달아 널리 보급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이때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그가 왕의 뜻에 따라 1273년(원종 14) 원나라 사농사(司農司)가 엮은 <농상집요 農桑輯要> 제4권에서 양잠에 관한 내용의 약 1/3을 초록, 이에 이두문으로 주를 달아 1415년(태종 15)우리나라 최초의 양잠에 관한 책인<양잠경험촬요 養蠶經驗撮要>를 초록하였다.
그의 초록 태도로 보아 양잠기술에 식견이 높았던 농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배위는 李氏로
父는 代言 貴生이다.

출처 高麗史, 太宗實錄, 國朝榜目, 韓國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養蠶經驗撮要에 대하여(李光麟, 歷史學報 28, 1965).

양잠경험촬요 [養蠶經驗撮要]

원나라의 〈농상집요 農桑輯要〉에서 양잠에 관한 부분을 번역한 책.

1책. 1415년(태종 15) 태종의 명으로 우대언(右大言) 한상덕(韓尙德)이 이두로 번역하고 경상도 관찰사 안등(安騰)이 주선, 경주에서 간행했다.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16세기 중간본의 후쇄본(後刷本)으로 보이는 책이 전해진다.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보충설명을 많이 하고 있다. 원문을 1/4 정도로 줄이고 그에 이어 번역문을 실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농서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와 함께 조선 초기 이두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국어사 자료이다.

 府尹公 諱尙德 言行錄  부윤공 상덕

字季德尙敬之弟高麗禑王十一年乙丑登第入朝鮮歷知司諫院事代言官至漢城府尹
부윤공의 자는 계덕이니 상경의 아우이다. 고려우왕11년(1385)을축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지사간원사, 대언을 역임했고 관직이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太宗九年上御廣筵樓知司諫事韓尙德進曰舜爲聖人皐陶以無若丹朱爲戒唐太宗亦英明之主魏徵以無若隨煬帝戒之今臣亦以無若辛禑爲戒殿下久不聽政臣意謂未寧也上曰子當此節每發眼疾今年亦然尙德曰事大以誠禦冠以威號爲太平然願常自敬畏明四目達四聽進賢退不肖安不忘危治不忘亂則今日之治三王可及上欣然曰三王安可及哉尙德曰殿下正心誠意與天地合其德母曰子不敏焉則能及古之聖矣尙德出 上曰韓尙敬言甚至其弟亦然自子卽位以來諫官進戒未有如尙德也
태종9년(1409)에 주상이 광연루에 올랐을 때 지사간원사 한상덕이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순 임금은 성인이지만 신하인 고요가 경계하여 아뢰대 <단주같은 임금이 되지 말라>하였으며, 당나라 태종 또한 영특하고 현명한 군주임에도 그의 신하 위징이 경계하여 아뢰기를 <수양제 같이 악정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臣도 주상이 신우(우왕)와 같은 군주가 되지 않기를 경계하오며 전하께서는 청정(聽政)하지 않으신지 오래되었습니다. 신의 뜻이 편치 않습니다.

주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 계절이 되면 늘 안질에 걸리곤 했는데 금년에도 또 안질이 걸렸네"
상덕이 아뢰기를 "모든 일은 성(성)으로 하며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은 위세로서 합니다. 지금 태평시대라고 말하나 그러나 바라건대 항상 정사에 대해 삼가고 두려워하시며 사방의 경계하는 말을 시청하시고 널리 먼 곳의 말까지 참고하여 들으시고 또 어진이를 벼슬에 나가게 하고 그렇지 못한이를 물러나게하시며 나라가 평안할 때도 위태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나라가 다스려졌을 때도 변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신다면 오늘의 치정은 고대 3왕에 미칠만합니다."
주상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내 3왕에 미치도록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상덕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바른 마음과 성의로 나라를 다스려 천지와 같이 그 덕을 부합되게 하시고 <나는 영민하지 못해....>라고 자포자기 하지 않으신다면 옛 성인의 정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상덕이 왕의 곁을 떠나자 왕이 말했다.
"한상경의 간언이 매우 간절했었는데 심지어 그 동생 상덕 또한 그러하니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간관의 경계하는 간언이 있었으나 아직 한상덕처럼 간절한 간언은 없었다."

他日視事尙德又進曰今當炎夏氣失其調天久不雨凄風如秋臣未知君德之失歟時政之爽歟上曰 政事闕失諫官宜自知之尙德曰命令之出政府承行臣等雖或有聞事己施行前日請屬諫官于政府以此也 上問故事如何黃喜曰國初李文和尹思修皆以諫官兼經歷 上曰此非美法經歷雖重任宰相屬吏君上之動靜政令之得失皆得正者諫官也以諫官兼經歷非所以尊朝廷重諫官也尙德又曰近者臺諫俱以言事罷黜非惟罪上其身鞠問相與論議之人是以士林相戒不過諫官之門又曰 殿下言動之間政敎之施無可規者然不曰政己治民己安每當淸燕請自警省曰所存之念何者獲戾于天所行之政何事見於民非惟俱其己然亦常慮其將然則禍患可消古昔賢聖莫不如此 上曰昌言也尙德猶不退 上曰復有所言乎尙德曰去歲凶人不聊生柳顯在忠淸道厚督責重困百姓臣等旣己劾問適經赦宥未得請罪臣聞傳曰與其有聚之臣寧有盜臣自今觀之盜國財似重民財以輕古人乘戒其旨深矣 上曰代言在子左右尙且不言子何從知之卽命都堂實以聞
다른 날 사무를 볼 때 상덕이 또 간언을 아뢰기를 "지금같이 무더운 여름에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날씨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쌀쌀한 바람이 가을 같습니다. 신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주상의 덕에 잘못됨이 있는지? 아니면 지금의 정치가 잘목 되었는지...."
주상이 이르기를 "정사의 잘못은 간관이 의당 알고 있을 것이네"
상덕이 아뢰기를 "왕이 명을 내리면 정부는 이를 받들어 시행합니다. 신 등이 비록 혹시라도 아뢰어 시행할 일이 있다면 간관이 정부에 이런 일을 부탁했을 것입니다."
주상이 고사에서는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대해 물었다. 이에 황희가 아뢰기를 "국초에 이문화, 윤사수는 모두 간관으로서 경력(정부의 종4품의 관리)을 겸하였습니다."
주상이 이르기를 "이는 좋은 법이 아니다. 경력이 비록 중요한 직책이나 재상에게 속하는 관리이다. 임금의 동정과 정령의 잘 잘못을 다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은 간관이다. 간관으로서 경력을 겸임한다는 것은 조정을 중히 여기는 방법이 못된다."
상덕이 아뢰기를 "근래에 와사 대간이 모두 왕에게 간언하는 일로 파직되고 죄를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같이 논의한 사람도 국문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림들은 서로 간관을 맡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그동안의 언동과 정교를 시행함에 바로 잡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정치가이미 시행되고 백성이 이미 편안하다고 말씀하시지 마십시요. 늘 청연때에 전하께서 경계하고 반성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에 어떤 것이 하늘의 법에 어긋났으며내가 실행한 바 정치가 무슨 일이 백성에게 원성을 샀느냐?>고 하시고, 이미 하늘의 뜻을 어기고 백성의 원성을 산 일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또한 앞으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염려하신다면 국가의 환란과 근심은 없게 될 것입니다. 옛성인 또한 이처럼 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좋은 말이네"
상덕이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있으니 주상이 다시 이르기를 "또 할말이 있는가?"
상덕이 아뢰기를 "지난해 흉년이 들어 백성이 생계를 꾸려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정현은 충청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백성에게 독촉하여 세금을 과하게 받고 백성을 거듭 곤궁하게 했습니다. 신 등이 그 사실을 탄핵하여 물었는데 그의 죄에 대하여 탄핵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듣기로 경전에 <백성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는 신하보다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가 낫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국재를 훔치는 것을 중죄로 여기고 민재를 거두는 것을 경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옛 역사에서도 바로 임금의 그러한 뜻을 매우 경계하였습니다."
주상이 이르기를 "대언이 나의 좌우에 있는데 아직 나에게 말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유정현의 실책을 알겠는가? 즉시 도당(의정부)으로 하여금 유정현의 죄를 밝혀서 내게 아뢰라"하였다.

十一年 上謂議政府六曹曰今國家無事子當寒每日視朝欲與卿等克勤無怠韓尙德對曰勤政帝王之美德宴安古人之所戒雖無事每日視朝誠美法也 上謂代言等曰"大學衍義爲書德刑先後之分田里休戚之實尤其要者也乃 命右副代言韓尙德大書殿壁使群臣觀之
태종11(1411)년 주상이 의정부 6조에 하교히기를 "지금 국가가 무사하지만 내 심한 추위를 당하더라도 매일 조정해서 임무를 보면서 경들과 함께 근면하고 게으름이 없겠노라."
한상덕이 아뢰기를 "근정은 옛 제왕들의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그러나 연안(宴安)은 옛 사람도 삼가고 경계했던 바입니다. 비록무사할 때라도 조정업무를 보시겠다는 뜻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상이 대언 등에게 이르기를 "대학연의에 <덕과 형율은 선후를 분별하고 전리(田里)는 휴척을 진실히 한다 함은 더욱 중요한 덕이다.>" 라 하고 이에 우부대언 한상덕에게 명하여 "대궐벽에 크게 써붙이고 여러신하들이 보게 하라" 하였다.

十三年 上謂代言韓尙德曰刑房之任至重卿其愼之對曰 殿下代天理物賞罰宜無一毫差謬臣亦夙夜敬謹猶恐一夫無辜獲罪以累 殿下好生之德 上曰子若誤斷卿其直言無諱
태종13(1413)년에 주상이 대언 한상덕에게 이르기를 "형방의 책임이 매우 중하니 경은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한상덕이 아뢰기를 "전하의 대천리물하시고 상벌에 조금도 착유가 없게 하시고 신 또한 주야로 삼가하여 한 사람이라도 무고히 죄를 당하는 일로 전하의 호생지덕에 누가 됨이 없도ㅜ록 하소서."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오단하는 일이 있으면 경이 바른말로 은휘함이 없게하라."하였다.
世宗七年 上曰往昔太平之時尙有挽
切諫者今雖小康不及古必矣未有敢言面爭者何今人之不如古也上又曰漢宣帝內則吏民安外則凶奴稱藩後之議者以爲基禍之主宋安石爲相自以爲輔國安民神宗勵精圖治而未免後世之譏可不懼乎韓尙德曰 殿下今日之言實宗社生民之福也(遺事)
세종7(1425)년 주상이 이르기를 "과거 태평했던 시대에도 오히려 옷자락을 당기면서 간절히 간언하는 신하가 있었는데 지금은 비록 소강상태이지만 옛처럼 태평성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대도 나의 면정에서 간언하며 다투는 신하가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지금의 사람이 옛 사람만 못하기 때문이리라." 이어 "한나라 선제때 안으로는 관리와 백성이 편안했으며 밖으로는 흉노가 번신이라 일컬었었다. 그러나 후대에 한나라 선제를 평하는 사람들은 <재화의 기반을 만드는 군주였다.>고 한다. 또 송나라 왕안석은 재상이 되어 자신은 국가를 보좌하고 백성을 편안케 했다고 생각하였으며 신종 또한 선치를 독려하였으나 오히려 후대사람들에게 기롱을 받았다. 그러니 내가 두렵지 안겠는가."
한상덕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지금 하신 말쓰므은 진실로 종사와 생민에게 복된 일입니다."하였다.(유사)

13세 권맹정(權孟貞)

안동인(安東人) 정랑(正郞), 父 좌의정(左議政) 진(軫)

13세 이문(李聞)

경주인(慶州人) 직장(直長), 父 소윤(少尹) 종인(鐘仁)

12세 안경검(安景儉)

순흥인(順興人) 공조전서(工曹典書)
○父 부원군(府院君) 諡 문간(文簡) 종원(宗源)
○子
안민동(安民同) 판관(判官),
○女 이사흠(李士欽) 전의인(全義人) 대호군(大護軍) 지중추(知中樞) 정간(貞幹),
○女 이윤상(李允商) 경주인(慶州人) 부사(府使,)
○女 김맹성(金孟誠) 경주인(慶州人) 형판(刑判) 諡 희경(僖敬) 계림군(鷄林君) 곤(稇)
○女 김천(金闡)

12세 이작(李作)

전의인(全義人) 부사(府使)
○子 이영간(李英幹) 군수(郡守)
○子
이의흡(李宜洽) 승지(承旨)
○子 이의영(李宜泳) 주부(主簿)
○女 윤처경(尹處敬) 직장(直長)
○女 이종(瑽) 고성인(固城人) 돈녕부승( 敦寧府承) 병판(兵判)

12세 권방위(權邦緯)   top

안동인(安東人) 도총제(都摠制) ○父 영상(領相) 중화(仲和)

12세 임중선(任仲善)

풍천인(豊川人) 통정(通政) 판무산현사(判撫山縣事)
○父 한성판윤(漢城判尹) 산보(山寶)
○子 임효신(任孝信),○임효충(任孝忠),○임효인(任孝仁),○임효명(任孝明), ○임효경(任孝敬)
○女 이처온(李處溫) 성산인(星山人)

12세 박등(朴登)

밀양인(密陽人) 통정(通政) 사천현사(泗川縣事)
○父 화녕군(和寧君) 희(熹)
○子 박유인(朴惟仁) ○子 박유의(朴惟義) 군수(郡守)
○女 정보(鄭保) ○女 원자정(元自貞)

12세 전보장(田甫長)  top

중랑장(中郞將) 총제(摠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