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56_back.gif blue56_up.gif blue56_next.gif                        上世譜2-6      quartz_red.gif세계도 보기

8세

謝奇

 

 

 

 

 

 

 

 

 

 

 

 

 

 

사기

 

 

 

 

 

 

 

 

 

 

 

 

 

 

9세

 

 

 

 

 

 

 

 

 

 

 

 

 

 

 

 

 

 

 

 

 

 

 

 

 

 

 

 

10세

公衍

 

 

 

方信

 

 

 

 

 

 

 

 

 

 

공연

 

 

 

방신

 

 

 

 

 

 

 

 

 

 

11세


 

 

 

 

 

 

 

 

 

 

 

 

 

 

 

 

 

 

 

 

 

 

 

 

 

 

12세

洪甫

 

 

 

孟復

季復

 

 

 

 

 

 

 

 

 

홍보

 

 

 

맹복

계복 

 

 

 

 

 

 

 

 

 

13세

安愼

黃吉祥

趙從生


 

 

 

 

 

 


 

안신

황길상

조종생

 

 

 

 

 

 

 

14세

自强

 

 

 

伯倫

叔倫

元淳

曺熹

閔晤

柳茵

敍倫

有倫

金有全

洪允澄

자강

 

 

 

백륜

숙륜

원순

조희

민오

유인

서륜

유륜

김유전

홍윤징

2f

都事公 

副護軍公

 

 

 

襄惠公

縣令公

 

 

 

 

僉正公 

牌頭公 

 

 

 

 

 

 

 

 

10世 公衍(공연)

공의 휘는 공연이고 는 각성대사(覺星大師)이다. 도첨의 우정승이며 충혜왕묘에 배향되신 사숙공 渥(악)의 넷째 아들이고 보문각 제학공 謝奇(사기)의 손자이다. 소년 시절부터 불법(佛法)을 좋아하여 조계사(曹溪寺) 주지(住持)에 이르렀으며,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아들은 부사 柱(주)이다. 이 기록은 무진보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依戊辰譜載錄).

10世 方信(방신)

출생년미상○恭慜王4年乙未(1355元順帝至正15年)安乙起下登第○輸忠秉義協贊功臣,三重大匡,僉議府贊成事,政堂文學,修文殿太學士,監春秋館事,西原君,○公以壯當麗末累建大功討平紅賊收復京城策勳一等又破女眞平金三善三介之亂悉復和咸等州凱還 賜宴內殿賞賚旌功○元順帝以平賊功授奉訓大夫秘書監丞○恭愍王20年辛亥旽伏誅公時爲贊成事尹桓爲侍中牧隱李穡爲政堂文學太祖知門下府稱文武得人○恭慜王23年甲寅(1374)洪倫之亂禍及子弟衛時公第二子安亦在衛中公坐謫遠州○禑王2年丙辰(1376明太祖洪武9年)12月被禍○麗史有傳○輿地勝覽錄公又淸州人物
 
공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이며 무신이다. 우정승을 지내고 충혜왕묘에 배향되신 사숙공 渥의 아들로 제학공 謝奇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 원주 원씨니 동지밀직사사 卿의 따님이시다. 공은 어려서부터 형을 공경하고 따르며 아우를 부호하여 사랑하는 우애가 습성화되고 겸양과 예의 바른 미덕의 인물로 성장하였다.
일찍이 학업에 정진하여 경사와 시문에 통달하였으며, 공민왕4년을미(1355)안을기에 이어 차석으로 과거에 등과하였다.또한 장수다운 기국과 지략이 있어 동왕 7년에 상장군으로 동북면 병마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추밀원 직학사로써 동왕 9년에 동지공거를 맡아 진사시를 취하고 정몽주 등 33인을 試取(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하였다. 동왕 10년 직학사로서 다시 동북면 병마사로 나갔다. 그런데 이 해 10월에 홍건적의 반성과 사유, 관선냉, 주원수, 파두반 등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에 침범하고 계속 남하하므로 방어전을 폈으나 패하여 왕이 안동으로 피난 가고 경도는 함락되었다. 동왕 11년에 공은 안우, 이방실, 황상, 김득배 등 여러 장군들과 더불어 20만 대군을 이끌고 맹공을 펼쳐 홍건적의 괴수인 사유, 관선냉등을 참살하니 적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밟아 죽고 얼어서 죽는 등 시신이 성내에 가득하고 참수된 자가 십 여만명에 이르렀으며 적들이 元帝(원제)로부터 탈취하였던 옥새와 금은 보화, 병기 등을 노획하고 경도를 수복하였다. 이듬 해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정당문학에 승진하였으며, 부모님과 처에게는 3계급을 초월한 관작을, 아들 1인에게는 7품직을 선수(宣授)하고 자손들에게는 음직을 서임하며, 田 100결과 노비 10구 등을 하사 받았다. 이 해 원나라가 덕흥군을 세워서 왕을 삼고 요양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공은 첨의평리로써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김귀와 더불어 화주에 주둔하여 동북방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그 때 또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하였으므로 공이 병마사 전이도, 이희, 이용장 등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북변 사람 김방괘는 이성계의 고모부이다. 삼선과 삼개라는 두 아들이 있으니 여진에서 성장하였고 체력과 용력이 범인보다 뛰어났다. 원나라 덕흥군의 군병이 의주를 포위하고 선주에 칩입하자 이를 격퇴키 위하여 이성계가 급히 진군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이성계에게 감히 접근도 못하던 삼선과 삼개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여진을 유인하고 끌어 들여 화주 이북이 모두 함락되었다. 좌우로 적군을 맞아 연전연패하니 장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군사를 재정비하여 진격하도록 하고 이성계도 김귀 등과 함께 3면으로 진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화주, 함주 등 잃었던 땅을 모두 수복하였다. 삼선과 삼개는 여진으로 달아난 후 돌아 오지 못하였다. 왕은 이성계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공에게는 비단을 하사하여 그 공훈을 포상하고 개선 할 때는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축하하였다. 곧이어 서원군에 봉하였고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봉훈대부 비서승감을 선수하였으며, 훗날에 또 찬성사에 제수하였다. 공민왕 20년에 공을 첨의찬성사로, 이 색을 정당문학으로, 또한 이성계를 지문하부사로 삼으니 신돈이 주살된 때라 조정의 면모가 쇄신되었다. 왕은 흡족하여 주위 신료들에게 "요즘은 일반 민중들의 조정에 대한 평론이 어떠한가" 하고 하문하니 신료들이 "지금 백성들은 국정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얻었다고 기뻐합니다" 라고 대답하니 왕은 기뻐 웃으며 가로되 "문관이나 무관을 모두 일류명사를 선택하여 재상을 삼았는데 이론이 있으랴" 하였다. 관직으로는 수충중의협찬공신 삼중대광 첨의부찬성사 정당문학 수문전태학사 감춘추관사를 역임하였다
공민왕 23년에 자제위 홍 륜이 익비와 통정하여 임신되었음을 내시 최만생이 밀고하니 왕은 자기의 소원이 성취됨을 은근히 기뻐하며 말하되 "내일은 홍 륜을 죽여 이 비밀을 엄폐할 것인데 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구나" 하였다. 최만생과 홍륜은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그날밤 왕을 시해하엿다. 그 후 체포되어 국문을 열 때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도 공범이라 고백하니 한안은 공의 둘째 아들이요, 모두가 자제위 소속이다. 한안은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가담한 바 없다고 끝까지 불복하였으나 홍륜 등의 일방적인 증언에 따라 공범으로 취급 받아 홍륜 등과 함께 주살당하였다. 공은 먼 곳으로 귀양가고 친속들도 유배되었다. 그 후 우왕 2년(1376)에 집의 김승득과 헌납 안정 등이 한안과 노선도 홍관과 권진 등과 동일하게 부모처자까지 극형에 처하자고 주장하니 시중 이인님, 찬성사 목인길, 평의 변안렬, 정당문학 홍중선, 문하시중 경복흥 등은 그 당시 한안과 노선은 범행에 간여한 바 없다고 불복하엿음에도 주살해 놓고 또 그 친속에게 극형을 가중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하였으나 왕은 이를 따르지 않고 체복사 이영을 보내 공을 참화케 하고 장남 호군공 休(휴), 3남 녹사공 寧(녕), 4남 烈(렬)등도 모두 참하였다.
공은 벼슬을 시작한지 20여년에 홍건적, 여진족 등의 칩입과 우왕 난정등의 내우외환의 와중에 출장입상으로 이를 극복하고 누누한 공을 세웠으나 일장춘몽으로 덧없이 미쳐 생각지도 못한 참화를 당하였으니 하늘이 무심치 않은가. 다만 불행 중 다행히도 장남 호군공과 3남 녹사공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달하여 왕후가 두분, 부마가 두분, 경위재상이 수십인에 이르니 이 모두가 공의 적덕행의에 따른 응보로 생각된다. 공은 당시 유학의 태두인 이목은, 정포은, 이초은 등과 문교하여 남은 글과 시도 많을 것으로 예상되나 현재까지 전래되는 것은 단 한구절 뿐이다.
○交河郡夫人盧氏, 父判事 信 一云宰臣 怡
배위는 교하군 부인 노씨이니 판서공 신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5남(休,安,寧,烈,任,) 3녀(金乙貴: 宰臣, 李公孝 上將,  李剛實: 陽城人 判中樞, 護軍 仁富,  李思恥: 陽城人 通訓判司宰監事,)를 생육하셨으니 장, 차, 3남, 4남은 화를 입었고 5남 판윤공만이 연소하여 화를 면하였다.
○思肅公墓所安山一云失護以俟日後探誌傳 ○高陽郡碧蹄邑奈遊里思肅公壇域內設壇○陰4月13日享祀
○묘소는 장단 세곡산 소재 사숙공의 묘소인 안산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실호되었다고 하나 현재 장단은 휴전선 내 DMZ에 위치하므로 이를 확인할 수도 없어 ○고양시 내유동 사숙공 제단역내에 20대손 陽命(양명)이 서원군봉찬회를 구성하고 경향각지의 후손들로 부터 성금을 모아 1989년 5월 17일에 제단을 봉설하였다. ○매년 음력 4월 13일에 제사를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