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56_back.gif blue56_up.gif blue56_next.gif                통례공파        quartz_red.gif세계도 보기

15세

士信

 

 

 

 

 

 

 

 

사신

 

 

 

 

 

16세

 

 

 

 

 

 

 

 

 

 

17세

性源

 

 

 

 

 

성원

 

 

 

 

 

18세

    檥

 

 

 

 

 

 

 

 

 

 

19세

亨吉

 

 

 

 

李聲

尹好謙

南曄

金致勳

 

 

 

형길

 

 

 

 

이성

윤호겸

남엽

김치훈

 

 

 

20세

 

 

 

 

 

沈敞

元後亮

徐道謙

 

 

 

 

 

 

 

 

 

 

 

  

심창

원후량

서도겸

 

 

 

 

 

 

 

21세

世謙

 

 

世讓

 

李鼎賢

 

 

 

 

 

 

 

 

 

 

세겸

 

 

세양

 

이정현

 

 

 

 

 

 

 

 

 

 

22세

鄭道存

전주인

 

 

 

 

 

 

정도존

부  사

 

 

 

 tf

pink13_down.gif

pink13_down.gif

초계인

pink13_down.gif

pink13_down.gif

 

 

 

 

 

 

 

 

 

 

 

 

 

20世 (은)  cybernation_back.gif

만은공 행장(원문)

만은공 행장(역문)

만은공 한은 유사

만은공 묘비문

字 仲澄(중징) 號 漫隱(만은) 隱逸(은일) 1619(光海君己未)2.14.~1688(肅宗戊辰).6.4.
허후, 허목 문하에서 수업. 현종즉위년(1659) 정태화의 孝薦으로 선릉참봉에 제수된 이후. 허목, 윤휴, 김수흥 등의 추천으로 사헌부 지평, 장령, 집의 등과 제용감정, 상락원정, 사복시정, 부사직, 부호군 등에 19차례 제수되었으나 산림에 은거하여 사직상소로 일관하고 不進承召又不就하니 士類가 景仰하였다. 공이 사거하니 숙종이 별치전을을 내려 부의하였다. 숙조16년(1690)우의정 김덕원의 주청으로 通政大夫 吏曹
議에 특별이 증직되었다.
유고로 漫隱遺稿, 만은집 2본 安定福撰行狀이 전하여 지고 이를 통합한 문집이 2006年 出刊 되었다
○配 贈淑夫人 綾城具氏 1621(辛酉)~1687(丁卯)8.29. 議  贈參判 定  外祖 判官 靑松 沈友益
○墓 양평군 양동면 단석리 種珠院 丙坐 合兆 有床石 碑碣
10月10日 行歲祭

楊平郡 楊東面 丹石里 漫隱公 墓所

 

 

漫隱公行狀 (원문) 만은공 은

公諱垽字仲澄其先西原人始祖蘭佐麗祖統合官太尉克昌厥後繼世燀爀有封有諡爲東韓盛族文敬公脩號柳巷文章道德師範一世子尙敬入本朝爲開國元勳官領相諡文簡文簡孫繼禧 睿成兩朝幷策勳封諡文靖於公爲六代祖曾祖諱性源文府使 贈知申祖諱檥 贈兵叅父諱亨吉文兵叅爲 仁廟名臣阨於時不大顯配延安李氏父延原府院君光庭女生四子公其季也公生于萬曆己未二月十四日生有異質弱不好弄有成人器度叅判公奇愛之及長敦孝友勤學業遊觀雪眉叟兩先生之門兩先生皆期許不淺早廢擧業專意經傳而尤用力於中庸惟以躬行實得爲務甲申遭外艱執制踰禮每亥時夕哭丑時朝哭未葬啜粥卒哭喫糲飯三年廬於墓側朝夕哭省風雨不避過慽致毁竟成淸嬴之疾陽坡鄭公太和義薦之於 朝以孝行己亥授宣陵叅奉公入告大夫人曰薦目不似不敢冒出因不仕後丁內艱執喪如前自是尤無進取之意乙卯以後薦入南臺至于己未爲持平者二掌令者六執義者二中間除掌樂院正皆不赴間有別諭但引疾上章而己無一言及於朝廷庚申變局後相臣金壽興薦晩安堂李公后定及公至公有曰前正韓某素有聲譽累登薦目而歛退邱園竟不一出其論議氣槩有非齷齪者可擬如此人別爲襃進以勵末俗自乙丑至丁卯連 除執義者六皆不赴公恬然於利害得失之外超然於與奪翻覆之際出處之不苟如此其潛德幽光有非凡夫俗士所窺測也戊辰五月令家人修遂具六月初四日以微恙考終于原州寓舍八月葬于砥平巨檀丙坐原與夫人墓合窆庚午相臣 筵奏 贈吏曹叅議夫人綾城具氏叅議定之女先公一歲卒生二子一女男長世謙三登縣令次世讓潭陽府使女適李鼎賢公天分旣高充養有素平居無疾言遞色敎子弟御奴僕正己率下恩威並行人皆感服壬戌捨京第卜居于原州梨湖卽叅判公寀梓鄕也家甚淸貧無田可耕惟以課花治圃爲娛 朝家命除一子近邑以爲榮養之地長㣧爲淸安縣監頻以食物問安公曰此亦君賜也不可獨食必分饋隣里公視世之勢利紛華若將浼己當路諸公皆勸出仕白湖尹公屢書勸勉公略不動念南坡洪公卽公姨母夫也旅宦之日寓於公家及秉東銓出避于高陽墓下亦嫌也白湖及混泉李公主北伐之議公貽書混泉言其不然及庚申之禍白湖受杖歿界公遣子弟慰問其答書曰世道至此網羅四張而兄獨閉戶吟病終令吾輩納拜南坡亦云風波獨不到高枕地甲寅後 朝議分淸濁公嘗戒南岳權公瑎曰目今權勢淸不如濁而日後之害必偏於濁果如其言故南岳說有曰心中尙記箴規切事後方歎識見明公少好讀書中嬰嬴疾雖未肆力而終日寓目皆性理書也或勸公著書公曰經傳微意先儒闡朙旣無餘蘊矣若於其問採摭糠粃竊付己意亦不無顚倒矛盾之獘此豈余淺見取可敢哉公嘗謂門人權監司欽曰我東士禍多出於儒術此無他盖緣學未至而名先播德未邵而責先重以致行止掣財姦嫂乘釁豈不懼哉卽今黨議三分禮論轉激必爲禍人之機陷眉翁之此時登庸甚不幸而雪爺之不遇幸也公少時堂號日休眉叟先生刻圖書以漫隱以送之仍以爲號噫士君子生斯世也誰不欲尊主疪民康濟一世而道有活隆時有利鈍是以有或出或處之不同也當 肅廟甲寅乙卯之際黨議橫流戈㦸相尋 少主臨御貴戚如林可謂道不隆而時不利矣以䜹賤覊旅之臣一朝排其間而奪其局旻冝君子明目審察處也未幾金沙之才學而竟殞其身漣老之宿德而未免窘步進退之難其如是夫公生于其時 於招屢下長徃不歸竟爲一世之完人豈不賢我䄵前韓君秉約以公遺事請狀于鼎福老病昏耄因循未果而韓君歿矣令公之承祀孫英耆來又申前請其忍辤諸謹按以爲狀如右以俟秉筆者採擇焉

上之十四䄵庚戌二月朔漢山安鼎福謹狀

만은공행장(번역문)   만은공 은

공의 휘(諱)는 은(垽), 자는 중징(仲澄)이고, 그 선대가 西原 사람이기 때문에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시조인 한난(韓蘭)이란 분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을 통일시키고 관직이 태위(太尉)에 이르러 후손을 창성하게 하였다. 그 후 대대로 번창하여 봉호(封號)를 받은 분도 있고 시호(諡號)를 받은 분도 있어 동한(東韓)의 갑족(甲族)이 되었다.

문경공(文敬公) 한수(韓脩)란 분은 호가 유항(柳巷)으로서 문장과 도덕이 한 세대의 모범이 되었고, 그 아들 한상경(韓尙敬)이란 분은 본조(本朝:朝鮮)에 들어와서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는 동시에 벼슬은 영상(領相)에 이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간공의 손자인 한계희(韓繼禧)란 분은 예종조(睿宗朝)와 성종조(成宗朝)에 재차 훈봉(勳封)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인데, 공에게 6대조가 된다. 공의 증조부인 한성원(韓性源)이란 분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내고 지신사(知申事: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인 한의(韓檥)란 분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부친인 한형길(韓亨吉)이란 분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내는 동시에 인조조(仁祖朝)의 명신이 되었으나 시운에 막혀 크게 드러나지는 못하였으며, 그 배위(配位)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의 딸로서 네 아들을 낳았는데, 공은 그 중 막내였다.

공은 만력(萬曆) 기미년(광해군11년. 1619) 2월 14일에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어릴 적에 벌써 재롱떠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 어른다운 기국과 도량이 있었으므로 참판공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관설(觀雪:許厚의 호)과 미수(眉叟:許穆의 호) 두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두 분 선생은 모두 공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공은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경전(經傳) 연구에 전심하였는데, 더욱 <중용(中庸)>을 열심히 읽으면서 오직 몸소 실천하여 실제를 얻는 일에 힘을 썼다.

갑신년(인조22년, 1644)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집상(執喪)하여 매일 해시(亥時)면 저녁 곡(哭)을 하고 축시(丑時)면 아침 곡을 하였으며, 장사 지내기 전에는 죽을 먹고 졸곡(卒哭) 후에 거친 밥을 먹었으며, 3년 동안 시묘 살이 하면서 조석으로 곡하는 것을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너무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여 결국 수척해지는 병에 걸렸다.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공이 공을 효행이 뛰어나다고 조정에 천거해서, 기해년(현종 즉위년, 1659)에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자 공은 안에 들어가 대부인(大夫人)에게 고하기를, “천거한 조목이 사실과 같지 않으므로 감히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 후 모친의 상을 당해서도 부친의 상 때와 같이 집상하였으며, 이후로는 더욱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을묘년(숙종원년, 1675) 이후 기미년(숙종5년, 1679)에 이르기까지 천거를 받아 남대(南臺)에 들어가 지평(持平)이 된 것이 두 번, 장령(掌令)이 된 것이 여섯 번, 집의(執義)가 된 것이 두 번이었으며, 그 사이에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되기도 하였는데,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간간이 임금이 별유(別諭)를 내리기도 하였지만, 단지 병을 핑계로 상소를 하였을 뿐,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경신년(숙종 6, 1680)의 변국(變局) 뒤에 상신(相臣) 김수흥(金壽興)이 만안당(晩安堂) 이후정(李后定)과 공을 천거하면서 공에 대해서는 심지어, “전 장악원 정 한은은 평소 명성이 있어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시골로 물러가 있고 끝내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의론과 기개는 악착스런 사람에 비하지 못할 점이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특별히 포장(襃獎)해 등용함으로써 말세의 타락한 풍속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을축년(숙종11년, 1685)부터 정묘년(숙종13년, 1687)까지 연달아 집의에 제수된 횟수가 여섯 번이었는데,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공은 이해, 득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여탈(與奪).번복(翻覆)에 대해서도 초연하는 등 출처(出處)의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드러나지 않은 덕과 감추어져있는 재주는 범부(凡夫)나 속사(俗士:식견이 낮은 사람)들이 엿보아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무진년(숙종 14, 1688) 5월에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장례에 소용되는 물품을 준비하게 하고는 6월 4일 하찮은 병으로 원주(原州)의 우사(寓舍)에서 고종(考終)하였다. 그 해 8월 지평(砥平) 거단(巨檀)의 병좌(丙坐)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부인의 묘와 합장하였다. 경오년(숙종 16, 1690)에 상신(相臣)이 경연(經筵)에서 아뢰어서 이조참의(吏曹叅議)가 추증되었다.

공의 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참의(叅議) 구정(具定)의 딸인데, 공보다 한 해 먼저 작고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한세겸(韓世謙)은 삼등현령(三登縣令)이고, 차남 한세양(韓世讓)은 담양부사(潭陽府使)이고, 딸은 이정현(李鼎賢:죽산부사)에게 시집갔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데다 꾸준히 수양을 하였다. 그래서 평소에 조급한 말을 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하지 않았다. 자제를 가르치고 노복을 거느림에 있어서는 자신을 바르게 하여 솔선수범을 하는 동시에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임술년(숙종 8, 1682)에 서울 집을 놓아두고 원주의 이호(梨湖)에 자리를 잡아 살았는데, 이곳은 바로 참판공의 고향이었다. 집이 워낙 청빈하여 경작할 만한 전토가 없었으므로 오직 꽃을 기르고 채마밭을 가꾸는 것으로 낙을 삼았을 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아들 한 명을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제수하여 부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래서 장남이 청안현감(淸安縣監:괴산군 청안면)이 되어 자주 음식을 가지고 와 문안을 올리자, 공은 말하기를,

“이것 또한 주상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혼자서만 먹을 수 없다.” 고 하면서 반드시 인근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공은 세상의 세리(勢利)와 분화(紛華)한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의 몸이 더렵혀질 것처럼 여겼다. 집권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출사하기를 권하고, 백호(白湖) 윤휴(尹鑴)가 여러 차례 서찰을 보내서 권면하였지만, 공은 조금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남파(南坡) 홍우원(洪宇遠)은 공의 이모부로서 객지에서 벼슬하면서 공의 집에 우거하였는데, 이 분이 이조판서가 되자, 공은 고양(高陽)에 있는 산소 아래로 피해 갔으니, 이 또한 혐의스럽기 때문이었다.

백호와 혼천(混泉) 이공(李公:東揆)이 북벌(北伐)을 주장하니, 공은 혼천에게 서찰을 보내 그 부당함에 대해 말하였다. 경신년(숙종 6, 1680) 환란 때에 백호가 곤장을 맞고 북쭉 변경에 유배되자, 공은 자제를 보내 위문하였는데, 백호가 보낸 답서에,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 죄망(罪網)이 사방에 펼쳐졌는데, 형만이 혼자서 문 닫고 들어앉아서 병으로 신음하더니 끝내는 우리들로 하여금 절을 드리게 한다.” 고 하였고, 남파도 또한, “풍파가 베개 높이 베고 편안히 잠자는 곳에만은 이르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갑인년(숙종 즉위년, 1674) 이후에 조정의 의논이 청론(淸論)과 탁론(濁論)으로 갈라졌다. 공은 언젠가 남악(南岳) 권해(權瑎)공에게 경계시키기를, “현재 권세는 청론이 탁론만 못하나, 이후의 피해는 반드시 탁론 쪽에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악은 공에 대한 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속엔 아직도 절실한 잠규 기억되니                       心中尙記箴規切

일 지난 뒤에야 밝은 식견 탄복하겠네                        事後方歎識見明   


공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는데, 중간에 병에 걸려서 비록 제대로 힘을 쏟지는 못하였으나, 종일 보는 책들은 모두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책이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책을 저술할 것을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경전(經傳)의 은미한 뜻은 선유(先儒)들이 이미 미진한 점 없이 다 밝혀놓았다. 그런데 만일 그 사이에서 찌꺼기를 주워 모아 슬그머니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면, 또한 전도되고 모순된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것이 어찌 나의 얕은 소견으로 감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문인인 감사(監司) 권흠(權欽)에게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사화(士禍)는 대부분 유술(儒術)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대개 학문은 부족한데 이름이 먼저 퍼지고 덕은 밝지 못한데 책임이 먼저 중해져서, 행동거지가 제약을 받게 되고 간사한 무리가 틈을 타게 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당론(黨論)이 셋으로 갈라져서 예론(禮論)이 점점 격해가니, 필시 이것이 사람들을 화(禍)에 빠뜨리는 함정이 될 것이다. 미옹(眉翁:許穆)이 이런 때에 등용된 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고, 설야(雪爺:許厚)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소시에 당호(堂號)를 ‘일휴(日休)’라고 하였었는데, 미수선생이 ‘만은(漫隱)’이라고 새긴 도장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에 따라 호를 삼은 것이다.

아, 이 세상의 사군자(士君子)치고 그 누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여 한 세상을 태평성대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마는, 도(道)에는 쇠퇴한 도와 융성한 도가 있고, 시기에는 이로운 시기와 불리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은 세상에 나서기도 하고 혹은 집에 들어앉아있기도 하여 처신이 동일하지 않았던 것이다.

숙묘(肅廟:肅宗) 갑인년(1674)에서 을묘년(1675) 사이에는 당론이 횡행하여 살벌한 칼날이 오가는가 하면, 나이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오르고 귀척(貴戚:임금의 인척)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으니, 도가 융성하지 못하고 시기가 이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골서 올라온 미천한 신하들을 하루아침에 그 사이에 배치하여 정국을 앗았으니, 이것은 마땅히 군자가 눈을 밝게 뜨고 자세히 살펴야 할 곳이다.

얼마 안가서 금사(金沙)의 재학(才學)으로서도 마침내 목숨을 잃었고, 연로(漣老)의 숙덕(宿德:높은 학덕)으로서도 군색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나아가고 물러감의 어려움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은 그런 시기에 태어나서 임금의 부르는 명이 여러 번 내려왔으나, 영영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여 나오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한 시대의 완전한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현명하지 않은가? 

연전에 한병약(韓秉約)군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 혼모(昏耄)하므로 세월만 보낸 채 짓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한군은 죽고 말았다. 지금 공의 승사손(承嗣孫)인 한영기(韓英耆)가 와서 다시 청하니,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삼가 유사를 상고하여 이상과 같이 행장을 지어 병필자(秉筆者)의 채택을 기다린다.


금상(今上:正祖) 14년인 경술년(1790) 2월 초하루 아침에

한산(漢山) 안정복(安鼎福)은 삼가 행장을 지음. 


서기 2006년 봄에

韓國傳統思想硏究所長 金東柱 譯


漫隱公(만은공) 韓垽(한은) 遺事    만은공 은

 

公의 字는 仲澄(중징) 號는 漫隱(만은)이며 始祖로부터 20世孫이다. 漫隱公의 生涯에 對하여는 順菴 安鼎福先生이 1790年에 撰한 行狀에 자세히 記錄되어 있으므로 省略하고 公의 文集에 對하여 記錄한다.

公의 遺作을 모은 文集은 3가지가 傳하는데,

그 하나는 現在 國立中央圖書館에 所藏된 漫隱集으로 첫머리에 安鼎福先生이 撰한 行狀을 싣고 그 뒤로 詩文 112篇과 上疏文 13篇이 年譜로 收錄되고, 그 뒤로 祭文 13篇, 雜著 5篇과 漫隱公과 婦人 綾城具氏의 葬禮에 보내온 輓詞 50篇 등 모두 193篇의 作品이 收錄되어 있고,

原本 外에 1977年 中央圖書館에서 複寫本에 若干의 註釋을 加한 異本을 發刊하여 所藏되어 있다.

다음으로 驪州 門中에 傳해온 漫隱集과 漫隱遺稿가 있는데 漫隱集은 亦是 行狀을 收錄하고 行狀뒤로 第1券에는 5言絶句 41篇, 5言律詩 29篇, 7言絶句 78篇, 7言律詩 28篇 등 詩文 176篇을, 第2券에 祭文 13篇과 其他作品 4篇 등 193篇이 作品 形式別로 收錄되어 있으며,

漫隱遺稿集에는 詩文 119篇, 上疏文 13篇, 雜著 3篇, 祭文 12篇, 등 147篇의 作品이 收錄되어 있다.

2006年에 後孫들이 이 作品들을 飜譯 漫隱公文集 國譯本을 出刊하였다.

그 외 漫隱公에 對한 내용으로 承政院日記에 103件, 朝鮮王朝實錄에 22件의 記錄이 있다.


12代傍孫 湸亨 謹書

만은공 은 묘비문  만은공 은

特贈通政大夫吏曹叅議韓垽之墓  配贈淑夫人綾城具氏合袝丙坐

公의 諱는 垽이고 字는 仲澄이요 號는 漫隱이니 淸州人이다 始祖諱蘭은 高麗太祖統合三韓壁上功臣太尉諡威襄이니 代代로 奕世相繼하여 有封有諡하니 9代祖의 諱는 脩요. 號는 柳巷이요 大提學 贈領議政諡文敬이요. 8代祖 諱는 尙敬이니 朝鮮開國功臣 領議政世子師諡文簡이요 6代祖諱는 繼禧니 睿,成兩朝兩策勳功臣左贊成贈領議政諡文靖이고 曾祖考諱는 性源이니 文科東萊府使贈都承旨이며 祖考는 諱檥니 贈兵曹叅判蔭副司果요 皇考의 諱는 亨吉 字는 泰而 號는 柳村이요 文科及第하여 兵曹叅判兼 同知義禁府事 世子左副賓客이니 仁廟의 名臣으로六房承旨를 모두 거친 喉舌之官 이요 嘉善大夫로 都承旨를 三回에 걸쳐 歷任하고 三道觀察과 吏,戶,禮,兵,工曹의 叅判을 歷任하였으며 皇妣延安李氏는 延原府院君吏判光庭의 따님으로 光海己未2月14日巳時에 公을 生하니 4男季也라. 父親이 公을 奇愛敦友勤學業하니 6歲에 項羽讀하여 詩文을 쓰기 시작하고 11歲에 眉叟翁家入門 觀雪翁家 兩許先生門下8年修講하여 該博한 文章道德으로 經學中庸實行에 主力하여 學行에 錄選되고 仁祖甲申9月28日 丁外艱執制踰禮每亥時夕哭,丑時朝哭,卒哭喫糲飯3年廬於墓側朝夕哭省風雨不避過慽致毁竟成淸羸之疾陽坡領相鄭太和義薦朝以孝行錄選되어 孝宗10年己亥 授宜陵叅奉公不仕 顯宗乙巳正月初7日 丁內艱執喪如禮하다. 公57歲肅宗乙卯8月12日薦入南臺拜司憲府持平者2掌令者6執義者2中間除掌院正等 모두 不赴辭職上疏하다. 庚申大變局後 相臣金壽興薦晩堂李公后定及公至有曰 前正韓某素有聲譽累登薦其論議自乙丑至丁卯連除執義者六皆不赴19徵不進承召又不就하니 士林이 推仰 思慕하더라. 1688年肅宗14年戊辰 公70歲 令家人修遠具 6月初4日 以徵恙考終于梨湖寓舍 8月 葬于砥平巨檀丙坐原與夫人墓合窆 庚午相臣이 主上殿下께 아뢰어 特贈吏曹叅議하다. 遺稿는 漫隱集에 詩文120餘首 上疏文13篇 祭文11篇等이 生己未로부터 歿戊辰까지 70年동안 年譜로 編修되어 國立中央圖書館 所藏 貴重本으로 지정되어 傳한다. 配贈淑夫人 綾城具氏는 兵曹叅議 定의 따님으로 肅宗丁卯8月29日 府君보다 1年앞서 卒하시니 所生은 2男1女로 男長 世謙은 蔭三登縣令이고 次世讓은 蔭潭陽府使요 女壻는 全州人府使李鼎賢이다. 孫子는 ,,濬,濤이며 以下는 不錄한다. 公의 蔭德行誼와 文章道德은 儒林의 師表이다. 燦爛한 德行을 簡略히 敍述하여 子孫萬代에 永傳코저 謹再拜 泣書碑碣하나이다.

西紀2001年  辛巳中春節

 漫隱公 10代孫 省愚 撰

 漫隱公 後孫 : 陽愚 省玉 平愚 康愚

21世 世謙(세겸)  cybernation_back.gif

字 受甫(수보) 1642(仁祖壬午)8.20.~1705(英祖乙酉)10.14.
1666(丙午),進士 陰職으로 청안, 진천현감, 통훈대부 三登縣令 등 역임
양평군 양동면 단석리 種珠院 先塋下 三合兆 有床石 碑碣 10月10日 行歲祭
○配 竹山安氏 1639(己卯)~1662(壬寅)6.11. 父 外祖 郡守 江華崔珪 墓 高陽市 香洞 先塋左側 卯坐 
○配 延安李氏 
1644(甲申)~1686(丙寅)8.14. 父 海賚 墓 乾位合兆
○配 安東權氏 1672(壬子)~1756(丙子)11.20. 父 憲 墓 乾位合兆

縣令公 諱世謙 遺事

公의 諱는 世謙(세겸) 字는 受甫(수보)이며 始祖의 21世孫이다. 文靖公 諱繼禧의 7代孫이며, 高祖의 諱는 性源으로 1553年 文科에 올라 通政大夫 贈承政院都承旨 行東萊都護府使이며 曾祖의 諱는 檥로 贈嘉善大夫 兵曹叅判 兼 同知義禁府使 行禦侮將軍 忠佐衛副司果이다. 祖考의 諱는 亨吉이니 1620年 庭試文科에 及第하여 嘉善大夫 兵曹叅判 兼 同知義禁府事 世子左副賓客이며 考의 諱는 垽(은)이며 孝行과 學行으로 薦擧되어 通訓大夫 司憲府 執義 等에 除授되었으나 不仕하였으며, 死後 通政大夫 吏曹叅議에 追贈되었다. 妣는 贈淑夫人 綾城具氏로 兵曹叅議  贈參判 定의 女이며, 公은 1642年(仁祖20 壬午) 8月 20日 長男으로 태어났다.
1666年(丙午) 司馬試에 오르고 1676年(肅宗2년) 12月 泰陵叅奉에 除授된 이후, 宗廟署奉事, 繕工監直長, 義禁府都事를 거쳐 부친 漫隱公을 奉養토록 배려하여 淸安縣監에 제수하였다. 佐郞, 鎭川縣監, 司圃署 別提, 山陵都監 郎廳 等을 歷任하고 肅宗26年(1700) 3月 三登縣令에 除授되었다.
1705년(肅宗31 乙酉) 10月 14日 卒하니 享年이 64歲이다. 墓所는 양평군 양동면 단석리 種珠院 漫隱公墓 아래, 配位인 延安李氏, 安東權氏와 三合兆이다. 配位로는 初配는 淑人 竹山安氏로 鋐의 女이며 1639年(己卯) 出生하여 1662年 卒하였으며 墓所는 高陽市 香洞 山125-3番地 高祖父墓 右側 아래 卯坐이고 다음은 淑人 延安李氏로 海賚의 女이고 1644年(甲申)에 出生하여 1686年(丙寅)에 卒하였으며 墓所는 夫君과 合兆이고 季配는 淑人 安東權氏로 憲의 女이고 1672年(壬子)에 出生하여 1756年(丙子)에 享年 79歲로 卒하였으며 墓所는 夫君과 合兆이다. 子女는 二男一女를 두었는데 子長은
(변) 次는 涗(세)이며 女는 鄭道存이다.
公 死後 3百年이 지나 爵號 等의 記錄이 온전히 傳하여지지 않아, 공의 족적을 承政院日記와 家藏 譜牒에 依據하여 記錄한다.

2006年 12月 15日

11代 傍孫 湸亨 撰

 

 삼등공 휘 세겸 묘소

22世 (변)

字 聖功(성공) 1680(肅宗庚申)3.11.~1757(英祖丁丑)8.14. 통덕랑
○配 恭人 全州李氏 父 惟大 忌日 4.18
○墓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 산45-1번지 合兆 有碣 有床石 望柱石 -부평리에서 이장

22世 (세)

字 汝行(여행) 1693(肅宗癸酉)~1734(英祖甲寅)2.30.
○配 全州李氏 忌日 3.6. 父 漢濟 分沙聖求玄孫
○墓 여주군 강천면 간매리 杏峙 寅坐 合兆

21世 世讓(세양) cybernation_back.gif

字 得之(득지) 1647(仁祖丁亥)12.22.~1717(肅宗丁酉)7.4. 1675(乙卯),進士 蔭牧使
○配 光州盧氏 忌日 9.2. 父 監察 景命 蘇齋玄孫
○墓 양평군 양동면 石隅村 卯坐 合兆

府使公 諱世讓 遺事

公의 諱는 世讓(세양) 字는 得之(득지)이며 始祖의 21世孫으로 三登縣令을 지낸 縣令公 世謙의 아우이다. 文靖公 諱繼禧의 7代孫이며, 高祖의 諱는 性源으로 1553年 文科에 올라 通政大夫 贈承政院都承旨 行東萊都護府使이며 曾祖의 諱는 檥로 贈嘉善大夫 兵曹叅判 兼 同知義禁府使 行禦侮將軍 忠佐衛 副司果이다. 祖考의 諱는 亨吉이니 1620年 庭試文科에 及第하여 嘉善大夫 兵曹叅判 兼 同知義禁府事 世子左副賓客이며 考의 諱는 垽(은)이며 孝行과 學行으로 遺逸에 薦擧되어 通訓大夫 司憲府 執義 로 死後 通政大夫 吏曹叅議에 追贈되었다. 妣는 贈淑夫人 綾城具氏로 兵曹叅議  贈叅判 定의 女이며, 公은 1647년(仁祖25 丁亥) 12月 次男으로 태어나, 1675年(乙卯) 司馬試에 올라 進士가 되었다.
1692年(肅宗18) 廣興倉主簿에 除授된 以後, 龍宮縣監, 江西縣令, 戶曹正郞, 瑞興縣監, 漢城府判官 等을 歷任하고 1704年(肅宗30) 4月 潭陽府使에 除授되었다. 1706年 6月 全羅左道暗行御史 申鐔의 書啓에 의하면 “潭陽府使 韓世讓段, 抄飢分賑, 咸得其宜, 上今年大同及虎贖木, 自官拮据, 以紓民力, 譽聲頗聞, 隣邑亦頌” 이라고 하여 善政으로 隣近 고을에서까지 稱頌을 들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이어 1706年 12月 尙州牧使에 除授되었으며, 1713年 南原府使를 歷任하였다.
1717年(肅宗43丁酉) 7월4日 卒하니 享年이 71歲이다. 配位는 光州盧氏 監察 景命의 女이고, 墓所는 양평군 양동면
금왕리 石隅村 卯坐에 合兆이다.
公의 官職에 合當한 爵位가 있을 것으로 推定되나 公 死後 3百年이 지나 爵號 等의 內容을 밝히지 못해 記錄하지 못하고 後人들이 밝힐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承政院日記와 家藏 譜牒에 依據하여 記錄한다.

2006年 12月 15日

11代 傍孫 湸亨 撰

22世 濬(준)

字 深彦(심언) 1666(顯宗丙午)3.5.~1747(英祖丁卯)1.5.
○配 安東權氏 1665(顯宗乙巳)~1702(壬午). 6.10. 父 大司憲 珪
○配 綾城具氏 1682(숙종壬戌)~1711(숙종辛卯). 父 禹錫
○配 順興安氏 忌日 10.9. 父 重明
○墓 여주군 점동면 蟾樂 壬坐

22世 濤(도) cybernation_back.gif

字 士達(사달) 齋,遁庵(둔재,둔암) 1670(顯宗庚戌)4.11.~1717(肅宗丁酉)1.17.
1677년(肅宗丁巳) 문과장원(文科壯元)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丞政院左丞旨) 겸 경연참찬관(經筵
贊官)
性本孝友與兄濬尙論經學文義沈潛義理學識性淸儉斷行學文精博道德日就文學著世不樂仕進
1708년(肅宗戊子)屛跡居南下遂窮餓岩處而以隱逸終世
○配 정부인(貞夫人) 진주정씨(晋州鄭氏) 父 통훈(通訓) 재철(在轍)
○墓
전남 나주시 봉황면 와우리촌후(臥牛里村後) 초장동(草場洞) 간좌(坐) 합조(合兆)